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같은 학교 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고대 산수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김홍도의 진경산수' '다산 정약용의 예술 세계' '조선시대의 초상화' '1940년대 친일 미술' 등이 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그림으로 본 옛 서울」 등이 저서와 평론집 「우리 시대, 우리 미술」이 있다.
|차례|
머리말
풍속화의 시대 배경과 의의
17, 18세기 초 풍속화의 태동을 예고하는 기록화
18세기 전반 선비 화가들의 속화
민중에 대한 인식 변화와 사실적 창작 태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오명현(吳命顯), 윤용(尹熔) 등 풍속화의 확산
조선 후기 풍속화를 남긴 화가들
▲ 김홍도의 부전도
▲ 「북새선은도권」의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길주 관아의 중앙 대청에는 붉은 관복을 입은 시험관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의 앞마당에는 말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무과 시험 장면이, 왼쪽의 초당에는 문과 시험을 치르는 유생들 모습이 보인다. 한시각. 1664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57.7×16.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북새선은도권」의 함흥방방도(咸興防榜圖) 함흥 관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한시각. 1664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56.7×169.0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기사계첩(耆社契帖)」의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광화문 밖 기로소에서 가진 연회 장면이다. 차일 친 건물 안에 원로 중신들이 음식상을 앞에 놓고 두 동자의 춤을 구경하고 있으며 밖에는 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처용무가 진행되고 있다. 마당 아래 오른쪽으로 백발이 성성한 두 촌로가 처용무의 흥에 맞추어 몸짓을 하는 광경과 아래쪽 좌우에 가족들로 보이는 선비와 여인, 아이들이 배치되어 있다. 잘 정돈되고 딱딱하게 구성된 화면에서 그 권위의 균형을 깨고 있는 이런 표현 방식은 궁중 기록화의 새로운 전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진여, 장태홍 등 합작. 1720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43.9×67.6센티미터. 보물 제638, 639호.
▲ 「기사계첩」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부분 기마 행렬의 위에 구경나온 사람들을 그려넣었다. 이 행렬도는 딱딱한 수평식 횡렬 구성이면서도 세세 인물들의 표정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선비 차림의 남정네나 아낙네와 아이들이 말과 소와 나귀 등과 함께 삼삼오오 서 있는 모습은 현장감을 살리면서 풍속화적 맛을 돋우어 준다. 김진여, 장태홍 등 합작. 1720년 작. 비단에 수묵 채색. 43.9×67.6센티미터. 보물 제638, 639호.
▲ 평양감사향연도 궁중이나 양반 관료의 권위적 기록화에서 민간인 구경꾼이나 민중 삶이 보다 다양하고 폭넓게 그려지는 풍속화적 진면목은 풍속화가 유행하는 18세기 후반 이후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필자 미상의 '평양감사향연도'이다. 아래는 그 부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채색. 71.2×196.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평양감사 선유도(船遊圖) 위의 향연도와 같은 필치로 그린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대동강에서 벌어진 향연 장면인데 잔치를 위해 밤을 밝히는 장면과 성곽 위에 횃불을 들고 나온 평양 사람들의 도열 모습은 장관이다. 아래는 그 부분이다.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채색. 71.2×196.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 부분 조선 후기 궁중 기록화 가운데 풍속화적 해석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S자 형의 길을 따라 진행되는 정조의 행차 행렬도 그러하려니와 그 행차를 구경나온 각종 사람들의 세세 표정들이 생동감 넘친다. 필자 미상. 18세기 말. 비단 수묵 채색. 156.5×65센티미터.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리시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 옥(玉) -
모기는 일어나고 파리는 잠드니 날이 더울까 두렵고
푸르고 설익은 보리는 밥을 끓여 먹을 수가 없구나
이웃집 개는 짓고 외상 술빚은 급한데
고을관리마저 세금을 재촉하러 깊은 밤 문 앞에 이르렀구나
- 전가서사(田家書事) -
▲ 나물 캐는 두 여인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21.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목동오수도(牧童午睡圖) 윤두서의 '쟁기질과 목동'에서의 목동 모습과 유사하다. 김두량이 "윤두서를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두 그림의 비교를 통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두량.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31×51센티미터. 평양조선미술관 소장.
▲ 짚신 삼는 노인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2.4×21.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선거도(旋車圖) 윤두서. 18세기 초. 비단에 수묵. 25×2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낮잠(樹下午睡圖) 윤두서. 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31.8×24.8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쟁기질과 목동(耕畓牧牛圖) 윤두서. 18세기 초. 비단에 수묵. 25×21센티미터.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 돌 깨는 석공 강희언의 작품(18세기 중엽. 비단에 수묵. 22.8×15.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과 윤두서 작품(18세기 초. 모시에 수묵. 22.9×17.7센티미터. 개인 소장. 아래)은 동일한 주제에 거의 같은 수법으로 그려졌는데 윤두서의 작품에는 김광국의 발문이 붙어 있다.
