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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소견

by 安喩齋 2015. 7. 16.

첨성대(瞻星臺)는 신라 선덕여왕 때 조성된 것으로 경주 반월성의 동북쪽, 천마총이 있는 동궁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나에게 그 용도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기였다. 첨성대(瞻星臺)라는 명칭은 승려인 일연이 1281년에 기록한 삼국유사에서 처음 나온다. 일연이 자신으로부터 650 여년전에 조성되어 내려오는 구축물에 대하여 어떤 의도에서 '첨성대'라고 붙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전부터 내려오던 명칭인지? 아니면 자신이 지은 명칭인지? 물론 용도에 대하여도 일체 언급이 없다. 그로부터 천 수백 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단순히 첨(瞻)자를 관찰하다(observe)로, 성(星)자를 별(star)로 간주하고 추리소설로 천문을 관측한 시설물로 주장할 뿐, 뒷받침할 근거는 신통치 않다.

 

이미 불교 관련 구축물이란 연구가 있었으나, 우주천문을 전공하는 이들은 이런 연구를 부정하며 자기들 냄새를 물씬 풍기는 방위도표를 그려 놓고, 천문 관찰 시설물이라 한다. 위에 놓인 돌의 우물 정(井)자 형태를 사방방위로 북두칠성과 연계시켜 큰 곰, 작은 곰을 그린다. 어느 지역이고 북쪽에는 북두칠성이 존재하여 이를 기준으로 위치를 관측하였음에도 그렇게 한다. 첨성대의 높이로는 평지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것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어 보인다. 오히려 광활한 산 정상에서 별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같다. 우물정(井)자 형태는 다보탑의 옥개석 기단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 또한 경주지역의 건축물 배치도를 그렇듯하게 그려 놓고 이를 근거로 갖은 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지형에 따라 구축물은 어느 정도 일정하게 분포될 수 있다. 비탈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건축물이 세워진 경우는 지금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 행성의 관측 기록이 많았다고 하며 천문 관측시설이라고 역설 한다. 그 인과관계가 성립하려면 첨성대에서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시 행성 출현이 잦아졌다면 당연히 일반 장소에서도 관측될 빈도가 높아진다. 그러므로 행성이 자주 나타나서 기록이 많았는지 아니면 첨성대가 조성되고 보다 세밀히 행성을 관측할 수 있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중간에 공간은 왜 만들었을 가? 그들은 정남향으로 해의 경도에 따라 시간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구태어 사다리를 타고 비좁은 공간에 올라가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평지에서도 똑같이 관찰할 수 있다. 원통형의 첨성대를 구축하려면 각기의 벽돌 도면을 만들고 그 도면에 따라 돌을 깍아야 하는데 까다로운 작업이다. 큰 화강암을 사면체로 쌓는 것이 작업도 수월하고 무엇보다도 튼튼하고 상층 부 공간 확보에도 유리하다. 천문을 관측할 수준이라면 그러한 지혜는 당연히 갖췄을 것이다.


쌓아 놓은 돌의 갯수를 헤아리는 기준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361개의 돌을 365일에 염두를 두고 1년의 날 수와 연관시킨다. 당시 동서양 모든 나라는 달(月; moon)을 기준으로 한 달에 29일과 30일을 번갈아서 사용하였는데, 동양에서는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태음력(太陰曆)이라 하였고, 서양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 ( Julius Caesar )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하여 율리우스력 (the Julian calendar)이라 하였다. 이들은 한 해가 354일이 된다. 그러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스력을 개정하여 1582년 10월 5일을 기점으로 1년을 365일로하는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태양력)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년의 날수와 연관시킨 362개의 돌은 구축물에 소요된 갯수에 지나지 않아, 천문관측 시설물이라는 주장을 하다가 최근의 발표에서는 태음력을 기준으로 벽돌 29.5개를 용케도 끌어다가 견강부회한다.

 

그럼에도 시설물만 있고, 정작 관측도구와 관측기록은 전혀 없다. 삼국유사 집필시 기준으로 650 여 년이 흘러 실물이 사라졌다 하여도, 그 기록은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삼국유사는 글자그대로 삼국사기에서 빠진 것을 불자인 일연이 수습해 놓은 것으로 불교설화가 많다. 반면에 유자였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이 첨성대를 언급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담아 축조하였다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오르내리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가? 겉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안으로 사다리를 놓고 타서 비좁은 상층부까지 올라가 관측하였다고 보기엔 설득력이 없다. 상층부는 수시간 별을 관측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로 판단할 때 오르내리는 구축물이 아니란 것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다. 다보탑은 2m에 불과한 곳에도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봉사 코끼리 더듬기와 다름없는 이야기로 세미나를 근사하게 열어 언론을 타면 저명 연구자가 되는 것이 바로 첨성대에 관한 연구가 되었다.

 

나의 이러한 의혹과 호기심에서, 그 쓰임새를 규명하려 다각적으로 시도해 보았다. 당시 선덕여왕은 첨성대가 건축되던 시기에 황룡사를 건축하고 9층 석탑을 조성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였다.

 

그리고 '瞻'자는 지킨다 '星'자는 밤(夜)이란 뜻이 있다. 따라서 첨성대는 밤(夜; night) 즉 어둠을 지킨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광명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첨성대의 구조는 전혀 오르내릴 필요가 없는 설계로 구축되었다. 용도는 직관적으로 전탑(塼塔)이라 판단되었다. 전탑은 인도 중국에서는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사용하였으나, 신라에 전해지면서 석조 기술로 화강암을 잘라 돌벽돌로 쌓은 것이다. 중간의 남쪽 공간은 전탑의 감실(室; 부처상을 안치한 공간)이라 추정된다. 


 


언젠가 (일제시?) 감실 안의 부처를 탈취하기 위하여 해체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감실 부분 위의 돌출된 돌과 함께 우물정자를 이루는 8개 긴 돌은 감실을 구축했던 기둥 내지 위에 걸쳤던 둘로 보인다. 그 위치도 감실 맨 밑에서 부터 구축되었던 것으로 지금의 감실 창 보다 큰 창이었다. 감실부분을 형성하는 지금 2개의 기둥 돌과 위아래 가로 돌은 다른 곳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원래 원뿔 형태인 탑을 다시 쌓으면서, 원상태 복구가 어렵자, 중단하고 감실을 이루던 8개의 돌을 이중으로 놓아, 탑이 바람으로 붕괴되는 것을 중력으로 지탱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진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첨성대



 운주사 석조불감

 

분황사 모전탑

 


 

불국사 다보탑 측면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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