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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조광조의 주초위왕(走肖爲王)에서 되돌아 보는 역사의식

by 安喩齋 2016. 6. 23.

조광조 그는 누구였나? 


'주초위왕' 말은 조광조의 죄를 미화하려, 처형된 후 260여년 지나서 이긍익이 지어낸  거짓말


하나의 행위가 타자에게 의미화 되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James Geertz, 1926.8.23.~2006.10.30)가 1973년 간행한 그의 저서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문화의 해석)에서 제시한 '중층기술 thick description' 에 의한 연구방법론이 유용하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은 '(趙光祖1482년 8월 23/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1519년 음력 12월 20)가 왕이 된다'라는 말로 ((조)자를 (주)(초)로 떼어, 즉 파자(破字)하여 궁녀가 궁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이라 발라 놓고, 벌레가 글자대로 갈가 먹게하여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자, 이 잎을 따다 왕(중종)에게 바치고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징조'라고 고하여 중종이 미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되려면무엇보다도 활엽수 나뭇잎과 벌레의 먹이 활동이 전제되어야 한.


조광조가 처형된 후, 260 여년이 지나 어디에도 없던 이야기가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  '연려실기술'에 나타난다. 정확히는 계산할 수 없으나 연려실 기술을 7년에 걸처 작성하였기에 가장 빠른 첫 해로 친다 해도 258년이 지난 시점이다그는 정종의 막내아들 덕천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광사(명필로 유명)이며 조광조 이후 선대가 오랫동안 당쟁 속에서 귀양 살이를 거듭하였으며, 아버지도 귀양갔으며, 자신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경험했고 결국 귀양지에서 죽었다. 


연려실 기술이 이긍익의 저서라고 하지만,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으니 기술 내용 모두가 이긍익이 쓴 것인지 누군가가 베겨 쓰면서 자기들 당파에게 유리하도록 각색하여 끼워 넣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밝혀짐에도 국사 전공자들은 실학자로서 고증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이미 수 천 년 전의 고대 국가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 온다. 그 내용은 '세인으로부터 명망이 높아 가던 인사의 이름이 돌에 나타났다며 그가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을 내어 그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를 이용하여, 조광조의 처형이 훈구세력의 모함이었다고 그렇 듯하게 꾸며 세인에게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 겨울에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었다는 말을 믿는 엉터리들


조광조의 사건(기묘사화)은 음력 11월 16일에 발생하였으니한 겨울로 활엽수는 낙옆뿐이고 벌레는 전혀 활동할 수 없다. 더구나 꿀을 먹이로 하는 벌레는 엽록소를 갉아 먹지 않는다. 만약 조물주가 꿀을 먹이로하는 벌레에게 잎까지 먹게 하면 씨방을 손상시켜 곤충을 유인하여 수정(受精)하는 자체가 이뤄질 수 없다.  


더구나 엄동설한의 조선 궁궐 뜰에 어떤 나무가 잎을 가지고 있으며어떤 벌레가 먹이 활동하며주초위왕(走肖爲王)의 글자대로 파먹었단 말인 가이는 전혀 생태계에 대한 고려없이 지어냈고, 이 말을 의심치 않고 철석같이 믿어, 사실처럼 알려지다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그 진상이 필자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니 주초위왕 (++爲王 => 趙王)이란 말 자체가 완전 거짓말이다.  조광조를 따르는 후학 패거리들이 세태가 변하여 권력을 잡고 자신들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지어 낸 것으로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조광조의 조정 진출과 실록에서의 모습   


조광조(趙光祖)에게 이상정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한 미완의 개혁가, 학자로 평가되고 있으나, 과연 그런 평가가 옳는 가?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중종실록, 그에 대한 서적과 논문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은 거의 모두 조광조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그래서 실록을 분석하며 그 속에 있는 진의를 찾아야 했다. 분명히 밝히고 갈 것은 실록은 조광조 후학이라는 이들이 편찬하였다. 고의적으로 폄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사는 드물고 아니 없고, 오히려 미화시킨 점이 많이 나타난다. 사후에도 수차 언급되는데 그 때 마다 찬양되거나 미화된 기사다.


