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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재평가

정도전 버전 엎

by 安喩齋 2014. 10. 16.

정도전 버전 엎입니다.

 

(인명에 대한 존칭 생략)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하였음에도 이를 금과옥조로 삼으며 이에 동조한 식민사관자들이 존재하였다. 사건이나 인물을 연구할 때, 그 사건의 전후관계 흐름 전체를 특히, 인물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출생 배경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걸친 행위들을  그가 살았던 시대의 국가관, 사회법규, 사회정서, 행동심리, 종교관 등에 입각하여 전반적으로 시대를 관통하여 통찰하여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아날르 역사학파의 견해이다. 어느 단면만을 떼어 미화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전후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우리의 사회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추진하였다. 우리의 종교, 풍습, 관습법, 일상생활의 제측면과 경제, 산업, 농촌 등을 철저히 조사하여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여 우리를 열등민족으로 인식시켜 신탁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규장각 도서 및 왕조실록 등 우리 역사서를  장악하고 우리 역사서를 멋대로 왜곡하여 문헌고증사학이란 그렇듯한 구실을 붙였다. 1908년 합방에 앞서 우리의 국토를 세세히 측량하여 이 때 처음 지적도가 작성되었다. 합방이 된 후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선사회의 가치관 폄훼, 사유화 토지 몰수, 일제 지지세력 선동 등을 조선인 자발적으로 참여케하는 롤 모델이 되는 인물을 내세우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을 찾았다. 이러한 치밀한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서 간신및 배반의 대표격인 정도전을 위인으로 설정하여 그를 개혁가로서 조선을 건국한 주체자로 띄웠다.  

 

  

이 전까지, 조선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1809년 순조9년에 고려말 대제학을 지낸 정묵은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화암사 (華巖祠 ) 서원기에 정도전과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정몽주가 정도전을 투옥시키고 상소하며 '(정)도전은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 벼슬)의 자리를 도둑질하고 비천한 본색을 감추고 본래의 주인을 없애기 위해 고자질로 죄를 얽어 수 많은 사람을 몰아 넣었고 ...'라고 한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심지어 1909년에 간행된 청해이씨 족보인 청해이씨 세보 1권 서문에서 조차 '정도전은 간사하여, 필히 명령없이, 정도전의 목을 잘라야 했다. 태조(이성계)는 처음부터 공(이지란)이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방원)이 사직(왕위)에 올라 말하기를 정도전이 간사하고..' 이렇듯 려말선초는 물론이고 조선 중기에도 정여립 사건에서 최영경이 삼봉(三峯)이란 호를 삼았다가 길삼봉이란 허구 인물의 실체로 몰려 역적 정도전을 흠모하는이로 투옥되자 최영경은 한자로 정도전의 호 삼봉()과 다르다고 항변하였으나, 감옥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균도 역적으로 몰리었는데 그 때도 허균이 자신이 엮은 시집에 정도전의 시를 맨 앞에 놓았다가 평소 역적 정도전을 흠모했다는 누명을 쓰며 조선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처럼 스에마쓰 야스카즈( 末松 保和  すえまつ やすかず1904.8.10~1992.4.)가  정도전을 언급하기 전까지 정도전에 대한 인식은 일관되게 역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무슨 조선을 설계하였다는 것인가? 이는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일인의 주장을 근거로 한영우가 지어낸 말에서 유래되었다.   

 

