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가 아직도 "씨없는 수박 만든 사람" 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씨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 라는 일본 육종학자의 작품이다. 우장춘박사로 알려진 이유는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한국인에게 육종학의 중요성과 그 사례를 알리기 위해 씨없는 수박을 연구소에 재배하여 널리 알지게 되었다.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6.25전쟁으로 폐허된 우리나라에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했다.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자녀 2남중 장남이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무지막지한 이지메 공격에 시달린다. 그는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 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춘의 어머니도 훌륭했다.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데려와 명문 동경제국대학 부설 농학실과에 보내게 된다. 동생은 동경대 법대에 진학하였다.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 농학실과을 졸업한 장춘,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1937년 어느날 일본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다. 장춘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일본인이 되어서 일본 이름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하려고 일본인의 양자가 돼,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근데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던 우장춘은 여생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간직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장춘에겐 운명이 정해준 사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은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 이라며, 영입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은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공석으로 둔 상태였다.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열성이었다. 당시 1백만엔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탈탈 털어,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종자만 약 5,000가마를 사서 들여 왔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1950년) 한국 전쟁이 한참이었던,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다. 당시, 군 면제시켜 주려고 했는데, 우장춘은 거부하고 입대를 했다.
공석으로 남겨뒀던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우장춘. 전쟁으로 쑥대밭된 나라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연구소는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잠 잘 곳도, 씻을 곳도, 수돗물 나오는 곳도, 전기 들어오는 곳도 없었다. 심지어 입을 옷도 없어서 우장춘 소장은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 끌고 나갔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10 여년 동안, 우장춘은 대한민국을 기어코 구원하고야 마는데,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개발 등)
이로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 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우장춘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바로 제주 감귤이었다.
이 엄청난 작물의 종자와 재배 기술을 창작해 내고, 우장춘은 이걸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생산지를 구축, 제주 감귤 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이뿐이 아니다. 강원도 감자가 특정 바이러스에 너무 취약해 한번 창궐하면 전멸 했다. 그때마다 강원도민들의 상당수는 굶어죽는 거였고, 이걸 종자를 변형시켜 면역을 가진 강력한 작물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수 있도록 개발해서 원예 산업을 일으켜 세워, 일본에서도 깜짝 놀랐던 엄청난 업적이다.
우장춘 박사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해 준게 아니라 먹는 걸로 경제와 산업을 창출하는 기반까지 닦아 준 그 당시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천사였던 것이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우 박사는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는데, 우장춘 박사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위해 온몸을 불살은 영웅이었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그 때 한참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링거병과 같이 걸어 놓고 관찰할 정도였다.
근데,일부에서는 우장춘이 우리말을 못한다고 우습게 여겼다. 일본말만 잘하는 우장춘을 밉게 보았다. 우장춘 박사는 읽기, 쓰기, 듣기 다 잘 하는데 말하기만 서툴었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줬다. 아예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일 줄 알면서 무슨 애국을 하겠냐며 망신을 준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작고하셨을 때도, 딸이 결혼을 했을 때도,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출국 금지시켰다. 그래서 몇 년 후에 다녀 왔다.
어머니의 죽음, 딸의 결혼도 함께 하지 못한 우장춘. 아들로서 아비로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었겠지만, 그러나 우장춘은끝까지 조선인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쳤다. 어머니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으로 어머니를 생각하며 당시 우물이 귀하던 시절
"慈乳泉"이라는 우물을 파서 동네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그는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1950년 3월 귀국, 1959년 8월 10일 사망할 때까지 부산에 있었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장 등을
맡아 뒤처진 한국 농업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더 우수한 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포상받은 우장춘,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조국이 날 인정했구만... 근데 좀 일찍 좀 주지..." 한국의 모든 전후 세대는 이 위대한 인물에게 큰 빚을 졌다.
우리들은 우장춘의 업적을 기록에 남기는 것조차 소홀했다. 허명에 현혹되어 참된 예술이 뭔지도 모르고, 언론에 기생하는
나부랭이들의 선동에 따라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어리석은 짓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의 삶은 예술 그 자체이다. 예술의 정의가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도 민족의 영웅이자 민족을 사랑했던 과학자, 삶 그 자체가 진정한 예술인 우장춘을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진정한 예술을 펼치고 간 위대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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