이를테면 왕 앞에서 조광조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도 조광조를 모함했다고 하는 이들 조차도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하려던 일, 경험이 없어서......'으로 왕에게 용서할 것으로 기술한다. 왕에게 모함해 놓고 면전에서  용서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광조가 모함을 받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507년(중종2) 1월26일 조광좌의 증인 신문에 증인으로 나온다. 그 후 3년이 지난 1510년(중종5) 10월10일에, '조광조는 평소 김굉필 (金宏弼)의 학문을 전수(傳受)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하는 것이 천거 사유였다. 


김굉필(1454~ 1504.10.7)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것은 김굉필이 낙향(1492~1494)하였을 때, 조광조가 그 동네에 살던 열 살에서 열 두 살로 불과 2년 남짓이다. 김굉필로부터 성리학을 전수 받은  성리학자라고 기술하는데, 열살 나이에 이해하고 연구 할 수준의 성리학을 배울대로 다배운 이황과 기대승은 7년간 씨름하였을가?    


조광조가 관가에 진출되기 전, 수 차례 왕에게 천거되었으나, 그 때마다 이러저런 이유로 발탁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1511년에 성균관에서 다시 천거하자, 검토관 공서린은 왕에게 그를 서용치 말 것을 제언하는데, 그 이유는 덕이 없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덕을 더 쌓아서 크게 기용하여야 한다'며,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다고 대신 포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공서린의 꾀가 범상치 않다. 


이처럼 처음 천거가 시작되고 15년 동안 수차 천거를 거처, 33세가 되어 발탁될 때도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많은 이들이 말렸다. 중종은 연산군 횡포에 파리 목숨으로 지냈다. 연산군이 내쫓기고, 급기야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 만들어준 세력에 항상 끌려다니니, 이제 그들을 제압할 백기사가 절실하였다.


그 절박함에서 조광조를 택했다. 1515년 (중종 10년) 6월 8일에 발탁된 자리는 종이를 만드는 지서(造紙署) 종 6품인 사지(司紙)로 발탁하고는 속도전으로 조광조를 띄우기 위해 10월 22일 문과 전시에 합격시키고, 11월 20일 사간원 정원(司諫院正言)으로 삼았다. 정원이 되어서 연산군 때 일(전전 대간이 박순을 간한 일)을 거론하여, 대간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여 조정이 시끄럽자, 종종이 경연에서 이를 거론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경연에서 공박하는 것은 조광조로부터 비롯되었고, 이것이 조선 당쟁의 연원이다. 


왕이 자신을 총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이미 마무리된 사건에 대하여 뒤집기를 시도하여 공박이 자잤다. 왕이 공박을 더 이상 하지 말 것을 하명하면, 언로를 막는 다며 수차례 사직을 청하였다. 그 때마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일단 명분이 그럴듯하다 싶으면 그의 사전에는 양보란 없었다. 


이쯤되자, 조광조의 주장에 대하여는 대간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못했다. 그의 주무기는 그럴 듯한 명분을 자의적으로 만들고 그 명분을 적극 활용하는 능력과 소학 대학의 문구를 입에 달고 주장하는 그의 태도였다. 겉으론 군자였던 것이었다. 


발탁된지 1년 4개월이 지난, 1516년 (중종 11년) 10월 19일자의 실록에서, 그의 학문에 대한 인식과 군주(중종)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로 아랫 사람들이 따르는 법이다. 성리학은 임금만이 아니라 아랫사람들도 모두 마땅히 힘써야 하는데 요사이 성리학에 힘쓰는 사람이 없다.'하매광조가 아뢰기를, '성리학은 곧 자신을 위한 학문이고 남을 위한 학문이 아닙니다.'"  왕에게 까지 이쯤되면 누가 그와 토론을 벌릴 수 있었겠는가? 그저 속으로 끙끙 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서 그의 학문에 대한 인식과 임금을 대하는 태도 그의 내면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 왕이 결코 잘 못된 지적이 아닌데도 왕 면전에서 이 정도였다.

 

이런 기사도 있다.  "왕은 학문에 정진하고 박람(博覽;  폭넓게 많이 읽음, 사물 널리 보고 들음)할 것이 없는 것이니무릇 유자(儒者)는 오직대학한 권뿐으로 사업(事業)을 해갈 수 있으니, 학문은 마땅히 성경(聖經)에서 체인(體認)해야 하는 것이요, 제가(諸家)들에 마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며 왕을 자기 의도에 순치시켜 갔다. 그러나 공자 유학의 기본 내용은 주왕 요순 처럼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조광조가 공서린의 행실 1/10 만되었어도, 자신은 처형 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조선은 당쟁이란 용어도 없고 외침을 당하지 않고, 선진 사회를 구현하지 않았을가? 그의 자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떨거지들이 세세로 권력을 잡아, 백성의 돌봄은 내팽겨 치고, 그들만의 세상을 누리며 대학자로 추앙해 왔으니 제대로된 사회였는가? 


