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북한 학자의 글이다. 그러므로 이를 소개하는데는 이념적 의미는 전혀 없고, 오직 학문적 관점에서 옮겨 게재한다는 것을 밝히니 오해없기를 바란다.
1. 우리 나라 국호표기사용과 일제의 책동에
대한 력사적경위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실장 학사 안경상
민족의 존엄과 기상의 대명사인 주권국가의 국호표기를 백주에 날조한 일본제국주의의 력사적인 범죄행위는 침략과 략탈의 어지러운 정치풍토에서 양육된 군국주의 일본만이 저지를수 있는 력사적인 대범죄행위이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날조문제는 본질에 있어서 고려의 국명에 연원을 두고 발생한 ≪C≫자 중심의 국호표기가 일제의 악랄하고 교활한 책동에 의해 ≪K≫ 자중심으로 날조된것이며 오늘까지 아무런 정치적문제도 없이 국제사회에 묵인되여 온 문제이다.
일제의 국호표기날조행위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굴고증된 자료에 기초하여 우리 나라 국호표기사용과 일제의 날조책동에 대한 력사적경위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학계가 지금까지 조사연구한데 의하면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의 력자적경위는 크게 세단계로 나누어 볼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우리 나라 국호표기기가 ≪C≫자중심의 표기로 일관된 시기이고 둘째단계는 ≪C≫ 와 ≪K≫ 가 혼용된 시기이며 셋째단계는 ≪C≫가 완전히 말살되고 ≪K≫만이 쓰인 시기이다.
첫째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13세기중엽부터 18세기후반까지 ≪C≫로 일관하게 표기되였다.
1255년 프랑스인에 의해 ≪까울레≫라는 우리 나라 국호의 첫 표기가 나타난 뒤 1513년 뽀르뚜갈에서의 ≪Corea≫라는 표기기록을 거쳐 우리 나라의 국호는 프랑스. 이딸리아, 뽀르뚜갈, 네데를란드, 도이췰란드 등 유럽의 여러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C≫자를 첫글자로 하여 표기되였다.
그후 이러한 국호표기는 그대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영어권나라들에 전승되였다.
물론 1700년대의 일부자료들에 ≪K≫ 를 첫글자로 하는 국호표기가자료가 나오는데 이것은 유럽사회계의 관례적인 국호표기를 따른 것이 아니라 개별적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언어관점에서 쓴것으로서 그 사용의 력사나 량에 있어서 ≪C≫자로 시작된 국호표기와는 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C≫ 자를 첫 글자로 하는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12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는 근 700년간의 력사를 거쳐 ≪Corea≫ 로 고착되였다.
둘째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 ≪Corea≫ 는 1800년대말부터 일제의 악랄하고 교활한 책동에 의해 ≪K≫ 를 첫 글자로 하는 ≪Korea≫ 표기와 혼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사상이 골수에 차 있던 일제에게 있어서 ≪Corea≫ 가 저들의 ≪Japan≫ 이라는 국호표기보다 영문자모순배렬에서 앞선다는 사실은 심사에 뒤틀리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일제는 당시 성행하기 시작한 영문식표기법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비과학적인 ≪학술적인 근거≫ 를 꾸며내여 ≪Corea≫ 표기의 불합리성과 ≪Korea≫ 표기의 합리성을 내돌렸으며 1870년대말부터 친일적인 서양인들을 부채질하여 우리 나라 국호를 ≪Korea≫ 로 표기하도록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외국인들에 의하여 1870년대 후반기부터 ≪Korea≫ 가 점차 쓰이고 1880년대에 들어 와 조선과 일본의 대외관계 조약문들에 ≪Corea≫ 가 표기되는등 표기혼용시기가 존재하게 되였으며 이러한 혼용은 일제의 조선강점이 완전히 실현된 1910년 전까지 지속되였다.
교활하고 간특한 일제는 1900년대에 들어 서면서 국제사회에 우리 나라 국호가 ≪Corea≫ 로 공인되여 있는 실태와 조선사람들의 반일감정을 고려하여 제놈들의 통감부 관보, 조약문 및 대외관계 문서들에서 ≪C≫ 와 ≪K≫ 를 섞어 쓰는 절충식 방법으로 표기날조를 단행하였다.
셋째로, 우리 나라 국호표기 ≪Corea≫ 는 일제의 조선강점이 실현된 1910년부터 완전히 말살되였다.
일제는 ≪한일합병조약≫ 을 날조하는 마당에서부터 우리 나라 국호를 로골적으로 묵살하였으며 공식적인 대외관계 문서들에서 우리 나라 국호를 공개적으로 ≪Korea≫ 로 표기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부터 국제적으로 ≪C≫ 가 아니라 ≪K≫ 를 첫 글자로 하는 ≪Korea≫ 가 우리 나라 국호표기로 전용되였으며 식민지조선의 비참한 운명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고유한 국호표기 ≪Corea≫ 는 력사의 흑막속에서 묻히는 비극적사태가 발생하였다.
우리 나라 고유한 국호표기 ≪Corea≫ 가 일제에 의하여 ≪Korea≫ 로 날조된 후 아무런 정치적, 학술적문제거리도 없이 오늘에 이르는 근 100여년동안 서서히 국제사회에 고착되였다.
넷째로, 우리 나라 국호표기날조과정은 일제의 교활성과 악랄성, 제국주의 침략적본성이 집중적으로 발현된 범죄과정이였다.
우선 일제의 국호표기날조과정은 일본특유의 교활성을 생리로 하는 섬나라 오랑캐들의 간특한 날조과정이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영문국호표기가 외국글자에 의한 국명표기라는데로부터 먼저 외국인들을 내세워 날조행위의 시발을 뗐으며 영어권나라들의 영향력에 의한 영문자표기사용의 시대적 추세를 우리 나라 국호의 국제적인 외곡표기추세로 교묘하게 몰아 갔다.
다음으로 영문국호표기날조과정은 처음의 은폐된 형태로부터 점차 강압적이며 공개적인방법에로 이어 진 일본사무라이식포악성이 그대로 드러난 범죄과정이였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 체결되던 1905년경부터 그전의 은폐되고 절충적인 날조방법에서 점차 벗어난 로골적이며 공개적인 날조방법에 매달렸으며 대외관계문서는 물론 대내외공개문서인 ≪관보≫ 에서까지 ≪Korea≫ 를 뻐젓이 사용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던 1910년 당시 우리 나라 국호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
것은 8월 조선에 대한 침략조약을 날조하던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한국합병합시말≫의 자료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 자료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일본내각총리에게 조약을 날조하던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보고한 자료이다. 여기서 데라우찌는 우리 나라의 국호와 왕의 호칭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는 리완용 등 조선측 대표들을 향하여 ≪병합하는 마당에서 국호는 무슨 국호인가≫ 고 폭언하였다.
일제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날조행위는 조선강점기간 일제가 감행한 <민족어말살책동>,<창씨개명책동>과 함께 언어학부문에서 감행한 력사적인 3대범죄로서 일본정부가 조선인민앞에 반드시 사죄하여야 할 문제이다.
2. 력사에 묻힌 ≪Corea≫ 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리 나라 국호표기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학사 장영남
오늘 우리 나라는 ≪코레아≫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 져 있다.
≪코레아≫ 는 중세 우리 나라 국호의 하나였던 ≪고려≫라는 말에서 유래한 유럽식 표기이다.
오랜 력사적기간 국제적으로 공인되여 쓰이여 온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Korea≫ 가 아니라 ≪Corea≫ 였다. 다시말하여 ≪코레아≫ 의 영문표기는 첫 글자가 ≪K≫ 가 아니라 ≪C≫ 였다.
첫째로, 유럽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처음부터 첫글자가 ≪K≫ 가 아니라 ≪C≫ 로 시작되였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중엽의 류브류크의 려행기라고 볼수 있다.
류브류크는 프랑스인 선교사로서 프랑스왕 루이 9세와 로마법왕 인노켄티우스 4세의 명령으로 1253년에 몽골에 파견되였다가 1255년 8월에 귀국하여 려행과정에 보고 들은 동양 각지의 지리, 풍습, 종교, 언어 등을 기술한 려행기 (linterarium fratris William de Rubruquis de ordine fratrum Milorun)를 발표하였다. 그는 려행기에서 중국 동쪽에 ≪까울레≫ (caule)라는 나라가 있다고 하였다.
프랑스어로 씌여진 이 려행기에서 까울레는 ≪C≫ 로 표기되였다.