▲ 「사제첩(麝臍帖)」 표지 조영석의 소묘를 모은 것으로 시인 이병연의 발문을 받아 놓은 화첩이다. 발문의 내용을 볼 때 "어진 제작의 거부로 왕의 노여움을 산 뒤 조영석의 그림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고 조영석 스스로 '사제첩'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이 화첩의 표지에는 '사향노루의 향기나는 그림'이라는 '사제(麝臍)'의 제목을 쓰고 '남들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범한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니라(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금기의 엄명을 덧붙여 놓았다. 이는 조영석의 당대 현실 풍속에 대한 높은 관심과 애정 또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관료 의식에서 나온 글귀이다. 특히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당부는 봉건 사회의 선비 관료가 서민층의 일상을 다룬 데 대한 사회적 제약을 염두에 둔 것이라 여겨진다.
▲ 바느질 조영석의 「사제첩」 가운데 바느질하는 그림이다. 어머니가 두 딸과 함께 바느질하는 장면으로 소묘풍이면서도 호분과 채색이 가해져 비교적 회화성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2.5×2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새참 조영석의 「사제첩」(아래)과 김홍도의 풍속화첩(위)에는 '새참'이라는 같은 주제 그림이 잇다. 조영석이 일렬 횡대식으로 배열한 데 비하여 김홍도는 원형 구도로 부감하여 포착한 점에 차이가 있다.
▲ 젖 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종이에 수묵. 28.5×44.5센티미터.
▲ 수공선거도(手工旋車圖) 부분 한여름 나뭇가지에 옷을 벗어 걸쳐 놓은 채 선반 작업에 열중해 있는 두 장인을 담은 그림이다. 옷의 회청색 음영이나 피부의 담홍색이 연녹색 잎의 나무와 어울려 있다.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 말과 마동 조영석. 「사제첩」 가운데. 종이에 수묵. 23×24.1센티미터.
▲ 작두질 조영석의 속화들은 가벼운 선묘와 담백한 설채가 날코기 같은 소묘품이면서도 민중 생활의 순박하고 우직스런 감정들을 유감없이 실어 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개성미와 예술적 탁월함이 돋보인다. 종이에 수묵. 23×24.1센티미터.
▲ 이 잡는 노승 조영석.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3.9×17.3센티미터. 개인 소장.
▲ 편자 박기 갈색 말을 가마니 위에 눕혀 놓고 요동치는 말의 움직임을 조절하며 앞발의 편자에 못을 박는 인물의 야무진 표정과 동세는 생동감이 넘친다. 조영석.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8.7×19.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편자 박기 조영석의 '말징 박기'와 동일한 주제의 그림으로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린 것이다. 멀리 밥그릇이 놓인 소반을 배치하고 근경에 바구니와 소용 도구를 놓았으며 위통을 벗어젖힌 인물이 사실감을 자아낸다.
▲ 노승과 사미승 어리숙하면서도 투박한 선맛이나 동세 묘사의 정확한 표정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영석. 18세기 초반. 종이에 수묵 담채. 27.9×22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영석 농경도의 부분
▲ 선유도 조심스런 필치의 이 그림은 조영석 38세 때 작품으로 그의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풍속도들의 표현 수법과 유사하여 편년 설정에 기준작이 된다. 조영석. 1723년 작. 종이에 수묵 담채. 29×42센티미터. 개인 소장.
▲ 장기도 조영석. 소묘. 개인 소장.
▲ 설중방우도 방안에 유복을 입은 주인과 갓을 쓰고 방한모를 걸친 손님을 그리고 문밖에는 소와 두 시동의 만남을 그린 것으로 다분히 풍속화적이다. 물론 주변 수목과 설산 풍경이 전통적 산수 인물화의 구성법을 지녔지만 각 인물들과 풍물의 정확한 묘사를 통해 풍속화적 작품으로 훌륭히 재해석해 놓앗다. 나무와 산경 처리에는 젊은 시절 화보를 통해 익힌 필묵법의 잔영이 드러나 잇으면서도 조영석의 개성미에 감추어져 있다. 조영석.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115×5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지게꾼(負甕圖) 이 그림의 세부를 살펴보면 정확한 묘사를 위해 유탄과 엷은 담홍색의 밑선으로 조심스레 수정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 얼굴 표정, 팔과 손, 무릎과 장딴지의 근육, 지게와 어깨띠의 무늬, 짙은 먹으로 균형을 잡은 모자와 짚신 등 실물 사생에 의한 설명적 의도가 짙다. 그리고 아래와 오른쪽 언덕의 나무와 잡풀은 담채와 먹의 선염 효과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이 형식은 조선 중기 산수화풍의 잔영으로 윤두서나 조영석의 산수인물화와도 통한다. 바로 이 점이 시대감을 짐작케 하는 표현 기법이다. 그러면서도 오명현의 배경 처리는 선배들의 화풍보다 아교 포수된 명주 바탕에 풀어 낸 먹의 번짐이 한층 싱그럽다. 오명현. 18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9.7×20.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점괘 보는 노승(占卦圖) 오명현. 18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8.3×28센티미터. 개인 소장.