조광조의 업적 세가지로 요약하면


(1) 유학을 변질시켜 도그마로 삼은 일 (2) 효력이 끝나는 주자학를 신봉한 일 (3) 관심 밖에 있던 정몽주를 내세워 왕권을 강화 한 일


유를 학문에서 벗어나 도그마(dogma)로 삼고, 이미 명나라에서 효력이 끝난 주자(학)를 맹종하며, 관심 밖에 있던 정몽주를 내세워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다. 정몽주는 고려 사람임에도 찬불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태종(이방원)이 신원시킨 후, 역대 왕들이 충신으로 설정하려는데 편승하여, 곳곳에 정몽주 배향 서원을 짓고, 주자가 주창했던 향약으로 주자와 정몽주를 도구로 자기 세력을 넓혀갔다. 대대적으로 향약을 펼첬음에도, 현재 명칭만 국사책에  존재할 뿐이고, 주자는 최고의 학자로 정몽주는 만고 충신이자 성리학 도통으로 뚜렷이 존재한다. 여기서 나타나듯 향약은 주자와 정몽주를 내세워 기존 세력(佛.仙)을 타도하는 방책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조선에서 다원성과 다양성이 말살되고 획일적 변질된 유 중심의 계급독재(일당 독재보다 더 해악이 큼)로  그들만의 세계로 만들었다. 당쟁으로 사사건건 대립하며 사회 혼란을 야기시켰다. 외침을 연거퍼 당하다가,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넘겨 주니, 일본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유교라느니, 조선은 유교국가라 세뇌시키고, 충효를 앞세워 식민사관을 주입하며 그들 통치에 순치시켰다. 그 앞잽이 하던 이상백 이병도 등이 이를 금과옥조 하더니 해방이 되자 학계를 독점하였다. 


왕도정치가 아니라 왕을 등에 업고, 패도정치 지향 


군주(중종)의 전폭적 지지가 있던 5년의 막강한 세월을 주자학에 의거 유 중심사회로 만드는데 진력하였다. 주자학은 왕권 강화로 이용 되가며 도덕적 윤리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 윤리를 다시 되살리려 노력한 이가 바로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다. 그는 조광조보다 10년 먼저 태어나 8년 더 살았으니 동 시대 사람이다. 그는 주자학으로는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새로운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유교에서 윤리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던 만큼, 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 (知行合一) 이 양명학의 3대 강령이다. 후에 왕수인의 호를 따 양명(陽明)학이라 한다. 

왕양명은 주희(1130~1200)의 성즉리(性卽理)와 달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다.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며,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말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말은 지, 실천은 행이다.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조광조는 개혁이란 명분을 내걸었으나, 가당치도 않은 수 천년 전 신화인 요순시대를 들먹이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커녕 왕권강화를 위한 주자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유에서 중시하는 윤리 측면에 대한 방법론이 강구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학 대학 수준에 고착하였다. 그 조차 편가르기로 활용했다. 


기존의 다원사회를 척결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으로 장악하여 갔다. 그 위력은 왕을 등에 업었기에 가능했다. 왕은 등에 업혀 한동안 안락감을 즐겼으나, 좌충우돌하며 질주하니 불안하가만 하였다. 한 밤중에 예고 없이 조광조 등에서 뛰어 내리고, 쌓였던 괘씸한 분을 분출하였다. 


그의 문집에 나타나는 '옥중에서 진술한 말'에서는 "신의 나이 서른 여덟입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믿는 바는 군상(임금)의 마음뿐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토록 주장하던 <<대학>>의 체인(體認)은 온데 간데 없고, 전적으로 군주의 마음에 의존하였음 고백한 것이다.


소격소 철폐 


고려의 다원 사회를 이어가던 조선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궁궐내에 소격소를 설치하고, 천재지변 등 불가항력의 재난을 당하면, 왕은 자신을 반성하며 이 곳에서 재를 올려 나라의 편안을 기원했다. 그런 행위는 전적으로 미신이라기 보다 군주로 하여금 지난 일에 대한 자성의 기회가 되고 앞으로 잘해 보려는 순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중종이 적극 만류하여 철거하지 못하다가 괴략을 동원하여 기여코 철거하였다. 


