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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조광조 후학

by 安喩齋 2019. 2. 2.

<이 글은 조광조의 주초위왕...에 실었던 부분으로 전체 글이 길어 중간 부분을 나누어 여기에 게재하였음>


조광조 후학이라는 이들  


임진왜란과 후학들의 행태

 

조광조를 따르던 이들이 세월이 흘러 그들의 세상이 되자백성 보호는 안중에도 없었다조광조 후학인 이황은 주자를 앞세워 참칭 '성리학'이라는 허무맹랑한 공리공담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조광조가 가당치도 않게 내세운 주자와 정몽주를 떠받들었던 것을 답습했다. 타 사상이나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 가며 창의성과 새로운 학문의 싹을 봉쇄하며 당쟁의 뿌리를 착근시켰다. 그 결과 고려(금속활자, 화약, 고려청자, 불화 등), 조선초에 찬란한 문화(훈민정음, 측우기, 해시계, 각종 서적 발간, 법제 정비 등)와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조광조 이 후 더 이상 출현할 수 없게 되어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열어갔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입증하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첫째, 이황은 스스로 15살짜리 왕(선조)에게 성군이 되라고자신이 지어 낸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바쳤다그 성학십도의 효과는? 조선 왕 27명 중 최악의 왕이 바로 그 선조다.

 

둘 째, 나라 안위 앞에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러 갔던통신 정사  황윤길(서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것으로 보고하였으나이황의 수제자인 부사 김성일(동인)은 패거리 입지를 견지하기 위해 황윤길의 보고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서인의 황윤길은 동인의 김성일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동인으로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며 서인편을 든 종사관 허성(許筬)은 이후 동인들에게 외면을 받았으며, 결국 이황 후학 패거리가 우세하여 국방을 태만히 하다가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였다. 이 때 백성 절반이상이 죽음을 당하였고 국토는 초토화 되었다.




                                            황윤길 묘로 당시 묘갈조차 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육지에서 사명대사,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뛰어났음에도 전쟁 중에 이순신장군과 의병 수장을 역적으로 몰아 투옥시키고, 처형하라고 상소까지 하였다. 왜군이 물러가자,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는 왕(선조)을 따라가며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던 조광조 패거리는 호종공신이라는 해괴한 자리를 만들어 줄줄이 꿰찼다. 자신들이 명에 원군을 청하여, 명이 왜군을 물리쳤다며, 공을 자기들이 독차지하고,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은혜국으로 떠받들며 자신들 권력을 유지하는 비책으로 삼았다. 러면서 적군과 맞서 싸운 의승과 의병은 안중에도 없었다.  


김성일 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김성일의 묘로 묘표(비석)는 참판 이상에서 장식되는 문양이다.

정유재란 시,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동포는 당시 유럽 선교사 기시단(가톨릭)의 노예 매매 대상이 되었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는 120문이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6.28~1604.5.30)가 그린 조선인 초상은 이 때 노예로 팔려갔던 조선인이다.



〈한복 입은 남자〉. 서양미술사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루벤스가 그린 이 소묘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훗날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와 이황을 떠 받들던 호종공신이라 자들 어느 누구도 특사로 일본에 가서 우리 동포를 데려오는 데 나서지 않았다. 급기야 사명대사가 특사로 일본으로가 도꾸가와와 담판을 짓고 끌려갔던 우리 동포 1,390명을 데려왔다. 당시 왕도 정치를 표방했던 조선이 얼마나 백성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으면 포로로 끌려갔던 상당수 조선인들은 귀환을 마다하고 일본 오지로 숨어들어가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생들은 오히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귀환한 동포를 대항하지 않고 포로가 되었다며 감싸안기는 커녕 비난하였다. 심지어 유생들은 특사로 갈 때 내렸던 사명대사의 관직을 박탈하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이런 못 된 짓거리를 일삼던 자들이 바로 조광조 이황의 후학들이었다.