동경제국대 졸업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위원으로 시작하여 위원 및 경성제대 교수가 된 스에마쓰 야스카즈( 末松 保和すえまつ やすかず) 가 정도전을 앞세웠다.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이상백 한영우는 철밥통을 마련했고 학자라는 타이틀로 출세 길을 질주하였다. 이들의 정도전 연구는 전적으로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유사이래 신학문의 형식으로 연구된 최초의 인물로서 일제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정도전 등장은 조선기틀 마련이 아니라 조선얼 붕괴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朝鮮의 법체계를 조사하면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조선 최초의 법전이며 조선건국의 기틀이 되었다는 논리로 그동안 간신 또는 역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정도전을 위인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임라일본부를 주장하며 일본이 우리를 고대국가 때부터 지배하였다고 조작하였다. 그는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문헌고증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역사 왜곡에 전념하며, 우리의 고대사 신라사 및 조선사 특히 정도전에 대하여는 수차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발표는 그를 실증사학자로 자리하게 하였다. 해방 후 우리의 국사업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와 함께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그들이 말하는 독일 랑케의 실증사학을 앞세웠지만 실은 汚랑케 식민사학을 답습한 것이다.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정도전을 조선개국의 주도자로 내세워 조선이 이성계가 세운 이씨왕조라고 하지만 실은 정도전이 세운 나라인데, 이방원(태종)이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라 왕조가 유지된 것으로 국민에게 인식시킴으로서 1. 조선 왕조의 전통성 폄하 2. 천한 신분계층으로 하여금 지조있는 조선선비 부패 인물로 인식 3. 사유화된 토지를 몰수 4. 조선사회의 간신을 선견지명 인물로 부각 5. 앞의 사항에 의거하여 조선 왕조를 부인하고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하는 황민화 정책을  전개시키는 전초전으로 우선 정신교화를 통해 매국노를 선동하는 식민정책이었다. 이러한 제반 조건에 딱 들어 맞는 조선 역사상의 프러피갠디스트(propagandist)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도전을 훌륭한 인물로 흠모하도록 하여 새로운 세상인 내선일체에 참여하는 매국행위가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전초적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총독부에서는 "조선인은 제국신민화할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확신하고 창씨개명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잠깐, 그들의 식민지 교화책이 얼마나 치밀하고 교묘하였는지 자신도 모르게, 조선얼 수호에 남달랐던 조윤제마져 교화된 사례를 소개한다. 1958년 조윤제가 용비어천가가 문학적 가치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데 대하여, 경성제대 후배인 김사엽이 논쟁을 일으켰다. 김사엽은 "일제시대 城大(경성제대를 말함)교수 가운데서 藤田(후지타), 末松(스에마스), 高橋(다가하시)같은 학자들도 <<龍歌>>(龍飛御天歌)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趙박사도 知悉 할 줄 압니다. .......생략....., 문학적 가치로는 대수롭잖은 것으로 다루어 그 때 교실에서 그들의 강의를 필기하면서 貶視에 가까운 평가를 하는 것을 듣고서 生은 분개하였던 것입니다."라고 조윤제에게 반론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일제는 우리를 여러 방면에서 얕잡아 최고 엘리트 경성제대 학생(지식인)에게 주입시켰다. 조윤제는 일제에 맞서 큰 불이익을 당하면서까지 우리 것을 지켰던 지조 높은 학자였으나, 경성제대 학생으로서 그 때 일인 교수들로부터 익혔던 지식으로 해방 후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섰다가 후배 김사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 (趙潤濟 著, <<朝鮮詩歌史講>> <龍飛御天歌>와 金思燁 著,<< 李朝時代의 歌謠硏究>>, 思潮 1958.12월호 참조 )            

 

 

다시 돌아가서,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 조선 최초의 헌법으로 조선의 기틀이 되었다고 주장하고는, 이를 바탕으로 '朝鮮經國典私考 (京城帝國大學 文學會編 學叢第1, 1942年刊),', ' 朝鮮經國典考(和田博士還曆記念論文集 所載)', '  三峰集編刊考 (朝鮮學報 弟1輯 日本奈良, 1951)'를 발표하였다. 


총독부 법무국장 미야모토 하지메(宮本)는 반도인의 씨()제도 제정에 관하여라는 1939년 11월 10일 경성중앙방송국 방송에서 "원래 야마토(大和) 민족과 반도민족과는 동조동근의 혈연적 필연성으로 굳게 맺어져 있다." 그래서 "내지로 건너와서 내지인식으로 씨를  부른 다수의 반도인이 완전히 야마토 민족과 융합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추호도 조선인의 후예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었다 (이상백이 이에 해당). 따라서 현재의 "전 반도인이 가까운 장래에 야마토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는 날이 온다'"며 창씨개명의 가능성을 이상백에서 찾았다. (1939년 11월 10일 경성중앙방송국 방송원고)

 

 