재상 남곤(南袞)은 조광조를 천거하여 실현되자, 이를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남곤이 시를 잘 짓자, 시 잘 지어 뭐하냐며 옛부터 내려오던 장(詞章)학풍을 비난하였고, 상대할 때는 면박을 주곤 하였다. 남곤은 김굉필과 동문수학하여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과 절친하였다. 자신의 취향 내지 생각과 다르거나 자기보다 나으다 싶으면 은인이고 선현이고 가리지 않고 폄하 대상이다. 당연이 생존하는 이로서 자신보다 훌륭하다고 여기고 존경하는 이가 없다. 반면에 저세상 사람을 떠받들며 위인시 하는 특성을 갖는다. 옛 정도전이 그랬다. 


그는 폭군 연산군하에서는 비판 한 마디도 못(안) 했다. 오히려 연산군을 몰아낸 박원종, 성희안 등에 대해 몰아낸 행위가 불순하다며 그들을 맹비난하였다. 연산군에 아첨한 자를 지조있는 자라하였고, 도(道)를 중시하면서도 부(父) 상중에 고기를 먹은 자를 효자로 삼는 등 당시 부적절한 사안인데도 시행하였다. 

 조광조 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광조의 사당 


패거리 끌어들이는 현량과 


어떻게든 정적을 떨궈내려 애쓰던 중, 1516년 10월 8일에 조광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재변이 겹쳐 생겨, 지난달 그믐날 뇌성하고 이튿날 새벽에는 산마루에 눈이 쌓였습니다. 눈이 내리게 되면 뇌성이 없는 법인데, 음양(陰陽)이 이토록 고르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조정에 융화하는 기운이 없는 소치로 그런가 싶으니, 마땅히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라며, 


기존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내쫓고, 자기들 세력을 특채하는 현량과라는 제도를 만들어 앉혔다. 당시 제대로 글을 아는 사람조차 없게 되자 인재양성이란 구실로 정몽주 배향의 서원을 곳곳에 설치하고, 지방으로까지 패거리를 펼처갔다. 

조선사회는 다양성이 사라지고 오직 변질된 유() 중심의 획일적 사회로 고착화 되어갔다. 조선에서 간신 내지 역신의 대명사였던 정도전이, 주자의 주장을 그대로 표절한 '불씨잡변'을 보고 불을 부정하였다하여 학자로 인정하는 기운이 싹텃다. 국사 및 유학 전공자들은 '유학의 본질을 불교 배척'으로 인식하며, 정도전을 위대한 학자로 부각시켜 놓았다. 식민사학 최초 프로갠디스트인 이상백을 스타트(1934년)로 한영우는 정도전 찬양이 골수까지 배었다.  


정체 불명의 정몽주 묘와 비상조치 발동 후 그를 문묘 배향 


공양왕 추대로 당시 고려의 충신으로서 의심을 받던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시키는 상소(이여가 올림)를 올렸으나, 당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 모두 반대하여 관철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중종을 부추겨 반대 못하도록 하는 교시를 발표한 후에, 기여코 문묘에 배향시켰다. 


100여 년간 어디에도 없던 정몽주의 묘를 자기 고향 근처에서 이자(호 음애, 자기 고향사람)가 조상 성묘가다 우연히 발견하였다며정체불명의 묘를 정몽주 묘로 삼아 상소하여 사당을 지어 치제하고, 전국에 서원을 지어 정몽주를 배향시키도록하며 자신들 패거리를 키워갔다. 현재 정몽주를 배향하는 서원이 가장 많은 이유다. 용인시 모현동의 왕릉보다 더 화려한 지금의 정몽주의 묘는 그 때까지는 다허물어져 봉분마저 남지 않아, 누구도 알아 볼 수 없는 흙 무더기었다. 정몽주 묘라는 것은 오직 이자와 조광조의 주장일뿐이었다.