셋 째, 그의 대민 사상이다. 그는 사(私)를 가장 나쁜 것으로 주장하면서도, 300여명의 노비와 30만평의 농토를 소유하며, 풍기 군수를 끝으로, 자신이 성군이 되라며 성학십도를 바친 왕이 수 차례 높은  관직을 부여하며 불렀으나, 73차례나 거절 상소문을 올리며 절대 응하지 않았다. 300명의 노비를 거느리며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하여, 자신 소유의 노비들간의 결혼을 반대하고 양민의 첩이 되게 하였다. 이유는 양민의 첩으로 태어난 이들은 모가 노비면 그 자식들도 노비가 되기에 노비를 증식하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노비와 노비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노비의 증식 숫자가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다. 또한 노비를 자신의 자녀에게 균등하게 배분하였는데 이는 어느 한 자식이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노비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칭하기를 천재라고 하는데 여기에 해당할 뿐, 다른 분야에서는 명석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낸 형인 이해(李瀣)가 귀양가다 양주에서 죽었다. 정쟁에 휘말리면 풍비박산 나기에, 가산을 지키기 위해 기필코 사양하고, 고향의 풍광이 멋진 곳에  정자를 짓고 가산을 유지하며 편안히 지내며 백성들 순치시키는 개갈 안나는 성리학으로 글씨름하며, 당쟁 떨거지들을 키웠다.   


도산서원에 가면 낡아 빠진 빗자루를 전시해 놓고 겸소하게 살았다고 하나, 가산과 노비는 당대 누구보다도 많이 소유했다. 지금은 그 납공 노비 후손들이 일제의 덕으로 1909년 민적법에 의해 성과 본관을 얻고, 드디어 족보에 등재되어 명문 후손이라며 성리학 운운하며 앞 장 서서 퇴계를 떠받든다. 


정묘, 병자호란시 그들의 행위

 

임진왜란에 이어 외침을 당하였는데, 후금(후에 곧바로 청이됨)에게 정묘호란을 당할 때만도 외교적 수완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그 당시 후금은 명을 격퇴시키며 기세가 등등한 세계 최강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음에도 오랑캐라 얕잡아 멸시하고, 다 망해 가는 명을 앞서의 기술처럼 자신들 권력 유지를 위해 보은의 나라로 떠 받들었다. 그 결과 병자호란을 맞았다.


당시 청과는 도저히 전쟁으로 당할 수 없었다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자신들의 패거리의 견해가 아니기에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려는 이들을 주화파(최명길)로 매도하며 역적으로 몰며, 최명길을 죽이라고 척화파인 김상헌은 수차례 상소하였다. 


조선의 군대는 왜란의 피해로 제대로 구색도 가다듬지 못하였고, 청군은 기마병으로 무장된 최강국으로 명나라를 철퇴시킨 시점에서, 조선군은 무기는 고사하고 병사마저 마구잡이로 끌려 와, 한 겨울에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다. (이 때부터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지칭할 때, 한 겨울에 전쟁 터에 솜바지 입고 나선 사람이라 하여 '핫바지'로 불리게 되었다.) 장수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출격조차 못하고 머뭇거리자, 자신들은 궁궐을 버리고 그나마 최명길의 기지로 간신히 남한산성으로 도망처 온 왕 근처를 맴돌며 비겁하게 전투를 하지 않는다며 장수들을 참형하라는 상소만 일삼았다. 수 만 명의 군사를 잃고서야, 왕(인조)이 엄동설한에 적군 앞에 나와 한 번 큰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번 찧으며, 세번 큰 절하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항복했다. 


