초라한 연구실을 내고 집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책들을 옮겨 놓고 있다. 집이 전철역에서 가깝고 연구실도 전철역 바로 옆이라 전철을 이용한다.
오늘도 한 뭉치 책을 끌개로 가져갔다. 책은 예상외로 무겁다. 원서는 더욱 그렇다. 한가한 시간을 이용한다고 하여도, 전철안은 복잡하고 역도 그렇다. 다른 나라도 그럴가? 런던의 전철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 텅텅비어 다녔는데...
우리의 유동인구에 대하여 연구 보고서라도 작성하고픈 때가 여러번이다. 전철뿐만 아니라 평일의 고속도로를 자정이 넘어서도 안전거리도 무시하고 차선을 꽉차게 달리는 차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세계에서 기름값이 비싸기로 수위에 속하는 나라임에도....
비좁은 플레트 폼에서 통행객을 요리조리 피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어디서 확 달려 드는 휠체어가 있다. 아직 노령층이 아니라서 평소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지만, 휠체어 탄 이가 나한테 무슨 시비라도 걸가? 게름측했다.
그는 엉뚱하게도 나한테, 나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하는 말이, 자영업을 하는 얼굴이라고 내밭는다. 나를 헌책을 수집해 파는 헌책장사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다음 행동이 어떻게 될가 긴장하였다. 그의 인상에서는 분명 시비를 걸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그 때서야 나의 얼굴을 처다보았다.
그가 무슨 트집을 부릴 가 더욱 노심초사 되었다. 뜻 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학자시네'라고 하는게 아닌가. 안심이 되었다. 나의 바지는 야외 운동할 때 입는 것에다 웃옷도 여름 점버를 입었는데, 내인상이 그렇게 그에게 비쳤나 보다.
오후에는 단골로 다니는 고서점에 들렸는데, 어느 사람이 들어 와 대뜸 원서를 잡아들고는 주인에게 깍아 달라고 한다. 책명을 보니 전문 지식 수준에 있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그 책에 대해 몇 마디 했더니 이 분이 교수냐고 묻는다. 그가 책을 사가지고 돌아간 후에, 책방 주인에게 그에 대해 물었더니 어제도 와서 살려다가 돈이 없다며 돌아 갔다고 한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두 사람한테서 내가 하는 일을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확인하여 주지 않았으니 그들은 짐작할 뿐이다. 어디에서도 나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직업이나 돈으로 판단하기 보다 그 사람의 행동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이가 직업이 없느냐고 비웃기라도 해도 일체 대꾸조차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인상을 제대로 못보았으나 그들은 나의 인상을 좋게 보았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