▲ 점괘 보는 두 승려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린 그림이다. 이런 승려 풍속도는 18세기 후반 풍속화에 와서 흔히 다루어졌던 소재이기도 하다.
▲ 허리띠 매는 취객(老人倚松圖) 괴팍한 품성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은 이 작품은 엄정하고 절제된 행동을 미덕으로 생각했던 양반 사회의 관행을 깨는 주제이다. 오명현. 18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26.6×20센티미터. 개인 소장.
▲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 숲 속에서 사제간에 마주하여 공부하는 선비의 생활상을 옮긴 그림으로 이인상의 낙관 말고도 화원 화가 김득신의 도인이 찍혀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바위와 언덕의 마른 붓질 표현이나 인물 의습 처리의 각이 지고 꾸불꾸불한 선묘법에서 이인상의 독특한 필치와 조영석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송하수업도'는 선비 화가가 자기 일상을 담은 풍속화로 손색이 없는 소재이며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처리된 풍경이 그 두 인물의 자세와 어울려 회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인상.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8.7×27.5센티미터. 개인 소장.
▲ 유천점 주막거리(柳川店逢爐圖) 종이에 수묵 선묘로 그린 이 그림은 황해도 연안 북쪽에 위치한 배천의 동리 '유천'을 지나다 만난 감흥을 형상화한 것이다. 늙은 버드나무가 있는 주막 안의 모습, 나귀 타고 주막을 찾아드는 나그네들, 주막 입구의 마구간과 말징 수리소 등의 표현은 거칠고 성글면서도 이인상만의 독특한 개성이 무르익어 잇다. 주막 거리의 정경을 실감나게 설명해 낸 훌륭한 사경 풍속화이다. 이인상. 18세기 중엽. 24×43.2센티미터. 개인 소장.
▲ 현정승집도 이 작품은 강세황이 직접 그린 뒤 서문에 밝힌 대로 6월 초복날 처남댁에서 개를 잡아 먹고 시회를 가진 기념으로 그린 소묘이다. 마루 한가운데 편하게 앉아 있는 이가 강세황 자신이다. 풍속화식으로 그린 것으로 시회도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 준다. 1747년 작. 종이에 수묵 담채. 35×101.8센티미터. 개인 소장.
▲ 활 쏘기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에서. 자세를 교정해 주는 사람의 진지함과 이를 받아 들이는 실연자의 일그러진 표정이 재미있다. 화살이 곧은 지 한쪽 눈을 감고 재보는 인물과 활의 휘임 정도를 조절하는 모습 등이 매우 실재적이면서 익살스럽기까지 한 김홍도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 활 쏘기 강희언의 「사인삼경도첩」 중에서. 활 쏘는 인물만을 포착한 김홍도의 '활 쏘기'와 달리 소나무 아래 활 쏘는 인물들의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빨래하는 여인들이 원경 처리되고 있다.
▲ 그림 그리기 강희언의 「사인삼경도」 화첩 중에서. 18세기 중엽 당시 화단의 사제 관계나 지식인 모임에서 그림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맨 위쪽 갓을 쓰고 편하게 앉아 구경하는 이가 강세황 자신이다.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6×21센티미터. 개인 소장.
▲ 석천한유도(石泉閑遊圖) 화원 화가인 김희겸이 1748년에 그린 '석천한유도'는 종이에 치밀한 선묘와 채색의 기록화풍이다. 2층 누각 난간에 기대어 매를 쥐고 잇는 전일상과 그 주변은 기둥에 칼을, 바닥에 지필묵과 서적을 함께 배치하여 무관으로서 문무가 겸비된 모습을 보여 준다. 누각 안의 가야금과 대금을 부는 두 여인과 계단의 술과 수박을 든 두 여인은 머리와 복장이 관기인 듯하다.누각 아래에 두 마리 개와 못가에서 잘생긴 말을 씻어 주는 마부의 배치는 지방 관아의 후원 정경을 담아 낸 풍속화로 손색 없는 구성이다. 종이에 수묵 담채. 119.5×87.5센티미터. 예산 전씨 종가 소장.
▲ 담소도 김윤겸.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8.6×24.3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계도권」 가운데 봄과 가을 장면 김두량, 김덕하. 1744년 작. 비단에 수묵 담채. 7.2×18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계도권(四季圖券)」 가운데 가을과 겨울 김두량, 김덕하. 1744년 작. 비단에 수묵 담채. 7.2×18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빈풍칠월도 이방운의 '빈풍칠월도' 가운데 제2폭 9월 추수장면이다. 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담채. 25.6×20.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https://dmoo.tistory.com/category/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page=12 [또 하나의 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