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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하여

by 安喩齋 2010. 12. 27.

훈민정음해례본에서 中國에 대한 논의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박물관 소장)에 대하여 전문가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본인은 이 해례본을 보고 느끼는 점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언해본이 1459년 (세조5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권두(卷頭)에 실려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된 월인석보본에 있어 그 내용에 대하여는 왈가왈부할 수 없으나, 한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달라 진다. 우선 먼저, "國之語音異乎 中國與文子 不相流通"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나·랏:말싸·미 中ㅇ國·귁·에 달·아 文문字·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하다· (고문자 입력이 안되 이처럼 표기)


 처럼 해례본에 기재되었다. 그래서 천편일률로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할 수 없어"라고 배웠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여기서 '中國'을 고유명사 china가 아니라, "나라 안에서" 라고 번역하여야 옳다고 한다. 그 이유로 中國이란 국가명(고유명사)은 1910년 12월 孫文이 신해혁명시 처음 사용한 中華民國에서 고유명사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본인의 소견으로, 나라 말이 달라도 자기 나라 문자로 완벽하지 않지만 표기할 수 있다. 전 세계 글자가 이에 해당한다. 1972년에 발견된 東國正韻에 은 황제가 계신 곳이라고  기재돼 있어 이 지명china라고 한다. 


본인은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子不相流通"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 가에 고심하였다. 동국정운에서 중국을 황제가 계신 곳이라 했으니, 地名을 지칭하는 中國이 맞는 것인 가? 아니라고 본다. 고려에서 표기할 때 '中華'라 하였고 조선에서도 '中華'라 하였다. 세종대왕 때라면 '中華'라고 표기하여야 한다. 


실록을 비롯한 역사서를 보면, ㅇㅇㅇ中國ㅇㅇㅇㅇ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를 번역하면서 무조건 地名인 中國으로 번역하여 놓았다. "나라 안"에서라고 해야 사리에 맞는 것도 '중국'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한자에는 뜻을 나타내는 훈이 있는데, 같은 글자라도 이 훈이 다르고 읽기도 달리 한다. 그리고  띠 어 쓰기를 하지 않아 혼동을 준다. 물론 훈민정음도 띠어 쓰기를 안한다.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을 우리 글로 하면 "나라 말이 나라 안에서도 다르게 불러지니, 문자(한자)로 서로 통할 수 없다."라고 번역된다. 훈민정음이 뜻 글자(한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취지와 일치하고, 논리적으로도 맞는다. 

 

앞의 두 책 발견에도 의문점이 있다. 1940년 안동 김대중이라는 집에서 발견되었다. 그동안 600년간 발견되지 않고, 조선어학회가 한글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시기에 발견되었다는 것도 의문이고, 조선시대 서울(한양)서 먼 안동에서 발견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의문스러운 것은 東國正韻이 강원도 강릉에서 1972에서야 발견되었다. 누군가 이들 한적을 위작으로 만들어 고가에 팔려고 한 짓은 아닌지? 이러한 의문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훈민정음해례본' 자체에 대한 위서 여부 


1. 우선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奏"자가 당시에는 "耳"로 쓰였다는 것이다. 물론 <<월인석보>>에도       "耳"로 쓰여있다.

 

2. 발문을 정인지가 썼는데, 당시의 정인지의 직책이 부제학이었는데 대제학으로 되었다.

 

3. 첫 두 장이 뒤에 이어지는 용지와 다르다. 


4. 당시의 책 제본은 7침 (바늘로 꿰매 엮은 자리)인데 5침으로 되어있다. 


이와같은 의문점에 대하여, 간송측의 답변은 "奏"자와 "耳"자가 함께 쓰였기에 착각이라고 하고, 정인지의 직책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왜 용지에 차이가 나느냐는 지적에는 황당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구입시, 첫 두 장이 없어서 새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색과 글씨체가 같은 이유를 묻자, 비슷하게 하려고 종이를 소 여물 쑤는데 넣어 물들었다고 했다. 글씨체는 당시 글씨 잘 쓰는 이를 구해 그대로 모방하여 쓰게하였다고 했다. 5침으로 된 것은 책 테두리 부분이 헤져서 잘라 내고 다시 제본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전혀 설득력이 없다.   

 

5. 그 뿐만 아니라, 책 중간 부분의 책장에서, 뒷면(한적은 큰 용지 한장에 두 면을 찍어 가운데를 접어서       한장으로 만듦)에 글씨가 씌여진 것이 나타나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하니, 종이가 귀하여 이면지로 사용     하였다고 주장한다. 의문이 연달라 이어질 때마다 해명이 그 때 나온다. 의문을 제기하기에 앞서 손 보       았으면 솔직히 말하면 될텐데 말이다. 뒷장에 쓰여진 내용은 책을 뜯어서 확인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으     나, 최근에 내시경을 책장에 넣어 3D촬영하여 펼쳐 보니, 17세기에 유행하던 군담 소설(18략)이다. 

   17세기 이후에 이 해례본이 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 주장을 그대로 믿으면, 제본된 책을 풀어서 중간 부분의 속지 한장만 달랑 빼내어 이면지로 사용하였다가, 그 한장의 이면지를 다시 뒤집어 원래 있던 책 페이지를 찾아서 원위치 시켜, 다시 제본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걸 믿을 사람은 그들 말고 없다.


6. 지질이 당시 훈민정음이 발표되던 시기의 것이 아니라 한참 후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7. 본인이 처음 주장하고, 또한 위작이라고 보는 것은 이렇다.


1. 조선에서 책명을 만들 때, 어떤 책이라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겉 표지에 '훈민정음'으로 되어있고, 속지 첫면에도  "音"으로 되어있다. 설명부분에서 '훈민정음해례'라고 나온다. 책명이 '훈민정음 해례' 내지 '훈민정음언해'라고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훈민정음해례'라는 책명은 언제 누가 붙였는지 의문 투성이다.   




2. 세종대왕은 금속활자를 이미 개발하여 1447년 석보상절에서 훈민정음언해를 금속활자로 찍었는데, 어찌하여 그 후에 나온 동국정운은 이 판본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어 별도로 목판을 새로 만들어 찍었는가? 세종대왕은 절대로 이미 있는 판본(금속활자)을 사용하였으면 사용하였지, 별도로 목판을 판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고활자 전문가인 손보기씨는 널리 보급하기 위해 목판을 만들어 찍었다고 하는데, 세종대왕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처사이다.

3. 책을 제본할 때, 접지 부분을 표시하는 어미(물고기 꼬리 모양) 문양 속에 책명을 써 놓아 판본을 구분한다. 책 제명이 '훈민정음'이라 되어 있는데, 어미 속에는 '정음'으로 되어있다. 
 
         X

︻          

訓          

民          

正    ⇒       책명이 훈민정음이니, '훈민정음'이라야 맞는데, 엉둥하게 '정음'으로 되어있다.

                  

︼            

     

이러한 의문점들로 보아 간송 소장의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에 대한 위서여부를 납득할 수 있는 검증절차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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