류브류크의 기록자료는 1894년판 ≪은둔국 조선≫ ( ≪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1248년 몽골을 려행한 류부류크의 려행지도에서 조선(Corea)은 일본 북서쪽의 섬으로 표시되였다≫ 고 기록된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류부류크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 대한 유럽의 기록자료로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보다 조금 늦은 자료로서는 이딸리아인 마르꼬 뽈로 (Marco Polo)dml ≪동방견문록≫ 이 있다.
마르꼬 뽈로는 1270년부터 1295년까지 원나라를 려행한 베네찌아의 상인인데 귀국후인 1926년에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로 가는 로정과 원나라 조정의 제 사정, 중국국내려행과정에 얻은 견문, 귀국할때의 로정등을 서술한 ≪동방견문록≫ 을 내놓았다. ≪동방견문록≫ 은 감옥안에서 쓴 저작으로서 그가 프랑스어로 말한 것을 같은 방에 수감되여 있던 류스티찌아노에게 필사시킨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책에서 우리 나라 ≪까울리≫(Cauly)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였는데 프랑스어로 씌여졌던 관계로 ≪C≫ 로 표기되여 있다.
이처럼 13세기 중엽에 까울레, 까울리로 유럽에 처음으로 알려진때로부터 우리 나라 국호의 표기는 첫 글자가 ≪K≫ 가 아니라 ≪C≫ 로 되여 있다.
둘째로,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프랑스어나 뽀르뚜갈어, 영어, 네데를란드어 등 그 어종에는 관계없이 유럽에서 모두다 첫 글자가 ≪C≫ 로 표기되였다는 것이다.
16세기이후 유럽의 자본주의발전의 길에 들어서고 동방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면서 우리 나라는 유럽의 여러나라들에 널리 소개되였다. 이 시기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그 어종에 관계없이 모두 ≪C≫ 로 일관되여있었다.
유럽에서 동방침략의 앞장에 섰던 뽀르뚜갈의 16~17세기 자료에는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가 ≪C≫ 로 시작된 ≪Corea, Coray, Corie≫ 등으로 나타나 있다.
1513년 6월 뽀르뚜갈왕 엠마누엘이 로마법왕 레오 10세에게 보낸편지와 1577년에 출판된 ≪아폰소 알브궤르케전기≫등에는 ≪<꼬레tm> (Corea)라는 상인단이 <레키아>라는 나라로부터 말라까로 오군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1556년부터 1570년까지 일본에서 전도사업을 한 뽀르뚜갈신부 가스빠를 빌렐라 (Gaspar Vilela)는 1571년 본국에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우리 나라를 코라이(Coray)로 표기하였다.
1571년 2월 부 첫 편지에서 그는 ≪일본으로부터 배를 타고 10일쯤 가면 < 코라이 >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따따르 (Tartar, 즉 달단, 몽골을 의미)에 들어가는 어귀에 있으며 그곳에서 더 나아가면 알레마니아 (Allermania, 도이취: 역 자주)에 도달한다…≫라고썼으며 1571년 10월부 둘째 편지에서 ≪일본에서 다른 방면으로 3일쯤 가면 그 나라에서 코라이라고 부르는 옛날부터 유명한 큰 나라가 있다≫ 고 하였다.
네데를란드의 력사자료에서도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C≫ 로 시작된 ≪Corey≫ , ≪Coeree≫ 로 되여 있다.
네데를란드 지리학자였던 오르텔류스(Ortelius)는 1570년에 53매의 지도를 묶어 ≪세계지도첩≫ (Theatrum orbis terrarum)을 출판하였는데 이 지도첩에서 우리 나라는 ≪Corey≫ 로 표기되여 섬처럼 그려 져 있다. 또한 세계에서 널리 알려 져 있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의 1668판 ≪네데를란드선박의 제주도 난파기 및 조선국기≫ (일명 ≪하멜표류기≫ )에는 우리 나라를 ≪Coeree≫ 로 표기하였다.
특히 영어자료에서도 우리 나라 국호는 첫 글자가 ≪C≫ 로 표기되여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며 항해사가였던 리챠드 해클류트 (Richard Hakluyt)는 1660년에 ≪영국민족의 주요항해, 항해일지 및 발견≫ (Principl Mavigations, Voyages
and Discoveries of the English Nation) 이라는 책에서 우리 나라 국호를 Coray 로 표기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뽀르뚜갈사람들이 코리아 (Coria) 등으로 부르는 코라이대왕국에 관한 1590년, 1592년, 1594년의 세가지 증언자료들을 제시하였다.
이딸리아의 력사문헌자료에서도 역시 우리 나라 국호는 ≪C≫ 로 표기되였다. 이딸리아인 프란체스코 까를레티(Francesco Carlrtti)는 1594년부터 1606년까지 13년간 배를 타고 세계를 려행한 후 려행기를 남겼는데 거기서 우리 나라를 ≪Corea≫로 표기하였다.
그의 려행기는 100년후인 1708년에 이딸리아의 플로렌스에서 ≪세계주유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였는데 우리 나라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려행기에서 ≪
우리 자료들에서 알수 있는것처럼 우리 나라의 국호는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나 뽀르뚜갈어, 네데를란드어, 이딸리아어 등 그 어종에는 관계없이 모두 첫 글자가 ≪C≫ 로 표기되여 있다.
우리 나라 국호가 그 어종에 관계없이 모두 ≪C≫ 로 표기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흥미있는 자료는 ≪하멜표류기≫ 의 1672년판 도이취어번역본이다. 이 번역본은 프랑스어판본을 번역출판한 것인데 ≪Corea≫ 와 ≪Korea≫ 가 혼용되여 쓰이고 있다. 원래 프랑스어의 ≪C≫ 가 도이취어로 전사될때에는 ≪K≫ 로 넘어 가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프랑스어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인 ≪Coree≫ 를 도이취어로 옮기면서 ≪Corea≫ 로 표기한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유럽에서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철저히 국가의 상징적인 표기로서 ≪C≫ 로 되여 있었다는 하나의 단적인 실례이다.
셋째로, 유럽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로 고착되여 관례적으로 널리 쓰이여 온것도 다름아닌 ≪Corea≫였다는 것이다.
17세기 중엽이후 유럽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지난 시기의 혼란이 극복되
고 점차 ≪Corea≫ 로 고착되여 쓰이게 되였다.
17세기 전반기까지 유럽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모두 ≪C≫ 로 표기되면서도 ≪Caule, Cauly, Coray, Corey, Coria, Cores≫ 등 여러 가지로 쓰이여 왔다. 이렇게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혼란되여 있는 것은 이 표기들의 필자들 모두가 조선에 와 보지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발음을 듣고 자기식으로 표기하였기때문이다.
17세기 중엽이후 조선에 다녀 갔거나 조선사람을 직접 만난 유럽인들이 나타나면서 국호표기에서 혼란성은 점차 극복되여 갔다.
특히 제주도에서 표류되여 1663년 8월부터 1666년 9월까지 14년간이나 조선에서 생활한 핸드릭 하멜이 쓴 표류기가 출판되여 널리 소개된 것을 계기로 유럽에서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점차 ≪Corea≫ 로 고착되게 되였다.
이것은 하멜표류기의 판본들과 번역본들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가 어떻게 표기되였는가를 대비고찰하면 잘 알수 있다.
네데를란드어로 된 1668년의 암스테르담판본과 노테르담판본에서는 ≪Coeree≫ 로 표기되였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1670년 빠리판본, 1715년과 1732년의 암스테르담판본, 1764년의 빠리판본에서는 모두 ≪Coree≫ 로 표기되였다. 프랑스어에서는 첫 번역본으로부터 ≪Corea≫ 의 프랑스식표기인 ≪Coree≫ 로 쓰이였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쓰이여 오고 있다.
도이취번역본으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672년의 뉴른베르그판본이 있는데 ≪Corea≫ 와 ≪Korea≫를 혼용해 쓰고 있다.
영어번역본으로는 1704년의 런던판본(프랑스어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1732년, 1744년, 1745년, 1752년의 런던판본, 그리고 1705년의 런던판본이 있는데 모두 ≪Corea≫ 로 표기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출판된 1884년과 1885년의 필라델피아판본에서도 ≪Corea≫로 표기하였다.
이 자료들은 유럽에서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17세기 중엽이후로는 영어나 프랑스어에 관계없이 모두 첫 글자가 C로 표기되였으며 영어에서는 ≪Corea≫ 로, 프랑스에서는 ≪Coree≫ 로 고착되여 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7세기 중엽이후 고착되기 시작한 ≪Corea≫ 는 그후 유럽에서 우리 나라 국호에 대한 관례적인 표기로 널리 통용되였다.
