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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우장춘과 백남준 누가 예술가인가?

by 安喩齋 2010. 12. 24.

우장춘과 백남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들은 같은 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천지차이를 보였다. 그럼 그 차이를 살펴보며 예술의 정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그들의 삶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서로 아주 다른면이 시작된다. 우장춘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으로 도망하였고, 백남준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건너 갔으니, 눈치 빠른 이는 이쯤에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선, 우장춘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우장춘의 아버지는 우리 민족에게는 대역적이다. 명성황후 살해에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 참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경호를 관할하는 별기군 2대대장을 맡고 있으면서 시해에 가담하였다. 그러니 일본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이다. 일본에서 살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러니 우장춘 어머니는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을 기를 수 없어, 큰 아들인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 두었다가 형편이 나아져 5세때 데려다가 학교에 보내, 드디어 토쿄(동경)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하게되었다. 그동안 어린 우장춘이 겪은 시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백남준은 일제시 서울에서 태창방직이라는 사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수송초등학교와 경기중학을 다닐 때는 피아노를 배웠고, 해방이 되자 가족이 일본으로 가, 거기서 토쿄(동경)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였다. 부인이 일본인이다. 

 

이처럼,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은 극과극이다. 두 살 때 고아원에 맏겨진 우장춘과 일제하에서 남들은 피아노 구경도 못할 시기에 피아노 레슨은 받으며 호강을 한 백남준의 어린 생활이다.

 

우장춘은 토쿄대 졸업후 육종학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세계적 육종학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우장춘은 당시 한국의 식량난을 덜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육종학 기술로 한국 농업에 기여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한다. 한국에서 농산물 종자개량으로 식량난 해결에 많은 기여를 하다가 12지장궤양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페추니아(완두콩)를 겹꽃으로 피게하는 관상용으로 개발하여, 전 세계 육종학자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이에 비해 백남준은 토교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가서 거기서 미학을 전공하였다. 백남준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피아니스트 백남준이 피아노 연주하러 나와서 엄청 값 나가는 "스테인웨이 앤 손"이라는 고급 피아노를 사정없이 도끼로 내려쳤다. 그러므로 서양의 친구인 유명 비평가로부터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백남준은 천재 예술가다" 라는 찬사를 받고부터 행위 예술가로 전환한다. 그 당시 무렵 내 기억으로 '70년대 중반, 세종문화회관이 새로 건축되고 들여 온 "스테인웨이 앤 손" 피아노 가격이 5,0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한참 분양되던 잠실 아파트 한 채가 아니라 한 棟을 구입할 돈이다. 잠실 아파트가 150만원 미만에서 분양되었다.

 

그 후, 백남준은 서구에서 주로 활동하며 당시 고가이던 T.V. 브라운관(모니터)을 여러 대를 연결하며, 이상한 화면을 지그재그 등등으로 송출함으로서 일반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화상을 나타내는 행위 예술을 하였는데, 이 또한 그의 친구이자 평론가로부터 비디오아트의 천재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시 국내에는 비디오 자체가 생산조차 안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국내에 신화적 존재로 나타나 세계적 예술가로 등장하였다. 신문이고 T.V.고 잡지고 간에 그의 비디오 아트라는 생소한 작품에 정신이 나간 듯 찬사 일색이었다. 비디오 아트가 뭔지 모를 때 백남준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럼, 다른 이들은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일본에서 그리던 조국을 찾아 돌아 왔는데, 백남준 아버지는 왜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을 가?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형님되시는 독립운동사 전공 교수에게 백남준 아버지에 대하여 아는 바를 물으니 궁금증을 속시원히 해결하는 답을 얻었다. 뜻 밖의 소득이었다. 

 

이 두 사람의 행동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아니라 할지라도, 철이 나서 어떻게 행동하였나를 생각하며 또 언론에 기생하는 나부랭이들의 행위을 보며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늦은 감이 있으나, 부산에 우장춘박사 기념관이 그가 근무하였던 농업기술센터에 세워졌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평소 존경하던 분이 알려지지 않고 있음에 죄짖는 기분이었다. 

 

그 세세한 이야기는 이 한마디로 함축하고자 한다.

 

진정한 아름다운 예술은 그 사람의 삶 그 자체다.                       

 

우장춘 박사 이야기는 버전 엎 되오니, 계속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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