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네틱 교황같은 어른이 가정이나 사회에 계셔야 한다.
어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존귀한 것들이 있다.
우리가 어른을 만들지 않고 또 어른다운 어른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없어지고 있음에도, 어른 노릇하려는 멘토가 등장하는 사회다.
결혼식은 양가 어른을 모시고, 엄숙한 가운데 주례의 집례로 경건하게 치뤄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있다.
청첩장의 구성도 달라졌다. 예전 청첩장 문구에는 주례가 꼭 있었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요즘 청첩장에는 주례가 없다.
결혼식에도 주례가 없다. 특별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나마 부모가 주례가 되는 경우는 다행이다. 경건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주례없는 결혼식보다 오히려, 이벤트로 진행하는 주례의 결혼식에 참석하면 망신당한 기분이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이가 주례가 되어 진행되는 결혼식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화객들에게도 영예스러운 일이었다.
주례에 따라 그 결혼식의 의미가 달라졌다.
주례를 모실 수 없는 존경할 어른이 없는 신랑 신부라면, 그동안 뭔가 잘 못된 삶은 아니었을가?
앞으로도 존경할 어른도 없단 말인가?
자신의 결혼식만이라도 부부가 한 자리에 경건하개 서지 못한 이들이 언제 경건한 자리에 함께할 가? 그들의 결혼생활은 경건하게 유지될 가?
10여 년 후, 통계를 내보면 그 가설을 입증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식 광경을 보고 눈쌀 찌프리게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한다.
엄숙하고 경건하게 결혼식은 진행되고, 잔치는 즐겁고 유쾌하게 이뤄지는 결혼문화가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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