이상백은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 고등1학원, 와세다 대학, 동 대학원에서 동양사학과를 이수하고 무슨 연유에서 일본의 배려로 중국 남경대학에서 2년 6개월간 동양사를 연구하였는데, 그 목적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중국역사 조작이었다. 그러나 전공과 달리 조선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본 일본올림픽 조직위원회 취제역으로 오늘날 상무이사로 있으며, 이렇다할 학문 활동을 하지 않고 (발표된 자료 발견 안됨) 있다가, 뜸금없이 이병도가 주도하는 1934년 5월7일에 진단학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다음해인 1935년 진단학보 2집에서 부터 시작한 글은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가 주장한 정도전을 중심에 두는 "이조건국에 관한 연구"를 논설이란 제명으로 3회에 걸쳐 발표하였고, 1935년 2월 3일자 진단학보에  "三峰人物考"를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그동안 정도전으로 하여금 서얼차대가 고착화되었다는 종전의 사실을 뒤집으며 정도전을 위인으로 만드는 공작의 일원으로 "서얼 차대의 연원에 대한 일 문제" 를 연달아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고위직에 있던 이상백이 일본의 하수인이 어떻게 이 시기에 조선 건국에 대하여 글을 썼다는게 이상스럽지 않은가? 조선의 얼을 지우려 창씨개명까지 단행한 일본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발표는 정도전을 조선의 위인으로 만드는데 걸림돌인 조선의 사료를 일제의 의도대로 간신 내지 역적이란 인식을 불식시켜 위인으로 만드는 프러피갠디스트의 역할이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실록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키는데 협조하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나 가능한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도  어찌던 일인지 이상백은 조선사편수회 촉탁도 아니였고 거기다가 동경에서 거주하며 실록의 내용을 뒤집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오비이락인지 모르겠으나 공훈을 인정받아 일본올림픽 조직위원회 전무이사로 승진하였다. 그럼에도 강만길은 이상백이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기 위해 썼다고 버젓이 말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건국이란 정치적 이용거리로 그리고 정부수립 후에는 농지개혁의 논리로서 정도전의 경자유전의 주창자로, 북조선 김일성은 무산자계급으로 하여금 브르조아를 척결하고 프로레탈리아 혁명의 영웅으로 거듭 날 것을 선동하며 정도전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상백 (작고) 손진태 (월북 or 납북, 작고) 신석호 (작고) 이병도(작고) 등은 우리 국사업계는 물론이고 문교부를 장악하고 이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한편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구테타를 감행하고 이를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고려를 뒤업고 조선을 개국한 혁명가로 정도전을 새삼 부각시키고 자신들을 정도전에 빗댔다. 군사구테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국사편찬위원회로 하여금  정도전을 띄우기 위해 문집을 발간케 하였으나, 번역할 시간조차없자, 서둘러 순한문으로 편집하고 발간사와 서문만을 국한문으로 했는데, 스에마츠 야스카즈 (末松 保和)의 주장을 근거로 실지로는 이상백의 정도전 찬양 글로 도배하였다. 순한문 책을 몇 명이나 읽고 이해하였을까만 5개월만에 재판까지 찍어 냈다. 이병도 이상백 제자인 윤병석까지 합세하며 권력에 빌붙은 나부랭이들이 정도전 찬미를 경쟁적으로 지면과 방송에서 떠들어 국민을 세뇌시키더니 이윽고 한영우는 '정도전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정도전사상연구소까지 내며 어디고 끼어들 틈만 생기면 정도전 찬양가를 불러대어 명실공히 정도전찬양 명창이 되었다. 사상연구에 관한 것이라면 철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칭호를 받아야지 국사를 전공한자가 사상을 연구하여 문학박사 칭호를 받으면 그게 옳바로 된 연구일가? 치과의사가 뇌수술하는 거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유사이래 역사 인물 평가에서, 정도전에 대한 위상을 식민지 교화 정책으로 정반대로 뒤바궈 놓았음에도 누구하나 여기에 일체 반론없이 오히려 견강부회하며 열광하였다. 바로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이 갖는 마력 때문이다. 국사업자 강만길은 이를 실증사학의 중요한 성과라 한다. 심지어 식민사관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홍이섭조차 에마츠 야스카즈 (末松 保和)의 주장을 지지한다. (洪以燮 著.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참조). 누굴 탓할 것인가? 이이제이 (以夷制夷)는 최선의 병법인 것이다. 아연할 뿐이다. 아뭍은 이상백은 사후, 일제시 공로로 일본 욱일 3등 중수훈장을 받았다. 이상백은 동경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였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가? 조선인으로서, 우리의 얼과 기상을 알리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유신 을지문덕 장군에 대해서는 일체 연구하지 않고, 조선 역사왜곡의 주범인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와 함께 정도전을 지속적으로 택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가?  