18~19세기 동아시아에 대한 유미렬강들의 침략이 더욱 로골화되면서 유럽의 문헌들과 지도들에서는 조선관련 자료들이 눈에 띄게 많아 지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에 출판된 수많은 조선관련 서적들과 지도들에서 보게 되는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거의 모두가 ≪Corea≫ , ≪Coree≫ (프랑스식 표기)이지 다른 식의 표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이 시기에 우리 나라 국호표기로 ≪Corea≫ 가 관례적으로 쓰이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세기중엽까지 유럽에서 ≪Corea≫ 가 우리 나라 국호표기로 관례적으로 쓰이여 왔다는것은 1882년이전까지의 영문판백과사전들에 ≪Corea≫ 만 있고 ≪Korea≫ 는 없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넷째로, 우리 국가와 인민이 처음으로 공식인정한 영문표기도 ≪Corea≫ 였다는 것이다.
≪Corea≫ 가 유럽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국호표기로 널리 쓰이는데 따라 19세기 말 우리 인민과 봉건국가도 ≪Corea≫ 를 우리 나라 국호에 대한 표기로 정식인정하고 사용하게 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서방과의 첫 외교조약인 1882년 5월 22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호의 영문표기를 ≪Kingdom of Corea≫ 로 씀으로써 ≪Corea≫ 를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로 정식인정하였다. 이때로부터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의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전까지 대외문서에서 ≪Corea≫는 우리 나라의 공식국호로 널리 사용되였다.
≪Corea≫ 가 우리 나라 국호에 대한 표기로서 력사적으로 공인되고 고착되였다는 것은 유미인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1894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은둔국조선≫ 에서 윌리암 엘리오트 그리피스 (William Elliot Griffis)는 이렇게 썼다.
≪유럽식 이름
황해(Yellow Sea: 조선서해)의 첫 항해자였던 뽀르뚜갈인들이
필자는 ≪고려≫ 를 일본식이나 중국식발음으로 표기할 때에는 첫 글자를 ≪K≫ 로 옮겨적으면서도 국호 ≪Corea≫ 의 첫 글자는 철저히 ≪C≫ 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유미인들이 ≪Corea≫ 를 전자법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력사어원론적이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호표기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본것과 같이 유럽에서 우리 나라 국호는 그 첫 시작인 13세기 중엽부터 19세기 60년대까지 그 어종에 관계없이 첫 글자가 ≪C≫ 로 표기되여 왔다.
또한 ≪Corea≫ 는 유럽에서 우리 나라 국호표기로 력사적으로 관례화되여 왔고 그에 따라 우리 국가와 인민도 정식 인정한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국호표기이다.
오랜 력사적기간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로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전통화되였던 ≪Corea≫ 는 일제의 악랄한 외곡날조책동에 의하여 19세기 90년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일제의 조선강점을 계기로 완전히 ≪K≫ 로 넘어 가 력사의 갈피에 묻혀 버리게 되였다.
3.≪Corea≫는 19세기 말 조선과 유미렬강사이에 체결된 조약문들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공인되였던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학사 리성호
력사적인 연유로 하여 유럽인들은 13세기 중엽으로부터 당시까지 조선의 국호를 ≪C≫ 를 첫글자로 하여 표기해 왔다. 실례로 당시 영어에서는 조선을 ≪Corea≫ 로, 프랑스어에서는 ≪Coree≫로 표기하였다. ( ≪Corea, The Hermit Nation≫ W. E. Griffis 1884)
리조봉건정부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미렬강과의 통상교섭에서 자기의 영문국호표기로서 당시 유미사회계에 널리 알려지고 일반화되였던 ≪Corea≫ 를 택하였다. 따라서 조선정부와 유미렬강사이에 체결된 영문조약문들에서 우리의 국호는 모두 ≪Corea≫ 로 표기되게 되였다.
1880년 5월 4일에 미국정부가 통사회담의 임무를 주어 조선에 파견한 전권대표였던 미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Robert w.Shufeldt)는 일본정부의 알선을 받아 부산에 도착하여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왔는바 서한은 조선의 국호를 한자로 ≪대고려국≫(大高麗國)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미국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를 문제삼아 1880년 8월초에 당시 례조참의였던 김홍집을 일본 도꾜에 파견하여 외무경(외상) 이노우에를 만나 미국정부의 서한을 거절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국호문제와 관련한 리조정부의 립장을 그대로 반영한 하나의 단적인 실례이다.
미국정부가 국서에서 ≪대고려국≫이라고 표기한 것은 당시 유미인들이 조선을 가리켜 부르던 ≪Corea≫ 라는 국호의 한자음역에 충실하려고 했던 의도로는 볼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대조선국≫ 과 동일시할수 없으며 따라서 조선정부측으로서는 ≪대고려국≫ 을 자신의 공식국호로 접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서거절사건으로 하여 결렬된 조미사이의 교섭은 이에 직접적인 리해관계를 가진 청나라의 교섭과 일본의 공작으로 다시 추진되여 1882년 5월 22일에 제물포 (인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영문으로는 ≪Treaty of Amity and Commerce≫혹은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The United State of America and Kingdom of Corea≫) 이 체결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은 쌍방의 국기원수들의 비준을 거쳐 이듬해인 1883년 5월 19일에 서로 교환되여 정식으로 발효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의 체결을 계기로 하여 1883년 11월 26일에 ≪조영수호통상조약≫ 과 ≪조도수호통상 및 항해조약≫ 이 1884년 6월 26일에는 ≪조이수호통상조약≫, 1886년 6월 4일에는 ≪조프수호통상 및 항해조약≫, 1892년 6월 23일에는 ≪조오수호통상조약≫ 등이 련이어 체결되였다.
이 모든 조약문들의 영어원문판은 조선의 공식국호표기를 ≪Corea≫ 로 명기하였다. (≪Korean Treates, Treaties and Conventions between Corea and other powers≫ N. Y. , H. S. Hichols 1919)
≪조미수호통상조약≫ 과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조선정부가 유미의 렬강정부들과 체결한 제 조약들은 ≪조선≫이라는 국호의 영어표기명 ≪Corea≫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해내외에 선포한 국제적조약문들이다.
이 조약들에 의하여 ≪Corea≫의 조선어대역명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것이 규정되였고 따라서 ≪조선≫과 ≪Corea≫는 1:1의 대응관계에 있고 조선의 정식구호는 ≪대조선국≫, 그의 영어표기명은 ≪Kingdom of Corea≫라는 것이 확정되였다.
상기 조약들의 체결은 아직 조선과 국교관계가 없는 유미제국들에 대하여 조선의 정식국호는 영어로 ≪Corea≫로 표기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계기로도 되였다.
이리하여 유럽에서 수백년간 조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써오던 ≪Corea≫라는 이름은 조선과 국교를 맺은 유럽의 렬강들이 국가간의 공식문서들과 기타의 사회생활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조선의 정식국호표기로 공인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 ≪조영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조선의 정식 영어 대역명이 ≪Corea≫라는것을 선포한 조선정부는 조약체결이래로 영문으로 된 문서들에서 국호를 ≪Corea≫로 표기하였다.
국호의 영어대역명에 대한 조선정부의 이와 같은 립장과 태도는 구한국정부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개혁을 실시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칭제건원을 단행한 구한국정부는 국호의 영어대역명을 ≪Empire of Corea≫(Corea 제국)로 표기하였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대한≫이라고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어대역명을 새로 정하기 않고 ≪Corea≫로 했다는 것은 대한제국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유미제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맺은 당사국인 ≪Kingdom of Corea≫의 계승국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동시에 자기의 력사적정통성을 강조하려는 것이였다.
1897년의 개혁에 의하여 ≪조선:Corea≫라는 1:1의 대응관계는 ≪조선: Corea: 대한≫이라는 3각관계로 변동되였으나 조선정부나 대한제국정부나 다같이 자기 국호의 영어대역명을 ≪Corea≫로 표명한것만큼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호 ≪Corea≫는 여전히 우리 나라의 공식구호로 인정되였다.
조선대표단이 1900년 빠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Corea≫라는 국호를 가지고 참가하였고 주최자측에서도 이것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국제사회계가 ≪Corea≫를 우리 나라의 공식국호로 간주하고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 된다.(≪Encyclopedia Britannica≫ 1902)
오랜 력사적전통을 가지고 있고 조선정부와 국제사회계가 공인하고 있던 국호 ≪Corea≫룰 ≪Koerea≫로 위조한 당사자인 일제자체가 우리 나라에 관한 조약들의 영역문들에서 우리의 국호를 ≪Corea≫로 표기하였다는 것은 중대한 력사적의
미를 가진다.