청은 조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고, 결국 정묘호란시 제시 받았던 조건보다 비교할 수 없는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 어떻게든 왕에게 빌붙어 권력을 차지하려, 인조 자신도 백성들이 어려운 시기라며 사양하였음에도, 인조의 재혼을 추진하여 잔치를 벌이며 의궤까지 작성하였다. 후궁들이 있어 남성의 생리적 해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한편, 당시 백성의 10%인 40~50만 명이 포로로 끌려 갔다. 끌려가서는 노예가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목숨을 걸고 탈출해 오는 우리 백성을 보호하지 않고 붙잡아 청에 되 보냈다. 세월이 흘러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야 할 판에화냥녀(還鄕女)라며 질시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건만질시에 못 이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여우도 죽을 땐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속설처럼, 30년만에 탈출하여 생의 마감을 하려는 이를 잡아 청에 보내기 까지 하였다.


도학(道學)정치를 표방한 조선이 아니고이런 나라가 세상에 존재했는지 제시해 보라그들이 입에 달고 있던 이상정치, 왕도정치는 말이 그렇다는 것일 뿐으로 실은 도학(徒虐)정치의 극치였다지금도 국민의 혈세로 그들의 사당을 유지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충신의 표상으로 세뇌시키고 있으니 이런 역사교육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음에도 오로지 자신들 권력유지 비책으로 주자와 명나라를 떠받들며 상대의 견해에는 사사건건 트집 잡았다


신학문 양명학 배척과 전래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으니, 그가 양명의 핵심적인 장점을 비껴가며 비판한 것이다.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서 극히 일부에서 거론되었다. 


자신들과 다른 견해 나아가 새로운 학문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사문난적으로 중상 모략하여 죽음(윤후박세당)을 맞게 하였다외침이 뜸하다 싶으면 가당치도 않은 북벌(청을 처 물리 침)을 주장(송시열)하여 패거리를 결속시켜 긴장상태를 유지해 갔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과 이요가 있으며, 그들을 이어 장유,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재두 (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고려 사찰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조광조 배향 서원 신축


최근 도봉서원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국보 및 보물급 불교 유물이 모두 77점이 출토되었다. 조광조 후학이라는 자들이 사찰 영국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광조를 배향하는 서원을 지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태를 입증하는 증거이다. 

도봉서원 유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도봉서원 유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광조 이후 조선 사회는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폐쇄된 사회에서 열등 국가로 유지해 오다 결국 민족 초유로 이민족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주었고그 후학이라는 패거리는 귀족이 되어 영화를 누렸고, 지금까지도 언론이나 유학을 전공한다는 나부랭이들은 이들 가계를 명문가로 떠받들고 있다.


백성들에게 창의적 사고를 원천적으로 말살시켜 자신들 통치 내 테두리에 가두어 이어가게 하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허무맹랑한 동국8현으로 내세우니그 구성원 또한 절묘하다동국 8현은 그들 떨거지로 타살(정몽주)내지 사약 받고 죽었고 (조광조송시열나머지는 그들 패거리(조광조 스승 김굉필후학 이황송시열 스승 김장생 )로 얽어졌다.


성리학이 인간 마음의 근원을 파악하여 성군의 출현을 목표하면서도오히려 성군의 출현은 없었고, 그들 패거리들이 권력 근처에 출현하여 폐쇄된 사회를 이어갔다. 나라의 지도자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nobility obliges)를 실천하여야 함에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왕도정치, 성리학자란 옷을 입혀 위인으로 만들어 추앙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의 지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이 없으며,국민의 4대 의무마저 저버리는 이들이 출세하는 나라가 되었다.   


엉터리 성리학 연원 설정


조선에서 성리학이란 말보다 이학이란 용어가 여말부터 있어 왔다이 땅에서 이학(성리학)의 근원을 따지자면 안양으로부터 시작되어, 백이정, 권부, 우탁, 이제현, 이곡을 거처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숭문관을 성균관으로 개청하고 성리학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신의 처가 목은의 직계 후손임에도, 목은이 고려에서 팔만대장경을 인경한 사실을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다하여 성리학 계열에서 제외시켰다.


