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자상(穀字床)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이 혹 있을려나? 우리는 예의 바른 민족이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예의는 아름다운 것이다. 곡자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곡 "穀"자는 고려 때, 유명한 대 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의 함자이다. 함부로 존함을 안부르고 곡"穀"자라고 칭한 것이고, 상(床)이란 이곡선생의 보은에 감사하며 올리는 잔치상이라는 의미다.
고려는 제25대 충렬왕(1274-1308)부터 제 32대 충정왕(1348-1351)때까지 77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으며 갖은 억압과 시련을 겪으며 국권을 상실했다. 원나라 요구에 내시, 노비, 공녀를 받쳐야 했고, 제주도, 자비령이북, 철령이북은 원나라 통치권에 내줘 영토까지 배았겼다. 원나라는 일본원정에 고려군을 동정군 삼아 함선, 군량, 병기, 선원, 집기 등까지 고려에 부담시켰다. 내정간섭이 심해, 고려 국호를 없애고 원의 일개 성으로 개편하자는 친원파 주청이 있었으나, 익제 이제현선생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구국 일념으로 원에 맞선 분이 대 성리학자 가정 이곡선생이다. 고려에서 급제하였슴에도, 당시 사회 부패로 연줄이 없어, 부름을 못받고 어렵게 지내다가 원나라에 가서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가 돌아와도, 고려에서 관직자리를 안주었다. 익제 이제현선생의 추천으로 고려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양국을 오가며 우리민족을 위해 일했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 전쟁중에 1231ㅡ1257년까지, 26년동안 20만명이 끌려같고, 전쟁이 끝나고도 원나라의 지배을 받아, 고려 충렬왕(1275)ㅡ공민왕4년(1355) 80년 동안, 50차례나 원나라에 2000여명이나, “공녀”란 이름으로 끌려가 노리개감이 되었다.
그 뿐인가,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식들까지 계산하면, 수 없이 많다. 공녀로 선발되어 기자오의 딸 같이, 원의 황제 순제의 황후가 된일도 있으나, 원나라의 부녀자 부족으로, 황실의 궁녀로 조달되기도 하고, 군인의 처나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한사람이 더많다.
1년에 2차례 관청에서, 금혼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발동, 40ㅡ50명씩 선발하여, 소녀들을 붙잡아 조기 묶듯이 엮어서 끌고 갔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파기하면, 이웃 마을까지 화가 미쳐, 지위를 막론하고 가야 했다.
고려말 대학자 이곡선생은, 1335년(충숙왕4)에 공녀 폐지를 요청하는,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상소문을 원에 올렸다.
“여자들을 모아 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이쁜여자도 있고 미운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이 채워지면, 미인이라도 놓아주고 다른데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여자를 얻으려면 수십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기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두기도 하고, 이웃마을에 숨겨 놓기도 합니다. 그럼 친족들을 묶어 놓고 매질하여 주리를 트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읍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 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 짚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메어 죽는 사람이 있읍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있고, 대들보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
이런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곡선생의 상소문에 따르면, 고려여인의 수난은 계속 되다가, 1356(공민왕5)에 중단 된다.
가정 이곡선생은 고려와 원나라, 성리학의 종장으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도 그의 명성과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이렇듯 애절한 상소문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공녀문제를 해결한 이곡선생이 우리 고려로 돌아오자 부녀자를 비롯한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환영했는데 그 인파가 송도까지 이어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가정 이곡선생은 1351년 (충정왕3)에 54세를 일기로 타계했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구국활동은 훗날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영토 탈환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로 민간에서는, 이곡선생의 은혜로 처녀들이 공녀로 끌려가지 않고, 무사히 혼인하게된 은혜에 보답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초례를 치르기 전에 초례청 한 자리에 곡자상을 마련하여 보은제(報恩祭)를 드리는 행위가 민간풍속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 이어왔으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간계로 점차 사라졌다.
고려말 당시, 딸이 태어나면 공녀를 피하기 위해 남장시켜 키웠고, 어린 나이에 결혼시키고 아니면 승려가 되게 하였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처녀보고 가시내라고 부르는데 이는 가짜사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민며느리제가 성행하였다.
그런데, 더욱 가슴아픈 것은 공녀제도가 끝났는데도, 조선에 와서 아첨배들이 자진하여 명에 공녀를 받쳤다. 이는 조선 전기 태조에서 세종까지도, 7차례114명, 후기에도 2차례27명이, 공녀로 끌려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 때에도 명에 우리 처녀를 바치는데, 한 교자에 7명씩 태워 20리길이 이어졌다고 하니, 이런 민족의 수치가 어디있나? 근세에는 일본군 성노리개로 공출까지 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660년 전에 공녀제도를 폐지케 하여, 그 은혜를 곡자상으로 기리던 우리 민속을 일본놈들이 숭고한 우리얼을 말살시키고, 또한 정신대 징발에 걸림돌이 되자, 이를 미신으로 몰아 사라지게 하였다. 아직도 곡자상을 미신으로 여기고, 그 흔한 기념비하나 만들어 그 뜻을 기리지 못하는 우리도 밉다.
가정 이곡선생은 자신의 영달이 아닌 우리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고려에 불리한 요구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하여 우리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학문에서 외교에서 우리민족의 큰 별이다. 그럼에도 이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신에 조선사회에서 본받지 말아야 간신배 자기의 영달을 위해 권력에 기생하던 이들을 식민사관 바이러스에 감염된 국사업자들이 위인으로 설정하여 교육하는 작태에 분통이 터진다. 민족의 숭고한 얼을 이어 가지 못하는 현 국사교육은 당장이라도 폐기되어야 한다.
끝으로 첨언하면, 이곡선생은 국문학사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으니, 우리 소설의 효시인 죽부인전 그리고 현 고등학교 교제에 실린 차마설 등 명작이 있다. 이끌어 준이는 익제 이제현 선생이며 아들은 고려말 대유학자 목은 이색선생이고 제자로는 문익점 선생이다. 청출어람 부전자전이란 말이 이곡 선생에게 딱 맞는다.
이제라도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데 앞장서야 하겠다.
<첨부> 가정공(稼亭公)이 40세 되는 해인 1337년(충숙왕 복위 6) 여름에는, 본국에서 성균관제주 예문관제학 지제교 (成均館提? 藝文館提學 知制敎)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임이 인정된다.
이후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많은 활약을 하시다가 49세 때인 1346년(충목왕 2)에는 밀직부사(密直副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진현관대제학( 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재상직에 올랐다.
51세인 1348년에는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光政大夫 都僉議 贊成事 右文館大提學 春秋館事 上護郡; 정2품) 벼슬에 오르시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인 1351년(충정왕3) 54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공께선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의 대종으로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선생과 함께 더불어 麗末 성리학 정착에 공헌한 바 큽니다. 백이정(白以正), 우탁(禹倬), 아들인 목은 이색과 함께 경학(敬學)의 대가로 꼽히며 제자로는 문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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