그것은 ≪을사5조약≫의 강압 ≪체결≫로 인하여 대한제국정부가 사실상 대내외적으로 자주권을 상실당하였으나 일제의 소위 ≪보호국≫으로 ≪통감부≫의 통치하에 1910년 전대미문의 날조문서인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명색상으로나마 존재해 있던 조건에서 일제는 우리의 국호표기를 대내외적으로 감히 공개적으로는 위조할 수가 없었다는것이다. (韓國條約類纂)1908)
조선의 국호표기 ≪Corea≫가 저들의 비위에 거슬린다 하여 ≪Korea≫로 표기되도록 음으로 양으로 책동해오던 일제가 청국과 로씨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는 듯이 국제사회계를 기만우롱하고 우리의 국호에 대해서도 ≪Corea≫로 인정하고 쓰는듯이 위장했다는 것은 숨길수 없는 력사적사실이다.
군사적인 위협공갈과 매수, 사기협장의 수법으로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여 우리 나라를 병탄한 일제는 그날로 즉시에 가면을 벗어 던지고 우리의 국호표기를 ≪Korea≫로 공공연히 날조하였다.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당일날에 벌써 이 ≪조약문≫ 영어번역문을 일방적으로 조작해 놓고 있었으며 우리의 국호를 ≪Korea≫로 위조해 놓았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이래 조선에 관한 국제적인 공문서들에 ≪Corea≫로 공인되여 오던 우리의 국호표기는 1910년 일제의 ≪합병조약≫날조체결을 계기로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4.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 날조책동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박사 리승길
△ 일제의 ≪Corea≫표기날조책동의 동기
일제의 ≪코리아≫표기날조는 19세기 후반기 일본의 대조선관에 기초한 고약한 제국주의적심보와 과대망상증의 산물이다. 1868년 명치유신이후 일제는 자기를 아시아에서 영국에 비유할수 있는 강국으로, 조선은 사이좋은 린국으로는 될 수 없는 식민지지배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제국주의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19세기 후반기 조선에 대한 부단한 팽창과 일방적인 간섭과 침략행위를 감행하여 왔다.
한편 19세기 말 조선은 개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유미렬강들과 국교를 수립하고 여러 가지로 대외진출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실례로 1893년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열렸던 아메리카대륙발견 400주년기념 만국박람회에 고종왕의 어명으로 참의내무부사 정경원이 출품대신으로 임명되여 참가한 것을 들수 있다. (≪리조실록 390(고종14)≫, 249페지) 당시 조선의 영문국호표기가 ≪Corea≫로 공인되여 있은만큼 조선측이 자기의 국호를 ≪Corea≫로 하였을 것은 명백하나 1902년 이 박람회를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참가국들을 자모순으로 렬거하면서 ≪Korea≫로 표기하여 일본 (Japan)의 뒤에 놓고 있다.(≪Encyclopedia Britainica≫, 1902년) 이것은 철저히 일본의 비뚤어 진 심사로 하여 빚어 진 비극이였다.
국제적인 회합이나 문서의 작성에서 나라이름들의 라렬은 해당언어의 자모순에 따른 것이 관례이다. 영어표기의 경우 조선의 국호표기인 ≪Corea≫의 첫 문자 ≪C≫는 일본의 국호표기인 ≪Japan≫의 ≪J≫에 비해 자모순에서 훨씬 앞서므로 ≪Corea≫가 ≪Japan≫의 앞에 놓이게 된다. 당시 조선을 식민지지배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던 일본의 대조선인식에 보면 조선이 일본의 앞에서 거론되는 것은 참을수 없는 일이였다. 이런 고약한 심보로부터 일제는 ≪코리아≫의 첫문자를 ≪K≫로 바꾸어 놓기 위한 비렬한 날조책동에 달라 붙게 되었던 것이다.
△ ≪코리아≫의 표기를 외곡날조하기 시작한 일제의 책동
19세기 말 일제의 ≪코리아≫표기날조책동은 허황한 억지와 궤변들로 안받침되고 친일적인 서양인들을 내세우는 교활하고 음흉한 방법으로 감행되였다.
- 일제는 우선 ≪코리아≫ 의 첫문자를 ≪K≫ 로 바꾸어 써야 할 ≪학술적론거≫ 를 만들어 류포시키는 방법으로 ≪코리아≫ 표기날조책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가 만들어 내여 돌린 ≪학술적론거≫에 대하여 당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라에 의해 간행되던 잡지 ≪코리언 리포지터리≫ 1897년 12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Korea를 Corea로 쓰는 것은 아주 낡은 방법이다. C보다 K를 쓰는 것이 좋은 리유는 다음과 같다. 문자 C나 K는 조선어의 ㄱ 의 영어등가물로 간주된다. 이 문자를 조선사람들은 <기억(ki-ok) 이라고 발음하는데 문자 C를 쓴다고 하면 그 이름이 (시억(ci-oc))으로 옮겨 져 누구나 혼돈하게 될 것이다.≫ (≪The Korean Repository≫ vol 6. 459페지) 즉 지금까지 600여년간 우리 나라와 세계가 공인하여 온 ≪Corea≫라는 표기가 전자나 전사의 언어학적원리에 맞지 않는 낡은 표기이므로 그 첫문자를 ≪K≫로 바꿔써야 한다는 것이다.
- 일제는 다음으로 저들이 만들어 낸 ≪코리아≫표 기날조론거를 친일적인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을 내세워 류포시키고 합리화하도록 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꾸어 놓기 시작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코리아≫의 첫문자를 ≪K≫로 바꾸어 쓰는 것이 마치 영국이나 미국에게 제안되고 일반화된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친일적인 영국과 미국의 저술가들에게 저들의 ≪론거≫를 주입시키고 그들을 내세우는 음모적인 방법에 매달린 것이다.
당시 영국이나 미국의 조선관계도서의 저술가들은 대개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을 알게 되였고 또 조선에서 외교나 포교활동을 하는 경우라도 일제와의 밀접한 결탁밑에서 진행하였다. 그런 것만큼 영국인이나 미국인 저술가들에게 저들의 론거를 주입하고 추동하는데 일본은 큰 애로를 느끼지 않았다.
일제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국제적지위가 약해지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배제하는 기운이 높아가던 환경을 리용하여 영국이나 미국에서 ≪코리아≫표기를 외곡하도록 추동질하였다. 그들은 ≪코리아≫라는 말이 ≪고려≫의 일본식발음인 ≪코레이(korai)≫의 음역인데 프랑스식으로 쓰다나니 ≪Corea≫로 되어 버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에게 ≪Corea≫의 첫문자를 ≪K≫로 바꿔쓰는 것이 ≪구시대의 오유≫를 시정하는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도록 충동질하였다.
일제의 부당한 론거와 충동질에 의하여 일부 친일적인 서양의 저술가들은 일제의 ≪코리아≫표기날조책동에 공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1864년부터 일본에 와서 근무하였고 1880년부터는 요꼬하마령사 1884년부터는 조선에서 영국총령사까지 지낸바 있는 윌리암 죠지 아스톤이다. 아스톤은 친일적인 영국의 외교관리로서 일제의 조선침략과 반동학설에 정신적지지를 주었다. 아스톤의 저술을 보면 1876년 영국황실아시아협회의 잡지에 낸 론문을 제외하고는 1878년이후로 줄곧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19세기 말 ≪Korea≫의 쓰임이 맹아적단계였던 1880년대의 주요한 5개의 영문문헌자료들에가운데서 4건이 아스톤의 저작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그가 일본에서 활동한 1884년이전시기의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당시 일제의 ≪코리아≫표기날조책동에 아스톤이 얼마나 발벗고 나섰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Boos on Korea(1878년): Proposed arrangement of the Korean alphabet (1880년); Hideyoshi's Invasion of Korea (1881년); Manual of Korean Geographical And Other Proper Names Romanized (1883년))
△19세기 말 ≪Corea≫와 ≪Korea≫의 혼용실태
리론적궤변과 외국인들을 내세운 교활한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19세기 말 ≪코리아≫의 표기는 ≪C≫와 ≪K≫로 혼용되게 되었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 일본에서 그리고 미국인이나 영국인에 의해 출판간행된 조선관계의 도서들과 문헌자료들에서 ≪코리아≫의 첫문자가 ≪C≫ 와 ≪K≫로 쓰인 비률을 년대기별로 조사하여 보면 당시 ≪코리아≫표기의 바뀜상태를 잘 알수 있다.