당시개성에서 피살되어 효수당한 정몽주의 시체를 하필 100년 후에 태어 날 조광조의 집근처 용인까지 가져다 장사를 지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당시로서는 역적의 시체를 쉬지 않고 이틀이나 메고 올 이유가 있었을 가? 설령 그렇게 했다고 인정해도, 이미 태종은 고려 충신으로 부각시켜 그를 대대적으로 현창하였고, 손자에게 벼슬까지 내려, 사는데 전혀 걱정할 일이 없어졌는데, 후손들은 역적에서 하루 아침에 충신이 된 할아버지 묘를 알고도 방치하였단 말인 가! 정몽주 문집에는 부인의 묘로 이장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문집을 그대로 믿는다면, 후손들이 정몽주 부인의 묘를 알고 있었고, 유지왔기에 여기에 이장하였다. 어찌하여 충신으로 부각된 정몽주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해 놓은 후에는 잊어버리고 방치해 놓았었나? 


사승 관계 뒤집고, 위차 뒤바꿔 지금도 불화 조장


목은이 원나라에서 돌아 와, 숭문관을 성균관으로 개창하고 대사성 성균관 관장이 되어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 5명을 선발하여 교관으로 겸임시켰다. 수업이 끝나면 교관들을 모아 토론을 주제하며 지도해 나갔다. 지금의 박사과정 수업이 이와 같다. 정몽주는 이들 교관 중 한명이었다. 


길재와 김자수는 목은의 애제자로, 길재는 목은을 찾아가 하룻밤을 같이하며, 낙향의 뜻을 밝히고 조언을 구하였다. 그 조언에 따라 낙향하여 금오산으로 들어 갔다. 금오산이란 명칭은 목은이 낙향하는 길제에게 지어 준 싯귀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김자수는 당시 지공거인 목은이 발탁하여, 목은이 수장인 용두회( 장원급제자들의 모임)의 총무로서 목은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조광조는 길재와 김자수가 성균관 유생이었던 것에 착안하여 생뚱맞게 정몽주의 제자로 설정하였다. 당시 사료(고려말)는 단정적으로 정몽주의 제자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목은의 제자라고 볼 수 있는 사료는 앞에서와 같이 곳곳에 나타난다. 


자호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이나 선현을 본받기 위해 그들의 호를 차운한다. 이색이 목은이란 호를 쓰자, 정몽주는 자호를 포은으로 하고, 목은에게 자호에 대한 기를 부탁하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몽주는 이색을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포은이 생존 시는 물론 사후에도 100 여 년간 사승관계로 기술되었으나, 목은과 포은을 동료로 만들고 위차까지 뒤바꾸어 정몽주(포은)를 목은 앞에 놓는 개혁아닌 변조를 했다. 그 후로 모든 자료에서 삼은을 칭할 때 포은 목은 야은(또는 도은)으로 기술한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은 조광조는 목은 손자의 사위였다. 그러니 처의 증조부가 바로 목은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대 왕들이 정몽주를 선양하려던 것에 편승하였고 또한 목은이 팔만대장경을 인경하고 불을 용인하였다 하여 학문이 불순한 것으여겼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군자로 자처하면서도 선현들의 인(사승관계)과 자신의 인륜도 저버리면서 그랬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성리학에 근원이 없자, 고심하던 김장생은 성리학의 도통을 정몽주로 내세웠다. 이는 거짓이다. 일반인들 조차도 자기들 조상이 목은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족보에 포은 제자로 게재할 뿐만 아니라, 비석에는 자기 선조가 포은 제자였음이 자랑인 양, '포은밑에서 학문을 연마...'라는 문구를 어김없이 새겨 놓기 시작했다. 


1965년, 매년 열리는 동학사의 삼은각 제향 때에는 이 위차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질의하여 판단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 판단을 정몽주 후손들이 수용하지 않으니, 지금 2017년에도 계속 위차 문제로 편치않다. 선조(목은, 포은)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회를 이끌어 갔는데, 후손들이 이를 본받아 더욱 좋은 사회로 이끌어 나가야지, 어찌하여 그 훌륭한 뜻을 저버리고 후손끼리 분탕질하여야 되겠는 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아닌 군자로 자처하던 조광조였다. 좋게 말해서 개혁이고 강직하다는 표현 밖에, 달리 표현하면 만고의 패륜이다. 중종이 기여코 그를 처단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군주의 눈은 남달랐다. 


중종은 조광조를 총애하였으나, 모든 대신들이 만류하였음에도 용서치 않았다.


