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 상

조선의 정궁은?

by 安喩齋 2013. 8. 28.

본인은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조선의 정궁으로 창덕궁을 선호한다. 우리는 경복궁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조선의 정궁이라고 알고 있다. 과연 그럴가? 정도전을 찬양하는 이들은 경복궁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문제점이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경복궁과 연관된 인물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을 가져왔다. 그럼 그 정황을 살펴보자.

 

경복궁은 잘 알다시피, 이성계(태조)의 구테타가 성공하자, 수도를 천도하면서 원래 충청도 계룡산 기슭으로 정하고 궁궐 공사를 하다가 하륜이 수도자리가 아니라고 하여  다시 터를 잡은 곳이 한양이다. 이 한양은 고려에서도 천도하려했던 곳으로 무학대사가 터잡는 것을 주도하였고 정도전은 일체 관계없다. 궁궐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광화문을 서쪽 노고산을 향하도록 하는데, 정도전이 끼여 들어 목멱산 (남산) 쪽을 주장하였다.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 곁에서 온갖 아양을 다하였다. 그러니 그와 맞서지 않고 피하였다. 정도전은 건축공사 총책임자가 아니라 여러 관계자 중의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시에 의해 궁궐의 이름을 지었다. 이로서 경복궁이란 이름이 탄생한다. 경복(景福)은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신라 때 5대 사찰 중 하나로 경복사(景福寺)가 있었다. 그러니 사찰명이 궁궐명이 된 것이다. 정도전이 이것을 알고는 지었을리 만무하지만 이런 경우를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 하는 가 보다.

 

경복궁이 완공되고 2년 후에, 이른바 정도전의 난(무인년의 난)으로 궐내에서 왕세자(이방석)와 왕 사위(이제)가 피살되는 피비린내는 골육상쟁이 발생했고, 자신은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조선 500여년간 역적의 대명사로 존재하였다.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과는 정반대의 일이 정도전 자신으로 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경우도 있단 말인가?

 

이로서 태조는 왕위 자리를 버리고 고향 함흥으로 가 거기에 궁을 짓고 상왕으로 지냈다. 왕위에 오른 정종(태조의 둘째 아들)은 살륙이 일어난 경복궁을 폐궁하고 개성으로 천도하였다. 또다시 2년 후에 드디어 방원(태종)이 왕위에 올라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고 새로운 왕궁을 신축하고 돌아온 곳이 창덕궁(일제에 의해 비원으로 지칭)이다. 그 후 창덕궁은 조선의 왕궁으로 가장 오래 자리하였다.

 

얼마 후, 경복궁을 다시 왕궁으로 삼았으나, 세종 재위 기간을 제외하고는 또 다시 흉사가 발생하였다. 문종이 단명하고 단종이 직위하자 이번에는 삼촌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궁내에서 살륙이 자행되고, 급기야 단종까지 살해되었다. 연산군이란 폭군이 출현하고 선조 때에는 일본의 왜놈들이 처들어 오자 감당 못하고 선조는 궁을 버리고 피난갔으니 백성들은 분노하여 궁을 불태워 전소시켰다. 수 많은 백성은 왜놈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인구는 1/3로 줄어들고 국토는 유린되었다. 난이 끝나자 선조는 창덕궁으로 돌아와 줄곧 왕궁으로 이어왔다. 창덕궁은 궁으로서 후원을 갖추고 있어 전형적인 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후원은 왕이 전술을 익히는 사냥터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창덕궁은 이러한 후원을 갖추고 있으나 경복궁은 그런 후원이 없다. 불타버린 경복궁은 수백년간 터전만 남았었다.