1870년대까지는 아스톤 (1878)의 글을 비롯하여 극히 부분적으로 ≪Korea≫가 쓰이였을뿐 95%이상의 문헌자료들이 ≪Corea≫를 쓰고 있으나 1880년대에는 코웬(1880), 로스 (1880), 그리피스(1882), 스코트 (1887) 등에 의해 65%정도로 ≪Corea≫가 쓰이고 아스톤(1880,1881,1883), 언더우드(1889)등에 의해 35%정도로 ≪Korea≫가 혼용되여 있은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로스(1891)나 윌킨스(1897)등 극히 한정된 저술들에서나 ≪Corea≫가 쓰이고 헐버트(1892), 커즌(1894), 게일(1897. 1898). 비쇼프(1898), 아펜젤라(1895-1897)등에 의해 ≪코리아 ≫의 표기가 1880년대를 동요기로 하여 확고히 그리고 급격히 ≪Korea≫로 넘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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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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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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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1880 1890 1900 1910
그림 19세기 말 ≪코리아≫의 표기상태
5. 조선강점을 전후한 시기 ≪Corea≫를 ≪Korea≫로 완전히 날조한 일제의 범죄적책동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박사 공명성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간악한 침략리면사에는 리조정부의 국호영문표기인 ≪Corea≫를 ≪Korea≫로 날조한 교활한 음모도 숨겨져 있다.
19세기 말 음모적인 방법으로 ≪Corea≫를 ≪Korea≫로 날조하기 시작한 일제는 20세기 초에 들어 와서는 ≪Corea≫영문표기를 전면적으로 날조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1910년에는 조선합병을 계기로 ≪Corea≫를 ≪Korea≫로 완전히 날조하는 범죄적행위를 감행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강도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리조정부의 국권을 빼앗아 냈으나 대외적으로는 ≪보호적≫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위해 ≪Korea≫와 함께 ≪Corea≫를 혼용해 쓰면서 저들의 범죄적 기도를 은폐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가 통감부관보를 비롯한 문서들에서는 1905년부터 Korea를 쓰고 있으면서도 1909년 8월까지 리조정부와 체결한 조약문들과 각서들의 영문판들에서는 Corea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서 찾아 볼수 있다.
≪일본외교자료집성≫에 의하면 ≪한일합병조약≫전의 1909년 7월 26일 리조정부와 마지막으로 조인교환한 ≪중앙은행에 관한 각서≫의 영문판에서 일본외무성은 체면상 Corea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에 대한 합병준비과정을 통해 ≪Corea≫를 완전히 말살하였다.
일제는 1909년 10월 침략의 괴수 이또가 안중근렬사에 의해 처단된후 조선합병을 강행하면서 종래의 ≪Corea, Korea≫를 혼영하던 량면술책의 가면마저 벗어 버리고 ≪Corea≫를 완전히 말살하였다.
일제는 1910년 6월 3일 합병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합병후에 조선에서 ≪일본헌법≫을 실시하고 ≪천황≫에게 직속되는 ≪총독≫을 두어 조선에서의 모든 ≪정무≫를 통괄하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병합을 위한 준비는 이것으로 다 갖추어 진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제는 1910년 6월 3일 ≪합병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한 후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병합준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특히 여기서도 외교관계문제 등과 관련하여서는 특별히 시바따내각서기관장, 야스히로법제국장관, 구라찌 외무성정무국장이 이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조선을 합병한 후의 국호, 조선사람의 ≪국법상의 지위≫, ≪조선에 있어서의 사법상의 제사항≫등을 구체적으로 토의하여 내각에 제출하였다.
이때 내각수상 가쯔라와 통감 데라우찌, 외무상 고무라의 참가밑에 ≪병합준비위원회≫에서는 합병후의 국호에 대한 심각한 토의가 진행되였다. ≪준비위원회≫위원이였던 척식국 부총재 고또 신뻬이 등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가쯔라와 데라우찌의 주장에 의해 합병후의 명칭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1개 항목에 따르는 ≪병합시정안≫이 7월 8일의 내각회의에서 ≪병합실행세목≫으로 통과되였다. 일제는 이 결정을 취한 다음 즉시 조약문을 비롯한 모든 대외관계문서들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를 전부 ≪Korea≫로 표기하였다. 실례로 일제는 8월 29일 칙령 제 318호로 렬강들에 정식 통보하기에 앞서 이미 조약이 비준되기 하루 전날인 8월 21일 에 우리 나라 국호의 표기를 ≪Korea≫로 하여 합병의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조선의 국토를 강탈하는 ≪합병조약≫을 날조하면서 ≪Corea≫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였다.
그러면 왜 일제는 국호의 영문표기에서 종래의 ≪Corea≫ 대신에 ≪Korea≫로 완전히 바꾸게 되었으며 이것을 고집하였는가.
여기에는 조선이 일본에 종속된 나라라는 사실을 외래어표기에서까지 철저하게 관철하려는 간악한 흉심이 깔려 있었다.
종래 일본 외무성이 일방적으로 작성하였던 조약문들과 공문서영문판들의 우리 나라 국명표기에서는 명색이나마 조선정부가 존재한 실정에서 ≪Corea≫를 사용하
였다. 그러나 조선을 병합하는 시점에서 조약문의 영문판에서도 ≪Corea≫를 더이상 용인할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였다.
때문에 ≪일반외교자료집성≫에 의하면 일본정부에서는 ≪병합후의 시정방침≫이 결정되였던 1910년 6월 3일에 이미 병합후의 국호를 공공연히 사용하였으며 이미 조약선포전에 모든 영문판들에 ≪Korea≫로 표기해 놓았던것이다.
일제는 종래 영문표기의 ≪Corea≫로부터 ≪Japan≫ 다음의 ≪Korea≫로 바꾸어 씀으로써 영문자모순표기상으로도 조선의 일본에 종속되였다는것을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국제올림픽의 체모를 갖추고 진행되였던 1908년 제 4차 런던올림픽이후 나라별 입장순서를 영문자모순으로 하게 된 사실 등도 고려하여 리조정부의 국호영문표기를 영문자모순에서 ≪J≫다음의 ≪Korea≫로 표기하여 ≪Japan(일본)≫의 지위를 ≪부각≫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표기바꾸기놀음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종속적관계≫가 얼마나 더 뚜렷해 지고 또 일본의 세계적지위가 얼마나 더 높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한가지 사실만을 가지고도 일제의 침략성과 악랄성이 얼마나 집요하고 너절한가를 잘 알수 있다.
6. 일제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날조행위는 국가적대범죄행위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 학사 서정호
한 나라의 국호표기를 일방적으로 날조한 행위는 그 나라의 자주성을 무참히 유린하고 민족적존엄을 심히 모독하는 대범죄행위로 된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조선침략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 선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 대한 국호표기를 ≪Korea≫로 완전히 바꾸는 국가적범죄행위를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의 우리 나라에 대한 국호표기날조행위가 국가적범죄행위로 되는 것은 첫째로 이것이 리조봉건정부와의 사전협의없이 감행된 국가적인 문서위조행위이기 때문이다.
국가간의 조약문은 두 나라사이의 권리와 의무를 법적으로 규정한 공식문건으로서 조약체결 당사자들이 서로 완전히 합의를 본 기초우에서 그것을 내외에 공포하여야 한다는것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초보적인 국제법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조약문을 두 나라 말이 아닌 제3국의 말로 번역하여 공포할 때 합의일치를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번역하여 공포하는 행위는 국가적인 문서위조행위로서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국가적인 문서위조행위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 이전에 벌써 리조봉건정부와 강압적인 방법으로 체결한 조약문서들의 영문본을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공포하였다.
1908년 12월 15일 ≪조선통감부≫가 우리 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조약문들을 묶어 편찬한 ≪한국조약류찬≫에 제시된 영문판들은 리조봉건정부와 일본이 조약체결시 작성한것이 아니고 이 책이 출판되면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공개된것들이였다.
≪일본외교문서≫에 의하면 영문은 모두 일본외무성에서 일방적으로 번역하여 렬강들에게 보낸것들이며 여기에는 조약원문의 일부 표현들을 저들에게 유리하게 외곡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
후안무치한 일제의 문서위조행위는 ≪한일합병조약≫영문판작성때에도 여실히 드러 났다.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리완용을 비롯한 친일매국역적들과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합병조약을 정식 체결하기전에 이미 합병조약안과 유미렬강들에게 통지할 합병과 관련한 선언문을 영문으로 제멋대로 작성해 놓았다.
1910년 6월 3일 일제가 합병후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설치한 ≪병합준비위원회≫에서는 한국황실의 대우, 한국원로대신의 대우,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방침, 합병실현에 필요한 자금, 합병후의 국호 등 총 21개에 달하는 조항을 검토하였다.
위원회의 결정은 7월 7일에 완료되여 8일 내각회의에서 ≪병합실행방법세목≫으로 승인을 받았다.
