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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짝둥 성균관

by 安喩齋 2019. 2. 4.

짝둥 성균관,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의 설립 시기 ?  


고려 시대부터 있던 성균관(成均館)을 조선에서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에  숭문관에서 성균관(成均館) 으로 개창한 이유는 '사회를 고르게 이루는 인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을 담고있다. (館)은 현재의 (대)학교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 민족은 민주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인재를 육성하려 했다.


성균관 대학교(成均館大學校) 교문 앞에, 설립 1398년을 크게 새겨 놓고, 동문록에는 조광조를 실었다. 그러면서 설립자는 김창숙(金昌淑,1887.8.27 ~ 1962.5.10)선생으로 근세 인물를 설정한다. 김창숙 선생이 1942년 명륜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이 명륜전문을 1946년 9월 성균관 대학으로 개칭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받아 성균관 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성균관 인근 부지를 사용하였을 뿐, 전혀 다른 실체였다. 지금도 부지 또한 별개의 소유이며 법인도 전혀 다르니 분명한 이미테이션(imitation)이다.


현행제도에서 성균관은 대학교, 향교 서원은 중.고교, 서당(글방)은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우리 것을 잊고,  성균관대학교(大學校)로 이름지으니, '성균대학교 대학교'가 되었다. 대학교 명칭이 중복되었다. 그냥 성균대학교라 하면 될 것을, 구태어 짝둥 성균()을 만들었다.


1960년대 버스 차장이 '서울역전앞 가요.'를 외치며 승객을 모았다. 어느 날부터 그 '서울역전 앞'이 한동안 웃음거리였다. 이미 '전(前)'자에 '앞'이라는 뜻이 있어서, '서울역전' 내지 '서울역앞'이라 해야 하는데 '서울역전 앞'이라 하니 같은 말이 겹처 '서울역앞 앞'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서울역전' 내지 '서울역앞'이라 한다.  


빈곤으로 가방끈이 짧은 버스 차장도 '서울역전앞'이란 말이 잘 못되었음을 알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가방끈이 길대로 긴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한문학과 국문학과 역사학과 윤리교육학과 교수들이 그들 보다 못할 건가? 


고려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하였던 성균관을 조선 초를 기준한 것은 민족의 얼 계승보다는 물리적 건축물에 의존하여 세계 최초 대학 운운하는 이미테션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


신입생들이 학문의 전당, 진리의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편법부터 접하고, 4년을 다니며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진실보다 편법을 정당화 하여 사욕을 채우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추앙받는 조선의 성균관 출신 조광조처럼.    


성균관대학교는 이제 세계 대학들과 어깨를 겨누는 수준까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둥 성균관대학교를 고집하지 말고, 진품 성균대학교가 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회의 참된 지도자 배출을 건학이념으로, 선현의 숭고한 성균(成均) 뜻을 이어가는 성균대학교가 되기를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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