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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퇴계성당과 서강대의 다산관에 대한 유감

by 安喩齋 2017. 8. 3.

랜만에 춘천에 갔다. 남춘천역 앞에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기차역이 전철역으로 바뀌며, 초라하던 역사가 몰라보게 변하였다. 매주 한번씩 오가던 역이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방향마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시내를 가다보니, 새로 지은 성당이 눈에 닥아 왔다. 


"퇴계성당"


역사 속의 인물을 지명이나 건물명에 붙일 때는 그를 선양하려는 뜻이 담겨있다. 퇴계는 조선 유교(유학)의 중추적인 사람으로 지명 '퇴계동성당'이 아닌 '퇴계성당'은 퇴계를 기리는 성당이란 의미를 갖는다. 

 

 

(우)200-944.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781-2 번지


위의 명칭은 전에 사용하던 성당명인데, 한국 천주교계의 성인 유대철를 기리기 위한 성당명임에 틀림없으나, 퇴계와 병용하였으니, 그야말로 퇴계를 대철로 광고하는 명칭이되었다. 그래서 유대철 성인을 제외시킨 것같은데, 이번에는 한국 유학계의 거물 퇴계를 기리는 퇴계성당이 되었으니 더욱 가관이다. 천주교 성인 유대철성당은 안되고, 유교 거물 퇴계성당은 되는지 천주교계는 재고하였으면 한다.                         

춘천 퇴계성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춘천, 퇴계동 성당이 아닌, 퇴계성당>


같은 춘천교구내에 있는 효자동의 성당은 '효자동 성당'이라고 하는데 더욱 의혹만 커진다. 



분명, 같은 교구 내의 성당이다.


효자성당이 아닌 '효자동 성당'이다.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은 '원효'가 아닌 지명 '원효로'를 성당명으로 삼았기에 문제될게 없으며, 조선 천주교는 처음 불교의 암자에서 활동하였다. 천진암이 그렇고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도착한 곳이 강경의 해안가 나암자도 그랬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되었다.

원효로성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원효성당이 아닌, 원효로성당>


익산 나암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익산 나암자가 있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가 서제 서품을 받고 처음 닿도하여 이곳에서 숨어 포교활동을 함>



절두산성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절두산 순교 터


해미호야나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해미 호야나무, 현재는 썩어 패어 나간 동쪽(사진에서 오른편) 가지에 천주교도를 매달아 놓고 고문하다 처형>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포교)될 때, 유교에 찌들은 이들은, 단지 부모의 제사를 안지낸다는 이유를 붙여 천주교 신자들을 짐승이하의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한강변 새남터와 그 옆 산 아래에 천주교 신자들 모아 놓고 목을 베었으니 후에 산은 절두산이 되었다. 서산 해미에서는 내포지역의 1000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를 호야나무에 묶어 놓고 목을 내리쳤다. 이유는 단하나, 유교의 풍습을 거역하고 천주를 신봉했다는 것으로 천인공로할 짓을 감행하였다. 


또 하나, 왠 시비냐고 시비 걸지 모르겠으나, 서강대학교의 '다산관'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참석하는 것이 순교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싶어 참석을 삼가하고 있다. 


<서강대 다산관. 정약용을 기념 한다는 내용으로 소개됨. 사회과학관으로 문학부 일부, 사회과학부, 교양학부가 사용>


신유박해(1801년) 딜렘마(prisoner's dilemma속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자기와 함께 천주를 신봉하던 친인척을 관헌에 밀고하여, 그 댓가로 기장으로 유배되었으나, 관헌에 잡혀 온 이들이 갖은 고문에도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들의 인성 하나하나를 지목하며 심리적 고문을 병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무 아무개는 그 종을 잡아다 고문하면 죄없는 종이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여리어 자백할 것이다'라는 치졸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끝내 함구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 때 고문 제안 값으로 아무 연고가 없던 기장 유배지에서, 자신의 외가 윤선도 후손들이 군림하던 강진으로 이배되는 특전을 얻었다. 여기서는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차를 즐기며 불교를 가까이하며 차(茶)에 심취하여, 사후에 자신의 호 여유당보다는 다산(茶山)으로 불려지고 있다. 보통사람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첩과 별장까지 마련하였으니 고향으로 나들이만 못하였을 뿐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스스로 배교자임을 관철시키려 '한 때 천주라는 헛개비에 홀렸다며 다시는 이 헛개비에 홀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수차례 조정에 상소하여 급기야 뜻을 이뤄 유배가 풀리어 양수리 자기집으로 돌아 와 시를 짓고, 처형되었던 친인척이 청(북경)을 오가며 가져다 준 자료를 근거로 저술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이 때 목숨을 잃은 약용의 바로 위 형 약종, 큰 형 약현의 사위 황사영 등은 124년이 흐른 1925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로 시복(諡福)되었다. 

다산초당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산 초당, 당시로서는 호화 별장, 개축됨>


천주교 예수회에서 설립한 서강대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이 건학이념과 어떻게 합치되는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라는 세파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천주교 박해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는 자체만을 부각시켜 다산을 기리는 '다산관'을  지어 기리고 있으나, 실은 앞에서 언급한 바, 동지들에 대한 거듭된 배신과 배교의 특혜로 강진으로 이배되었던 것이다. 천주교계는 정약용의 배교를 찬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류영합에 천부적 소양을 가진 정약용이 사후 저 세상에서 이번에는 유교를 배교하고 다시 천주교로 개종하여 순교자 이상의 신앙심을 돈독히 하였다는 것인지 현세에 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p.s.) 정약용은 천주교계에서 결코 선양할 인물은 아니다. 목민심서는 일본이 을사조약(1905년 11월)을 체결하고, 1906년2월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부지역을 실지로 통치하였는데 필사본 목민심서를 발견하고 이를 일본어로 출간하여 참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 1905년이 정약용 저서의 첫 간행이다.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를 편집한 것에 저급 관리의 부임시 행동절차와 일상 행동요령을 담고있는데, 그 보다 200 수십년 전에 율곡이 저술한 어린이를 위한 초학서 '격몽요결'에 비하면 사유적 측면이나 내용면에서 유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민심서'라는 거창한 책명을 붙였으니 탁월한 편집 기술을 가졌다. 