이 ≪병합실행방법세목≫에 합병조약안, 선언문등이 들어 있었다. 이때 일제는 합병안과 선언문의 영문본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호를 ≪Korea≫로 써 놓았다.
1910년 이전에 일제가 날조한 ≪을사5조약≫ 과 ≪정미7조약≫영문본, 일제가 영국과 맺은 1902년 제 1차 영일동맹조약원문과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조약원문에는 조선이 ≪Corea≫로 표기되여 있다.
그리고 1885년 당시 일본 외무경이였던 이노우에와 청나라주재 일본공사, 천진주재 일본령사사이에 오고 간 8월 7일, 8월 18일, 8월 20일, 8월 24일 전신자료에 의하면 조선은 ≪Corea≫로 표기되여 있다.
이것은 일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 국호를 ≪Corea≫로도 표기하여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조선을 강점하기 위하여 미쳐 날뛰던 일제는 의도적으로 19세기 말부터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를 ≪Korea≫로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계기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조선강점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한 일제는 이때부터 ≪Korea≫표기를 전면적으로 사용하는 길에 들어 섰다.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고 획책하던 일제는 조선은 언제나 일본의 뒤에 있어야 한다는 흉악한 속심에서 지금까지 함께 써 오던 ≪Corea≫의 표기를 버리고 ≪Korea≫표기만을 쓰기로 ≪병합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영문판으로 된 합병조약안과 선언문을 1910년 8월 18일 리조봉건정부와 진행한 회담에 제출하지 않고 비밀에 붙이고 있다고 합병조약이 체결된지 일주일후
인 8월 29일에 일방적으로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렇듯 일제는 리조봉건정부를 무시하고 합병조약안의 영문본을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공포하는 국가문서위조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의 우리 나라 국호표기날조행위가 국가적범죄행위로 되는 것을 둘째로 여기에 일제의 고위정책작성자들이 개입하여 공모하였기 때문이다.
6월 3일 조직된 ≪병합준비위원회≫는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찌 데쯔기쯔 , 통감부 참사관이며 외무부장관인 고마쯔 미도리, 내각서기관장 시바다 가몬(의장의 역할을 수행함), 법제국장관 야스히로 한이찌로, 척식국 부총재(체상, 철도원총재 겸임) 고또 신뻬이 등 일본정부와 조선통감부의 고위인물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합병과 관련한 모든 실무문제들은 이 위원회에 참가한 자들에 의하여 처리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합병준비를 위한 한갖 실무그루빠에 지나지 않았다.
≪병합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문제라도 당시 일제의 총리대신 가쯔라, 외무대신 고무라, 조산통감 데라우찌 등 고위정책작성자들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내각에서 통과될수 없었다.
이렇듯 외곡날조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 ≪Korea≫는 바로 일제의 고위정책작성자들과 그의 하수인들이 개입하여 조작한것이였다.
7. 유럽인들이 작성한 지도를 통해 본 우리 나라 국호표기의 력사적변천과정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 박사 리영환
유럽인들의 세계지도작성력사상 처음으로 우리 나라 지도를 포함시킨 네데를란드사람 빼뜨로 프란치오의 ≪세계지도≫(1594년에 간행)로부터 시작하여 1595년 뽀르뚜갈사람들인 아놀드 랑글렌과 헨리 랑글렌이 작성간행한 ≪동인디아지도≫, 1635년에 네데를란드사람인 윌리암 부라우가 작성간행한 ≪아시아지도≫, 1655년에 윌리암 부라우의 아들 얀 블라우가 작성간행한 ≪일본지도≫, 1720년대에 도이췰란드 사람인 요한 호만이 작성간행한 ≪세계지도≫, 1734년에 프랑스사람인 요한 단빌이 작성간행한 ≪달단지도≫, 1748년에 프랑스사람인 파르 벨린이 작성간행한 ≪중국제국지도≫, 1778년과 1779년에 프랑스사람인 보문이 작성간행한 ≪중국, 조선, 일본지도≫ 와 ≪중국지도≫, 1806년에 도이췰란드의 와이마르지리학연구소에서 간행한 ≪아시아지도≫, 1840년에 프랑스 사람인 모린이 작성간행한 ≪중국, 일본지도≫, 1894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도서 ≪은둔국조선≫에 부록으로 첨부된 조선지도를 비롯하여 16세기초 유럽나라들에서 세계지도작성간행이 진행되기 시작한 후 19세기 말까지 간행된 20여가지의 조선지도가 포함된 세계 및 아이사지도중 거의 모든 지도들에서 우리 나라 국호를 ≪Corea≫로 표기하였다.
1943년에 일본의 지도학자 마쯔모또 겡이찌가 편찬한 ≪유럽고판일본지도집≫에 소개된 19개의 조선지도중에서 우리 나라 국호의 외래어 표기 첫글자를 ≪K≫로 표기한 것은 다만 1734년에 로씨야사람인 요한 끼릴로브가 작성간행한 ≪로씨야지도≫와 1840년 필리프 프란츠 폰 시볼트가 작성간행한 ≪일본지도≫뿐이다. 여기에서 로씨야 사람이 작성한 ≪로씨야 지도≫에서 우리 나라 국호의 첫글자를 ≪K≫로 표기한 것은 로어자모에서 ≪․≫음을 나타내는 것이 ≪K≫밖에 없는 것과 관련되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지도학자들속에서는 우리 나라 국호표기를 ≪Corea≫로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였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하여 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유럽인들이 작성한 세계지도에서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대부분 ≪Korea≫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가 이 시기에 조선에 대한 침략을 로골화하면서 대외적인 출판선전물들에서 공공연히 Korea를 사용함으로써 Corea를 말살하기 위해 음모적으로 책동하였던 사실과 떼어놓고 생각할수 없다.
8. 백과사전자료를 통하여 본 Corea의 Korea에로의 교체과정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학사 강정순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의 국호는 ≪고려≫라는 이름과 더불어 그 표기초기부터 Corea이였으나 일제의 악랄하고 교활한 책동에 의하여 Korea로 교체되였다.
Corea로부터 Korea에로의 교체과정과 그 원인을 많은 력사문헌들과 사료들을 통하여 알수 있지만 백과사전자료들, 특히는 영문판백과사전자료들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백과사전을 통하여 본 Corea의 Korea에로의 교체과정은 다음의 3개단계로 특징지울수 있다.
첫째로, 1882년까지의 백과사전들에서는 Corea만이 올림말로 올라 있고 Korea는 없다는 것이다.
1875년판 ≪영국백과사전≫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2권 올림말 ≪ASIA≫(아시아)에 대한 주석에서는 우리 나라를 Corea 로 표기하였으며 지도도 첨부되여 있는바 우리 나라 위치에 Corea로 표시하였다.
1876년판 영국백과사전 5권 올림말 ≪CHINA≫(중국)에 대한 력사서술에서는 ≪중국왕조가 조선(Corea)에 대한 원정을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77년 영국백과사전 6권에는 올림말 ≪Corea≫를 주고 우리 나라의 지도 ≪Sketch Map of Corea≫와 함께 다음의 주석을 주었다.
≪Corea, 동아시아에 있는 하나의 왕국, 중국의 북쪽에서 남쪽을 뻗은 반도땅, 북쪽은 만주의 대평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일본해, 남쪽은 조선 (Corea) 해협, 서쪽은 황해와 접경하고 있으며 북위 34°~42°25′, 동경 124°35′~130°50′사이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여 있다.
1880년판 영국백과사전 13권 올림말 ≪JAPAN≫(일본)에 대한 주석에서 일본의 위치를 서술하면서 우리 나라를 Corea로 표기하였으며 다음의 일본력서술을 주었다. (568페지, 지도첨부 Corea로 표기)
569페지 ≪3세기에 녀왕 진고는 Corea에 대한 원정에서 돌아와서 Corea의 체계를 모방하여 왕국을 5개의 집성과 7개의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584페지 ≪Corea 전쟁≫이라는 소제목아래에 ≪1875년말 Corea와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측량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 일본포함이 바다가요새로부터 포사격을 받게 되었다. Corea정부는 입항을 승인 한지 않았다. 일본포함은 함포사격 아래 군대를 상륙시켰으며 요새를 점령하고 Corea 군의 무기를 빼앗았다. 외교교섭이 이때부터 일본공무원들과 상인들이 개항한 Corea에 거주하였다.≫고 씌여 져 있다.
1882년 영문판백과사전 14권에는 [K-]항목에 우리 나라를 나타내는 ≪Korea≫가 올림말로 올라 있지 않다.