 

고종에 이르러 대원군이 집권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독무대였던 창덕궁을 떠나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경복궁을 재축하였다. 그러면서 원래 경복궁보다 많은 건물을 신축하여 위세를 궁에서 찾았다. 경복궁을 그대로 개축했다기 보다는 창덕궁을 본 따 지은 것이다. 당시 경복궁 본래의 모습이 없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재정 부담과 기층민의 고된 노역, 양가집의 비석을 뽑아다 석재로 사용하고 묘소 주위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잘라다 목재로 사용하였으니 여기저기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이 때 노동의 시름을 잊게하려 노동요인 경복궁타령을 지어 부르게 하였고, 재정을 조달하려 당백전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거기다 매관매직으로 왕조는 구심점을 잃으며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외세인 일본과 청을 끌여 들여 진압하려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이 재건되었으나, 입궁한 다음 해에 일본 자객에 의해 민왕후가 이 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까지 넘겨주며 멸망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은 조선에서 처음과 끝 시기에 신축하고 재축하여 왕궁으로 존재하였으나, 왕조의 행운은 고사하고 완공되고 얼마되지 않아 큰 흉사를 맞아 스스로 폐궁되었다.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지금의 근정전에서 유일하게 고종만이 업무를 보았으나, 그것도 얼마되지 않는다. 조선을 탈취한 일본은 창덕궁의 위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덕궁을 비원으로 격하하여 초라하게 만들었다. 종묘 창경궁 대학로(전 서울대 문리대자리) 현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어지는 궁궐 곳곳에 도로를 내어 분리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며 동물원과 위락시설을 설치하여 궁으로서 위용을 떨어드렸다. 따라서 그동안 조선에서 가장 오래 왕궁으로 자리한 웅장한 창덕궁을 격하시켜 정원으로 지칭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체 비원으로 부르다가 근자에 와서 창덕궁, 창경궁으로 부른다. 일본은 조선의 기상을 망가트리려 경복궁을 정궁으로 하면서도 궁내의 건물을 파기하여 조선총독부를 건축하고,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해방이 되고 그 곳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집무실 겸 관저로사용하며 경무대로 불리다 4.19로 집권한 윤보선 대통령 때 부터 청와대로 불리며, 노태우 대통령 때 지금의 청와로 신축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이란 이름을 지은 정도전도, 또한 대원군(이하응)은  그동안 정도전을 조금이라도 찬양할 기미만 있어도 역적으로 몰려 귀양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상황에서 경복궁을 완공하고 그러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도전에 제사를 지내고 경복궁으로 이궁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조선은 우리민족 유사이래 이민족에게 망하고 말았다. 

 

정도전은 경복궁이란 이름지었으나, 2년만에 스스로의 행위로 피살되고 조선역사에서 역적의 대명사로 남았고 (일제에 의해 개혁가로 부상), 박정희 대통령은 사라졌던 경복궁의 광화문을 시멘트로 재건하여 궁의 위용을 갖췄으나 말년에 피살되는 불행을, 김영삼 대통령은 경복궁 복원 사업을 추진하며 경복궁 내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였으나 환란이란 국가적 재앙이 왔고, 노무현 대통령은 시멘트로 된 광화문을 부수고 새로 건축하였는데 그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경복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흉사를 격게하였다. 개인의 집도 폐가가 되면 다시 그 집을 재축하여 입주하지 않는다. 수차례 폐궁되었던 경복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삼았으니 불행을 자초하였다. 이러한 불상사는 경복이란 이름에서 온 것이 아니가 한다. 사찰명으로 쓰였던 경복사를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으로 쓰이며 불교를 탄압하였으니 좋을리가 없다. 정도전의 경복궁이란 환상에 빠진 것은 일제의 간교한 조선얼 말살책에 국사업자들이 지금까지도 경강부회하기 때문이다. 창덕궁이 조선의 궁으로서 오랜동안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칭 규모 풍수상으로 정궁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본다.    

 

1970년대에 창덕궁 안에 기밀을 요하는 시설물 설치공사를 수년간 하였기에, 지금은 그 기밀 시설로 안내자의 동행하에 30분이내로 소요시간과 관람장소를 극히 제한하고 있어 일부분만 볼 수 있다 정궁으로서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 한번 창덕궁을 관람하면서 그 위용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숭례문 복원에 대한 유감  (0) 2013.11.12
안동 골매  (0) 2013.10.29
주객 전도된 전세난 해결책  (0) 2013.08.28
개혁이 어려운가?  (0) 2013.08.21
창조경제란?  (0) 201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