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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천리포 수목원과의 인연

by 安喩齋 2010. 1. 26.

천리포 수목원 故 민병갈님

 ⓒ2004 HelloDD.com
반드시 기업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스려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척박한 땅을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 그 못지 않게 가치 있는 일이다.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 원장이 바로 그런 분이다. 여지껏 보았던 어떤 수목원보다 아름답고 자연스런 곳이다. “진정 이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 맞습니까?”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 이곳이다.

충남 태안 긴해안 끝자락에는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가 이어져 있다. 이중 만리포 해변이 가장 유명하지만 천리포 또한 그 못지 않게 유명하다. 바로 천리포 수목원이 있기 때문이다. 천리포 수목원은 한국인으로 1979년에 귀화한 민병갈(미국 이름은 Carl Ferris Miller)씨가 1962년에 인근 토지를 매입한 후 나무를 심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평소 만리포 해변을 좋아했던 민병갈씨는 1962년 해변을 걷다가 그 지역에 사는 한 노인이 다가와 시집가는 딸의 혼수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며 땅을 사달라는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땅을 외국인에게 팔았다는 소문이 나자 그 지역의 다른 주민들도 자신의 땅도 사달라고 애걸하여 그걸 들어주다가 수목원을 조성하게된 동기다.

 

민병갈씨는 6.25 때  미 해군 장교로 한국에 온 후, 앞의 사정으로 이 곳에 나무를 심어 지금의 세계적 수목원으로 만들었다. 민병갈씨는 한국은행에서 영문 서신, 문서 및 서적을 교열을 하는 고문으로 근무하였으며,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미약하였을 때 주식에 투자하여 많은 부를 이루어 이 곳에 각국의 희귀종 나무를 심었다. 한국은행 퇴직 후에는 고려증권 고문으로 근무하였다. 그가 한국은행 근무시 본인은 ASIA ECONOMICS 라는 영문 경제학 학술지를 편집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때, 그 분을 직접 만나 영문교열 받은 적이있다.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민병도씨였는데, 그 분과의 친분으로 민씨에 병자 돌림이 되고 갈은 자신의 이름 중 Carl에서 유래하였다.  

 

민병갈씨는 본인과 여러 경로에서 인연이 닿는 분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작고하였는데, 부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자동차를 24년 동안 타고 다녔고, 그 후 대우 브로엄을 15년 동안 타고 타니면서 청빈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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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인증이다. 이 수목원에는 여러 수종이 많지만 그 중 마그놀리아(magnolia)라 불리우는 목련과 호랑가시가 대표 수종이다. 그는 진정으로 나무를 사랑한 사람이다. 무슨 대단한 목적을 갖고 이 일을 했다기 보다는 얼떨결에 땅을 사게 되었고 나무를 하나하나 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나무 사랑의 첫걸음은 바로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꽃이 언제 피는지, 열매는 어떤 모습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어디 아프거나 목이 마른 것은 아닌지 배려하는 마음은 그 다음 단계죠. 자연이 겪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자격이 없어요.” 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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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만평에 이르는 천리포 수목원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에 어려움은 겪고 있지만 함부로 사람을 받지 않는다. 나무를 지켜줄 뿐 나무의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위한다는 핑계로 몸통에 영양주사를 놓고, 해충을 없앤다고 살충제를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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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키우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씨앗을 얻으려면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씨앗이 싹을 틔우기까지는 또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나무는 오랫동안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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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여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놀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남은 시간을 평상시처럼 보내고 싶어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증권사에 정시 출근하여 일을 하고, 주말에는 수목원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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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목원처럼 나무를 예쁘게 키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잎을 다듬고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심을 수도 없다. 나무를 최대한 나무답게 놔두는 것, 자연을 자연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 덕분에 천리포 수목원은 정말 자연스럽다. 그는 장기적인 비전과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그저 일신상의 편안함과 단기성과를 노렸다면 절대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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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을 받은 후 1년 3개월 동안 그는 이런 투병 자세를 끝까지 지켰다. 임종 나흘 전까지 기저귀를 찬 몸으로 출근길에 올라 가정부 아주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자유를 꿈꾸었고 자유롭게 살다 갔다. “나를 묶지마” 그가 산소마스크와 링겔 줄로 감겨 있던 몸을 뜯어내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단기적인 즐거움보다는 몇 백 년 후를 생각해 나무를 키운 사람, 수목원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살기도 잘 살았지만 죽기도 잘 죽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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