성균관 유생 신분에서 어느 날 뜻 밖에 발탁되어 왕의 총애로 승승장구 하면, 그 격에 맞는 역량을 발휘하여야 했다. 오직 군주(중종)의 패권에 의존하여 도학정치란 명분으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패거리를 끌어 모아 붕당을 형성, 군주의 위상을 위태롭게 하니, 자신을 발탁하고 승승장구시키며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던 바로 그 군주에게 처단된 것이다. 


조광조가 중종으로부터 눈 밖에 나 엄벌에 처하려 하자, 근거도 없이 조광조을 무고했다고 하는, 홍경주 심정 남곤을 비롯하여 모든 관료들이 하나같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 잘 되자고 하다가 일어 난 일이니 용서'해 주도록 조광조를 위해 적극 변호하였으나, 중종은 그들의 변호를 인정하면서도 조광조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조광조의 옥중소를 듣고 작성된 그의 죄는《(大明律)》의 간당조(姦黨條)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광조 ·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비(朋比; 붕당)를 맺어,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여 권요(權要)의 자리를 차지하고,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詭激)이 버릇이 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 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가게 하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다 참(斬)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관에 몰수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은 조광조 등의 궤격한 논의부화하였으니, 대명률 죄는 수종(隨從)이므로 한 등급을 감하여 각각 장 1백(杖一百) 유 3천리(流三千里)에 처하고 고신(告身)을 진탈(盡奪)하는 데에 해당합니다."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수 년의 세월이 흘러, 그 떨거지들이 그를 신원시키려는 수 차의 상소에 대해, 사건 당사자인 중종은 한사코 반대하며 '광조 일은 내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안다. 다시는 거론하지 마라!'며 단호히 거부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폭군 연산이 내쫓기고 인성군(중종)을 왕으로 옹립하자, 여기에 무사들이 왕위를 흔드는 사건이 몇 차례있었다. 그런 참에 조광조가 붕당을 이루며 전횡하며 군주인 자신의 간청까지 듣지 않으니(소격소 철폐 등) 불안감이 싹텄다. 거기다 조광조를 내치라는 원성이 자자했다. 그런 와중에 무사들이 조광조 패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일어 날 기미가 있었다. 현실로 나타나면 그 후환으로 왕위가 위협받을 것이 뻔하였다. 서둘러 한 밤 중에 조광조 일당을 체포하여 속결로 처리함으로서 무사들의 구테타를 사전에 막고 민심을 진정시켰던 것이다. 영의정 정광필의 끈길긴 주장과 모든 대신들의 호의적 옹호로 조광조는 처단되지 않고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 중 음애 이자만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음에도 자신은 재신임될 것으로 믿었다. 그 됨됨이가 범상치 않은가? 중종은 한달만에 기여코 사약을 내렸다.  


이 때 유일하게 음애는 죽음을 면했는데, 그 이유는 심정과 음애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심정이 사경을 헤매는 중병(독감?)을 앓게되자, 음애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극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당시 칼자루를 쥔 심정이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음애만은 목숨을 부지케 하였다.   


오히려 조광조가 정적을 모함하였다.


조광조의 죽음이 훈구파의 모함이라는 주장이 공리로 정착되었으나, 상투적 주장이다. 어느 사건이고 갈등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갈등이 있으면 모함도 따른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오히려 조광조에 의한 상대편 모함이 더 많았음은 명백히 입증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모함 당했다고 입증할 수 없으며 갈등 수준이었다. '주초위왕' 이 말 자체를 앞에서 규명한 바, 실은 조광조 패거리가 상대를 모함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 명백히 입증된다.


어느 조직이나 갈등은 있게 마련이며, 이 갈등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할 지언정 최소화하며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이 위정자(지도자)의 역할이다. 조광조 자신이 오히려 갈등을 사사건건 창출하고 격화시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로부터 내려오던 신앙인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척결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모함 그 이상이고, 날씨가 불순하자 이는 조정에 소인배가 있어 그랬다는 주장은 명백한 모함이다. 


조광조는 선조 때 신원되고, 급기야 문묘에 배향되고 선현으로 부상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후학이라는 패거리는 사소한 일(복상)까지 사사건건 문제 삼아 정쟁으로 몰고 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라는 말은 조광조의 도그마에서 출발

 

'조선의 건국이념이 유교'라든지 '조선의 국교가 유교'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그렇게 가르쳤고배웠기 에 한국사의 공리(axiom)다. 과연 그 공리가 성립되는 가?