 

여기서, 박정희 정권은 안정을 찾았고, 한영우는 박사학위를 받고 그야말로 기어들 틈만 있으면 처절할 정도로 정도전 찬양가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러댔다. 그러니 더 이상 정권차원에서 정도전을 띄 울 필요성이 없었고, 자신이 과거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군을 토벌했음을 불식시키고 또한 여수반란사건에 연루된 공산주의자란 낙인을 벗기 위해 이번에는 김구를 내세웠다. 김구 아들을 주중대사(당시 타이페이) 교통부장관으로 측근에 두며 한층 김구를 민족의 지도자로 띄우고 당시 이승만에게 보내던 국민들의 연민의 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입국을 불허하였다. 이 때까지 김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권이 안정기에 들고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시비거리가 해소되자 무인이란 동질성에서 이순신장군을 부각시키며 그 업적과 유적을 현창하였다. 그리고 문을 숭상하는 차원서 퇴계를 띄우며 전폭적인 지원아래 도산서원을 재축하는 과정을 밟았다. 물론 북한 김일성도 정도전을 더 이상 위인으로 떠 받들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서 정도전을 찬양했다는가는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정도전에 대한 시설물은 최근에서야 손학규 경기도 지사시절에 평택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삼청공원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단양 도담삼봉에는 동상이 마치 세종대왕 동상처럼 세웠는데 이는 삼봉이라는 명칭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인 모양인데 정도전의 삼봉과 도단 삼봉과의 연계는 어불성설이다. 이유는 정도전 자신은 자신의 출생지인 단양에 대하여 히스테리를 보였기에 정도전 호 삼봉이 도담삼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정도전이 어려웠던 시기에 삼각산 밑에서 승려들과 교류하며 살 때 삼각산 봉우리를 따서 삼봉이라 지었다. 

 

한영우의 기여로 정도전이 간신에서 조선의 위대한 인물로 확고히 자리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친일파 척결과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극좌파들은 일제와 군사구테타 세력에게 세뇌 당한 줄 아는지 모르는지 민중사학을 기치로 민본 어쩌구하며 정도전과 김구를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쫓겨가면서 했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졌다. 그러나 반드시 다시 온다. 100년, 200년이 가도 벗어날 수 없는 식민사관을 조선에 심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조선을 지배할 수 있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언젠가 일본인 역사 교수가 우리나라 역사계를 둘러 보고, '우리가 개설한 (역사) 철도 위를 잘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 철도의 1등 기관사 이모 또다른 이모 2등기관사 윤모 특등 기관사 한모씨가 아닐가?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발표했던 글을 묶어 책으로 출판했는데, 어림잡아 우리와 관련된 책은 다음과 같다. 어머어마하다. 한국의 역사업자들이 이 책들을 베껴 써먹은게 허다할 것같다.

 

近世ける北方問題進展 (1928) (国史研究叢書6末松 保和

 

新増東国輿地勝覧索引 (1937末松 保和、 朝鮮総督府中枢院

 

新羅史諸問題 (東洋文庫論叢36末松 保和、 東洋文庫

 

任那興亡史 末松 保和

 

朝鮮封建時代農民階級構成 金 錫亨末松 保和、 李 達憲

 

訓読吏文附吏文輯覧 前間 恭作、 末松 保和

 

三国遺事 一然朝鮮史学会、 末松 保和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上.下巻 末松保和博士古稀記念会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1954年 

 

新羅政治社会,〉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末松 保和

 

高句麗朝鮮古代史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末松 保和

 

古代日本朝鮮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末松 保和 )

 

高麗朝史朝鮮朝史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末松 保和

 

朝鮮史史料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末松 保和

 

朝鮮研究文献目録全7冊 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附属東洋学文献センター刊行委員会、1970-1972年 

  •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全6冊 吉川弘文館、1995-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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