나머지 저서들은 1934년 일제치하에서 간행되었는데, 일부는 책명이 현대 용어로 각색되었다. 이를 테면 '방례초본서(邦禮艸本序)'를'경세유표'로 둔갑시켜 간행된 것이다. 간행된 후 당시 평가로 '저술서는 방대하지만 내용면에서 경서 주석 등 이미 알려진 내용과 별 다를 것없다'는 그리 좋지 않은 평가가 이어지자 간행을 주관한 연희전문 정모씨는 육두문자로 그들을 맹공하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극찬을 하니, 더 이상 왈가왈부 없다가 이병도 제자 천관우가 해방 후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며 정약용을 '조선실학의 집대성자'로 표기하면서 부터 '실학의 집대성자'로 굳어졌다.


한편, 김일성은 정약용의 주장에 공동생산 공동 분배 및 생산시설의 국유화 등 공산주의 사상과 합치됨을 발견하고, 조선공산주의 개척자로서 조선 최고의 학자로 내세우니 좌익들은 정약용에게 열광하였다.지금도 북한에서는 우리 역사 중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정모씨 제자들, 식민사관자 및 좌파들은 목민심서가 마치 조선 지방장관의 지침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내용은 사서도 제대로 못 뗀 저급관리의 행동요령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1905년에 일본어로 간행되어 조선통치에 활용되었다. 한편 기중기 제작을 들먹이나 도르레 원리는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축성에서도 사용되었다. 앞서의 이들이 소설을 쓰며 현혹 시키니 일반인들은 그들을 추종하고 있다.



                    <위 글을 쓴 며칠 후, 마침 이런 글이 발표되어 옮겨 놓습니다.>


다산 묘소에서 십자가가 나왔다니 

   지난 8월 8일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에서 보낸 보도자료가 언론사의 종교담당 기자나 관계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졌습니다. 그 다음날인 8월9일자 도하 신문에는 보도 자료의 내용들이 큰 활자로 보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도 자료의 제목은 “한국천주교 230년 역사, 사상 최초 바티칸에 전시된다”라고 되어 있으며, 전시 기간은 9월9일부터 11월17일 바티칸 박물관에서 전시가 진행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유물 특별기획 전시를 개최한다면서 자세한 설명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전시는 바티칸 박물관의 52개 전시실 중 하나인 ‘부리치오 디 카를로마뇨’ 홀에서 열린다”라고 말하고, 바티칸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데 매년 전 세계에서 6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바티칸 박물관은 특별전시회를 1년에 많아야 2〜3차례밖에 허용하지 않을 만큼 장벽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명성 높은 박물관에서 한국 천주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으로서도 처음인 특별전시회에 한국천주교 유물 203점이 전시되는 일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매우 자랑스럽고 명예롭기 그지없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전시회의 개최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전시 내용물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의 무덤에서 발견된 십자가(조선 후기,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가 전시될 유물의 하나라면서 그 십자가의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보도 자료에 의하여 보도된 언론에서는 “정약용의 묘소에서 발견된 십자가”를 기사의 제목으로 잡아 크게 보도한 기사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에서는 부산의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에 언젠가 후손이라는 사람이 와서 기증해주어서 박물관에 보존돼 있던 것을 이번에 전시하게 되었다면서, “정확한 연대나 기증자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라고 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즉각 다산의 7대 종손인 정호영(교육방송 근무)씨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에서 다산의 묘소를 통해 십자가를 발견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면서 황당무계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호영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다산의 묘소는 처음 장례 치른 뒤로 지금까지 이장이나 파묘가 없어 내용물을 확인한 바가 전혀 없다면서, 어떻게 십자가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쪽에 이야기하여 전시할 품목에서 빼줄 것을 요구하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만약 다산의 묘소에서 십자가가 나왔다면 다산은 분명히 천주교 신자였음을 증명하게 되고, 학계에서 결론이 났던 대로 한 때 신자였으나 의례문제와 국금(國禁)으로 진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학설이 뒤집히는 대사건으로 번지게 됩니다. 천주교 쪽에 부탁드립니다. 십자가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묘소에서 누가 발견하여 왜 부산의 순교자박물관에 보관하게 됐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설혹 신자였더라도 다산은 순교자는 아닌데, 왜 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까요. 이런 의문점이 명확히 밝혀지기 전에는 전시품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산을 연구하는 사람의 한사람으로서의 바람입니다. 다산이 신자로서 살았느냐, 신자에서 떠났느냐는 다산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는 뜻에서라도 세심한 판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천주교 교회사에 밝은 조광(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교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전시품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다고 하니 천주교 당국은 깊이 고려해주기 바랍니다. 

박석무 드림 

**[편집자 공지] 8월 17일, 서울대교구로부터 전시품목 중 '십자가'를 제외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산연구소와 정약용 종손의 이의 제기가 수용된 결과입니다. 이미 기고 완료된 원고인데다 상황 이해를 돕는 의미도 있어 기고문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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