종교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19세기에 일본이 미국과의 수교문서에서 religion을 종교로 번역하면서 지금은 일반명사가 되었다. 서양의 religion은 이견이 있지만, re(다시)가 리가레(ligare, 묶다)와 합해 ‘다시 묶다’로 신과 인간을 묶어맨다는 속박의 뜻이 담겨있다. 


유학은 불교보다 먼저 이 땅에 도래되어 통치 수단의 근간이 되었다. 백제 신라 고려의 통치 수단이었고,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유학을 종교로 간주하여 조선의 국교 운운하는 자들은 왜놈들이 우리 얼을 파괴하려 썼던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조선초 신출 권력자가 자신들 입지를 굳히려 기존 불교세력을 탄압하였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왕의 교서나 관련 근거 조항이 있어야 하는데 근거가 되는 것이 없다. 더구나 조선 사료 어디에도 '조선의 국교가 유교'라든가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라고 신빙할 자체가 없다. 오히려 국왕이나 왕실에서 불교를 신봉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다고 천명하였고실제로 국명도 고려였다. 정종 때까지 고려의 법제를 그대로 따랐다. 왕이 왕씨에서 이씨로 변한 것 뿐이었다. 


태조 정종 세종 세조는 독실한 숭불자이고태조는 무학을 국사로 삼았고, 양주 회암사에서 거처하며 행궁으로 이용하였다. 자기 딸을 직접 머리를 깎아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정종은 자기 아들 모두 승이 될 것을 권하여 목숨을 보존케 하였다물론 태종도 불교를 용인하였다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다양한 불교 서적을 간행하며백성들에게 문자 보급을 펼쳐 갔다궁안에는 사찰을 두었다. 세조도 그랬다중종은 승과를 두어 공식적으로 나라에서 승려를 선발하였다왕이 죽으면 후궁은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비구니가 되었고, 왕자가 결혼하고 죽으면 그 처는 비구니가 되었다.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왕이나 그 처가 죽으면 사찰을 지어 원찰로 삼았다. 국초부터 도교의 영향으로 궁궐에 소격소를 설치하고 역대 왕들이 천재지변 가뭄 홍수 등 불가항력의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 곳에서 자신의 부덕을 반성하며 불()에서 위안을 찾았다. 조선 왕실에서 사찰의 재정 등을 관장하였다. 


조선초 국왕들은 불교문제로 유신(儒臣)들과 언쟁을 벌이곤 했다. 이 때 국왕이 보여 줬던 불교관에 대하여 ‘훌륭한 무장이었지만 학문이 부족했던 태조’는 고려 말 뛰어난 학자였던 목은(牧隱;이색)을 들먹이며 효과적으로 제압한다“목은도 불를 믿었다네가 목은보다 잘났느냐.” ‘술수를 좋아 했던 태종’은  “나도 불이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지금 명나라가 불을 신봉하고 있으니 우리가 탄압할 수는 없다.” 터푸 맨 세조’는 단순명료했다. “칼을 가져와라내 저놈의 목을 쳐 부처께 사죄하겠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들이 명백함에도 일제의 앞잽이들이 만든 식민사관에 함몰되어 이상백 이병도 한영우 등등이 조선의 국시가 유교니, 국교가 유교라 헛소리하는 것이다. 



p.s.

숲 해설가란 어느 사람의 글을 보니, 오동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희게 나타나도록 만들어 놓고, 마치 벌래가 파먹은 것을 입증한 것처럼 올린 이도 있는데, 이는 거짓행위다. 나뭇잎을 인위적으로 오려낸 것이 분명하였다. 오동나무 잎에서는 벌레를 죽이는 성분을 가지고 있기에 꿀을 발라 놓았다고 해도 벌레들이 달려 들지 못한다. 한편, 흰 수정액으로 글자를 쓰거나, 검은 종이나 은박지에 글자를 써서 글자대로 오리어 이를 나뭇잎에 하루 이틀 붙여 놓으면 이 부분에 햇빛이 들지 않아 엽록소 생성이 정지되게 된다. 이 나뭇잎을 따다가 화학물질에 담그면 그 부분이 희게 나타난다. 숲 해설가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궁금하였는데, 나뭇잎을 가지고 거짓행위를 하는 사람이란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꿀을 발라 놓았다 하여도 식물, 곤충, 그 유충의 생물학적 생태를 전혀 고려치 않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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