1882년판 ≪영국백과사전≫ 18권 올림말 ≪PACIFIC OCEAN≫(태평양)에 대한 주석에는 ≪조선(Corea) 해협≫이라는 단어와 ≪황해는 중국해안으로 흐르며 Corea반도에 의하여 일본해와 구별된다.≫라고 쓴 기록이 있다.
이상의 자료들은 1875~1882년판본의 백과사전자료들로서 이 시기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의 국호는 Corea로 공인되여 널리 쓰이였지 Korea로 씌여진적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Corea의 Korea에로의 교체과정의 특성은 둘째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Corea와 Korea가 혼용되였으며 특히 1890년대 후반기부터는 Korea가 Corea 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는 경향성을 띠였다는 것이다.
1902년판 ≪영국백과사전≫(The Encyclopaedia Britannica) 27권 올림말 ≪Corea≫에서는 ≪Korea를 보라≫고 주석을 주었으며 ≪Korea≫에서 조선에 대한 내용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전판본 영국백과사전에서 ≪Korea≫는 없이 ≪Corea≫에서 주석을 주었
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백과사전자료로서는 이때부터 Corea가 Korea로 바뀌여 정식 올림말로 오르게 되었다.
1902년 영문백과사전 25권 올림말 ≪ASIA≫(아시아)에 대한 주석에서는 우리 나라를 Korea라고 표기하였으며 지도에도 우리 나라의 위치에 Korea 라고 표시하였다.
이것은 1875년판 백과사전자료와 내용전개는 꼭 같으면서 단지 우리 나라의 국호만을 Corea로부터 Korea로 바꾼자료이다.
1902년 영문백과사전 29권 올림말 ≪JAPAN≫(일본)에 대한 주석에는 ≪조선을 평정하기 위하여 조선에 일본인 거주민들을 1889년에 5,589명으로부터 1898년에 15,309명으로 늘이였다.≫고 쓰면서 Korea를 인용하였다.
≪새 표준백과사전≫(The New Standard Encycloprdia)(전 12권 뉴욕출판)1906년판 3권 올림말 ≪Corea≫에서 ≪Korea를 보라≫고 했으며 6권 올림말 ≪Korea≫에서 우리 나라를 서술하였다.
≪넬슨의 백과사전≫(Nelson's Encyclopaedia)(전 10권 런던, 뉴욕, 도꾜-오사까 출판) 1907년판 3권 올림말 ≪Corea≫에도 ≪Korea를 보라≫고 하고 6권 올림말 ≪Korea≫에서 ≪Chosen 혹은 DAIHAN≫이라고 하면서 다음의 주석을 주었다.
≪Korea, 일본에 속해 있는 반도민족, … 1904년 로일전쟁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자적인 강점을 완전히 인정받았다.≫
≪영국백과사전≫1902년판 28권 올림말 ≪Exihibition≫(박람회)주석에용는 1893년 미국-시카고국제박람회에 참가한 성원국들을 영문자순서대로 라렬하면서 우리 나라를 일본뒤에 Korea로 표기하였으며 1900년 프랑스 - 빠리 국제박람회때에는 Corea로 표기하였다.
이상의 자료들은 1902년부터 1910년이전시기에 Corea와 Korea가 혼용되였으며 Korea가 더 우세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과사전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군사 등 해당사회와 인간활동에서 광범히 쓰이는 올림말들을 폭 넓고 체계적으로 싣고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한 큰 사전
이다.
이러한 백과사전들에서 1902년판본부터 올림말 ≪Corea≫에 주석을 주지 않고 Korea를 보라고 하면서 Korea에서 주석을 달아 주었다는것은 이 시기에 와서 Corea 보다 Korea를 더 광범히 썼으며 Korea를 기본으로, Corea는 Korea를 위한 참고로 리용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우의 자료들을 이 시기까지도 Corea가 여전히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로서 무시할수 없는것으로 인정되여 쓰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Corea의 Korea에로의 교체과정의 특성은 셋째로, 1910년대부터는 우리 나라의 국호를 완전히 Korea로 썼다는 것이다.
≪미국백과사전≫(The Encyclopedia Americana) 1918년판 7권 올림말 ≪Corea≫주석에서 ≪Korea를 보라≫고 하고 ≪Korea≫에 우리 나라에 대한 주석을 주었는바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제국의 완전한 속국≫이라고 썼다.
이와 같은 기록은 ≪새 백과사전≫(The New Encyclopaedia)(영국런던출판) 1920년판에도 있다.
≪영국백과사전≫ 1926년판 7~8권에서는 [C-]항목에 Corea를 올림말로조차 올리지 않았으며 15-16권에 가서야 ≪Korea 1≫항목을 주고 우리 나라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더욱이 간과할수 없는것은 1900년 프랑스 - 빠리 국제박람회에 참가한 성원국들을 렬거하면서 1902년판 백과사전에서 Corea로 표기하였던것까지도 꼭 같은 내용의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1926년판본에서는 C를 K로 바꾸어 Korea 로 표기하였다는 사실이다.
우의 자료들은 일제의 조선강점이 완전히 ≪합법화≫된 1910년부터는 세계적판도에서 Korea가 전면적으로 쓰이였으며 그 이전에 Corea로 씌였던 사전자료들까지도 다 Korea로 전면 날조, 교체되였다는것을 실증해준다.
9. 우리 나라 국호표기 ≪Corea≫에 대한 력사어원론적고찰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실장 박사, 부교수 권종성
우리 나라 국호인 ≪Corea≫가 력사어원론적인 대상으로 된다는 것은 국호표기의 첫 글자가 ≪C≫로 표기되여 근 700년동안 지속되여 써 내려 온데서도 알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문헌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최초에 나타난 것은 1255년 프랑스 선교사 루브류끄의 보고서에서이다. 여기서는 우리 나라를 ≪까울리≫라고 불러 첫 글자를 ≪C≫자로 썼다. 그후 나라별, 시기별, 어종별에 관계없이 오래동안 계속 첫 글자는 ≪C≫로 쓰이여 왔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력사-어원론적으로 옳은 표기로 되는 것은 첫째로, 일반적으로 국호표기가 전자법이나 전사법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우선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전자법에 의한 표기가 아니다.
전자법에 의한 국호표기가 이루어 지려면 다음의 2가지 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 그 하나는 자기 나라 글자가 있어야 하며 다른 하나는 맞추어 적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 국호가 표기되기 시작한것은 13세기 중엽경인데 그 때 당시 우리 나라에는 민족고유글자가 쓰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 나라 민족글자 ≪훈민정음≫은 1444년 1월 (음력으로는 1443년 12월)에 창제되였다. ≪훈민정음≫은 창제후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일정하게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우리 나라에서는 전자법에 대하여 론의된 것이 없었다. 특히 19세기 말엽까지 세계적으로도 전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방법이 널리 류포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 나라 국호를 라틴글자로 어떻게 적겠는가 하는 론의는 될수도 없었다.
우리 나라 국호의 표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라틴 글자로 쓰인 ≪Corea
≫였다. 이것은 철저히 력사어원론적으로만 해석될수 있은 문제로서 여기에 전자법을 끌어 들일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놈들은 맞지도 않은 전자법을 끌어 들이였다.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라에 의해 간행되던 월간 간행물인 ≪코리언 리코지터리≫ 1897년 12월호에서는 일본의 학자들속에서 제안된 주장을 쫓아 문자 ≪C≫ 나 ≪K≫ 는 모두 조선어의 ≪ㄱ≫ 의 영어식 등가물로 간주된다고 하면서 ≪C≫ 보다 ≪K≫ 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전사법에 의한 표기도 아니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라틴문자에 의한 표기이지 그 어떤 규범적인 성격을 띤 특수한 문자나 부호에 의한 표기가 아니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는 그 초기부터 나라별, 사람별로 서로 다르게 표기하였다. 즉 까울리, 꼬레(Coree), 까올리 (Caoli), 코레아 ( Corea), 꼬레스 (Cores), 콘라이(Conrai)로 표기하였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가 력사-어원론적으로 옳은 표기로 되는 것은 둘째로, 그것이 우리 나라 국호표기의 상징으로 되기 때문이다.