어떻게든 패거리를 위인으로 내세우고, 상대세력을 험담하였다. 이를테면, 몸길이 1~2mm의 작은 새우 일종으로 서해에서 주로 잡히는 '자하(紫蝦)'를 북쪽에서는 '건뎅이 '남쪽에서는 '권쟝이'라고 불리는 것에 착안하여 '곤쟁이'로 바꿔부르며 남곤과 심정을 이 갑갑류에 비유하였다. 이처럼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아 내어, 상대편 인물에 대하여 험담거리를 교묘히 유포시켰다. 

 

도학(道學정치이상정치요순시대와 같은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젊은 유생들을 현혹시켰다이 때 유생들 (요즘으로 말하면 386세대)은 훈구세력이 맥 못 추는 세태에 기쁨을 느끼며, 곧 자기들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에 차있었다그러던 차에 중종으로부터 조광조가 단죄되어 거품으로 사라질 위기에성균관 유생 150명은 궁궐 문을 두드리며 데모하였다. 당시 핵심 조광조 패거리는 이미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으나, 데모꾼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당쟁의 뿌리가 되었으며 계급(집단)독재를 형성하였다.     


조광조와 다른 노선이었던 영의정 정광필 마저 조광조의 죽임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중종은 이에 머뭇거리며 일단 귀양 보냈다가 한달만에 기여코 사약을 내렸는데총애하였던 그를 죽인 것은 그가 왕도 정치를 빌미로, 패거리를 이루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횡을 부리고 있음을 중종은 훤히 꿔뚫고 있었던 것이다. 


엉터리 성리학 전공자들의 행태 


한편 근 현세까지도 조선 유학(성리학)의 도통으로 정몽주를 기술하며 충신의 표상으로 삼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을 열거하면 김장생을 필두로 근세에는 <전고대방>을 쓴 강효석, <조선유학사>를 쓴 현채,또 다른 <조선유학사>를 쓴 장지연 그리고 이병도 한편 조선유학사와 관련한 각종 저서 및 논문을 쓴 ()서울대 교수 금장태는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는데 의심이 있다고 기술하나 결론은 앞의 이들을 따랐고, ()고대 교수 윤사순은 자신의 출신학교 선배현채 보성전문 교장이병도 보성전문 졸업)를 옹호하기 위함인지 정몽주 생존 시 행적이 누구보다도 세세히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못 찾고(없으니 당연함)자신이 내세운 허수아비 왕 공양 때 명에 출장 갔던 며칠간과 출장 갔다 국경도 못 넘고 쫓겨 왔음에도 마치 명에 유학한 것처럼 기술하며 정몽주 문집의 시를 가지고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는데 틀림없다'고 한다


심지어 성균관 대학 유학과 교수라는 엉터리는 신현(1298~1377)의 문집이라고 하는 100% 위서를 가져다 거기다 '화해사전'의 부록이라 '동양사문연원록'이라 주까지 달아 마치 사실인양 들먹이며 정몽주가 이색에게 학문을 전수한 처럼 표기하고 있으니 교수란 놈의 자질이 아니다. 파렴치해도 너무한다 싶다. 현 성균관대 유학과 교수 실태이다. 학문을 한다는 이들이 원전하나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조광조의 도그마에 함몰되어 학계를 점령하고 후학에게 그대로 조련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흘러갈지 기약할 수 없다. 성균관 대학교는 조광조가 자기들 데학교 출신이라고 버젓이 동문록에 게재하고 있다. 


최근 386세대들이 데모를 일삼다가 세월이 흘러 권력에 가까이 가면서 국가안전보다 보수 세력에게 친일개발독재친미라는 딱지를 붙여 우선적으로 타파하여야 할 대상으로 삼고문제가 있는 이를 민주투사니 통일일꾼으로 내세며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세태를 보며당시 유생들의 행태와 다를 게 없다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어갈지 ....


그러니 2016년 7월 4일까지도 교육부 실무 최고위자인 교육정책기획관(2머리 속에는 '민중의 99%는 개돼지로 먹게만 해주면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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