국호표기가 력사적으로 일단형성고착되면 그 표기를 계속대를 이어 전승하여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국호표기는 일단 형성고착되면 그것이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계속 쓰이여 내려 오면서 그 나라의 상징으로 된다. 바로 ≪Corea≫는 우리 나라 국호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우리 나라 국호의 표기가 력사어원론적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하여 응당 ≪C≫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것에 대하여서는 1917년 영국왕실 아시아협회 조선지부의 학보 (8권)에 낸 론문 ≪조선에서의 불교연구≫에서 비쇼프도 말하고 있다. 그는 ≪류행되고 있는 전사의 대부분의 움운체계에서는 아주 비과학적이며 C로 표기된 Corea 의 철자법은 어원론적이다. K로 발음되는 영어의 다른 잘알려 진 이름들도 보통 코린즈(Corinth), 콘스턴티노플(Constentinople)로 철자화된다는 사실을 나는 더 중시한다≫고 말하고 있다(1페지). 이것은 영국사람이 말한 으로서 비록 K로 발음되는것이라도 잘 알려 진 이름들이 어원론적인 철자인 경우는 이미 그것이 상징
적인것으로 되기때문에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 라틴문자표기에 의한 국호표기를 분석하여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캄보쟈(Cambodia),끼쁘로스(Cyprus), 카나다(Canada)등이 모두 ≪C≫로 쓰이고 있으며 이밖에도 발음이 ≪ㅋ≫ 나 ≪ㄲ≫ 로 시작되는 거의 모든 나라들의 국호표기가 다 ≪C≫로 되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여 오고 있다.
여러 나라 국호표기가 그대로 ≪C≫로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나라의 영문국호표기가 일제의 침략을 전후하여 ≪C≫로부터 ≪K≫로 바뀌여 졌다.
10. 조선강점후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를 Korea로 전면날조한 일제의 책동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연구사 학사 방정호
수세기를 거쳐 사용되여 오던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일제가 침략의 첫발을 내디딘 그날로부터 일본특유의 교활하고 음흉한 책동에 의하여 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강점과 함께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날조되였다.
첫째로, 조선강점후 일제는 의도적이며 공개적인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를 전면날조하였다.
일제의 의도적이며 공개적인 전면날조책동은 조선강점후 일제의 통감부와 총독부에서 발행한 관보를 통해 알수 있다.
일제가 발행한 관보에는
조선통감부시정년감(1907년~1909년)
조선총독부시정년감(1910년~1941년) 과 같은 년보들과
조선의 재정개혁(1906년)
조선에서의 새로운 진보(1910년)
조선정부년보(1924, 1927, 1931년) 등과 같은 도서들이 들어 있다.
일제는 이와 같은 관보들을 일문판과 함께 영문판으로 출판발행하였는데 그것들은 모두 당시의 우리 나라의 상황을 서술한 것들이다.
문제는 영문판으로 된 관보들에 우리 나라의 국호를 모두 Korea 로 날조표기하고 있다는데 있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6년 관보로부터 총독부관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보의 제목으로부터 맺는말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국호는 모두 Korea 로 날조표기되여 있다.
더우기 엄중한 것은 Korea 의 날조표기가 내용서술에서만이 아니라 사료의 인용문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통감부년감 1908년판에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정≫
1905년 11월 17일 ≪한일협약≫
1905년 7월 24일 ≪한일협정≫
1905년 4월 1일 ≪한국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
등의 조약문들을 인용하였는데 조약체결당시 원문에 Corea로 표기되였던 우리 나라의 국호가 모두 Korea로 날조표기되여 있다.
총독부년감 1923년판에서는 조선예술의 연혁을 서술하면서 이전의 Corai(고려)시대에 대한 인용도 Korai시대로 제멋대로 날조하였다. (11페지)
통계조사보고서나 지도들에서도 우리 나라의 국호는 모두 Korea로 날조되여 있으며 나라들의 이름표기에서도 조선의 국호는 Korea 로 되어 일본의 국호 Japan 다음에 놓고 있다. (1907년 통감부시정년감 136페지, 158페지)
우리 나라 국호의 날조된 표기는 년감에서만 아니라 ≪조선에서의 재정개혁≫(1906년판), ≪조선에서의 새로운 진보≫(1910년판) 과 같은 관보도서들에서도 꼭같이 나타난다.
총체적을으로 일제가 발행한 영문판관보들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호가 전면 날조되였다.
관보들에 우리 나라의 국호가 Korea 로 전면날조되게 된것은 국호말살을 노리고 감행된 일제의 의도적이고 공개적인 책동에 의한 것이다.
근거는 첫째로, 이 관보들이 당시 일제의 최고통치기관에서 편찬발행되였다는 것과 관련된다.
관보들의 곁표지에는 통감부나 총독부에서 편찬(≪COMPLITED by H.I.J.M's RESIDENCY GENERAL≫ , ≪COMPLITED by GOVERMENT-GENERAL OF CHOSEN≫)하였다고 씌여져 있다.
통감부나 총독부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일본정부를 대표하였으며 식민지통치의 모든 권력을 틀어 쥔 최고통치기구였다.
여기에서 진행된 모든 일들은 일본정부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한 것들이며 일본 정부가 직접 조직하고 지시하여 그들자신이 집행한것들이다.
그런것만큼 통감부, 총독부에서 직접 작성되고 발행된 관보들이 일본정부의 시책에 따른것이며 우리 나라 국호표기에 대한 날조는 바로 일제의 의도적인 책동이였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근거는 둘째로, 당시까지도 Corea표기가 일부 쓰이고 잇던 사정과 관련된다.
합병이전까지도 일제는 소위 ≪보호국 ≫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조약문들에서 Corea를 내적으로 써왔다. ≪한국조약류찬≫(통감부간행 1908년 12월)에 의하면 당시까지의 조약문들에서 Corea의 표기상황을 찾아 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문판관보들에서 우리 나라 국호를 Korea로 전면적으로 날조하였다는것은 공개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국호를 세계에 류포인식시키려고 한 일제의 의도적인 책동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이미전에 발표된 조약문건에서 Corea 로 표기된것까지도 모두 날조한것은 그 잔재까지도 깨끗이 없애버리기 위해 감행된 일제의 의도적인 국호말살책동인 것이다.
둘째로, 조선강점후 일제는 우리 나라의 국호를 전면적으로 날조하였다.
우리 나라 국호표기에 대한 일제의 전면적인 날조책동은 당시의 출판물들을 통하여 알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일제는 제놈들의 정부기관지인 관보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를 전부 날조하였다.
앞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총독부, 통감부에서 작성한 영문판 관보들에서 우리 나라 국호는 모두 Korea 로 전면날조되였다.
밖으로부터는 근대문명이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고 안에서는 민족지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봉쇄하였던 조건에서 당시 국제사회가 우리 나라 조선에 대하여 알수 있는 길은 오직 관보를 통한 하나의 창구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관보에 우리 나라의 국호를 날조하여 표기하였으니 이것은 결국 출판물전체에서의 날조행위로 도는 것이다.
다음으로 일제는 일반도서들에서도 국호를 전면날조하였다.
일제는 모든 외국문도서들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표기는 Korea 로 쓰도록 제정하고 그에 대한통제는 사법, 검찰, 경찰, 지어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우리 나라에서 나온 외국문도서들에서 조선의 국호는 모두 Korea 로 표기되고 있다.
지어 일제는 책에서 인용한 Corea 의 참고도서제목이나 사료까지도 모두 Korea로 날조하였다.
와다나베 가쯔모가 쓴 ≪조선개국외교사연구≫(경성. 1941년) 도 그러한 도서들중의 하나이다.
책에서는 우리 나라의 외교사와 관련하여 19세기 유미학자들이 조선에 대하여 서술한 도서들을 요지와 함께 인용하였는데 그러한 인용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가 모두 Korea 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년대, 출판사, 저자, 제목까지도 꼭 같은데 우리 나라의 Corea국호표기만은 Korea로 날조된 것이다.
날조되여 인용된 도서들중에는
그리피스가 쓴 ≪은둔국 조선≫(1882년판)
챨스 에덴이 쓴 ≪조선과 함께 본 중국력사서술≫(1897년판)
베쓰 홀이 쓴 ≪조선과 류꾸에 대한 홀의 항행≫(1819년판)
죤 맥로드가 쓴 ≪알쎄스트호의 항행≫(1818년판)
죤 로쓰가 쓴 ≪조선과 그의 력사≫(1880년판)등이 들어 있습니다.
이 도서들은 19세기 초, 중엽에 나온것들로서 우리 나라의 국호를 모두 Corea로 표기한 도서들이다.
많은 참고도서들을 인용하면서 Corea로 된 도서들만을 모두 Korea 로 바꾸었다는 사실은 일제가 도서들의 내용서술에서만이 아니라 참고도서의 정확한 인용에서까지도 Korea로 날조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고유한 국호표기를 전면적으로 없애버리려고 책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날조된 표기는 다른 도서들에서도 꼭 같이 볼수 있으며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날조된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책동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모든 도서들에서 조선의 국호에 대한 영문표기는 Korea로 전면날조되게 되었으며 Corea 는 흔적도 없이 력사의 갈피속에 묻히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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