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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재평가

정도전은 일제가 만든 위인

by 安喩齋 2011. 6. 1.

 

시작하면서

 

(인명에 대한 존칭 생략)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하였음에도 이를 금과옥조로 삼으며 이에 동조한 식민사관자들이 존재하였다. 사건이나 인물을 연구할 때, 그 사건의 전후관계 흐름 전체를 특히, 인물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출생 배경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걸친 행위들을  그가 살았던 시대의 국가관, 사회법규, 사회정서, 행동심리, 종교관  등에 입각하여 전반적으로 통찰하여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의 크로체, 콜링우드같은 역사학자의 견해이다. 어느 단면만을 떼어 미화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전후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우리의 사회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추진하였다. 우리의 종교, 풍습, 관습법, 일상생활의 제측면과 경제, 산업, 농촌 등을 철저히 조사하여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여 우리를 열등민족으로 인식시켜 신민지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규장각 도서 및 왕조실록 등 우리 역사서를  장악하고 우리 역사서를 멋대로 왜곡하여 문헌고증사학이란 그렇듯한 구실을 붙였다. 1908년 합방에 앞서 우리의 국토를 세세히 측량하여 이 때 처음 지적도가 작성되었다. 합방이 된 후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선사회의 가치관 폄훼, 사유화 토지 몰수, 일제 지지세력 선동 등을 조선인 자발적으로 참여케하는 롤 모델이 되는 인물을 내세우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을 찾았다. 이러한 치밀한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서 간신및 배반의 대표격인 정도전을 위인으로 설정하여 그를 개혁가로서 조선을 건국한 주체자로 띄웠다.  

 

  

이 전까지, 조선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1809년 순조9년에 고려말 대제학을 지낸 정묵은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화암사 (華巖祠 ) 서원기에 정도전과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정몽주가 정도전을 투옥시키고 상소하며 '(정)도전은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 벼슬)의 자리를 도둑질하고 비천한 본색을 감추고 본래의 주인을 없애기 위해 고자질로 죄를 얽어 수 많은 사람을 몰아 넣었고 ...'라고 한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심지어 1909년에 간행된 청해이씨 족보인 청해이씨 세보 1권 서문에서 조차 '정도전은 간사하여, 필히 명령없이, 정도전의 목을 잘라야 했다. 태조(이성계)는 처음부터 공(이지란)이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방원)이 사직(왕위)에 올라 말하기를 정도전이 간사하고..' 이렇듯 려말선초는 물론이고 일인들이 정도전을 언급하기 전까지 정도전에 대한 인식은 일관되게 이러한 내용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동경제국대 졸업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위원으로 시작하여 위원 및 경성제대 교수가 된 스에마쓰 야스카즈( 末松 保和すえまつ やすかず, 1904.8.10~1992.4.) 가 정도전을 앞세웠다.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이상백 한영우는 철밥통을 마련했고 학자라는 타이틀로 출세 길을 질주하였다. 이들의 정도전 연구는 전적으로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신학문의 형식으로 연구된 우리의 유사 이래 최초로 인물로서 일제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정도전 등장은 조선기틀 마련이 아니라 조선얼 붕괴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朝鮮의 법체계를 조사하면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조선 최초의 법전이며 조선건국의 기틀이 되었다는 논리로 그동안 간신 또는 역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정도전을 위인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임라일본부를 주장하며 일본이 우리를 고대국가 때부터 지배하였다고 조작하였다. 그는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문헌고증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역사 왜곡에 전념하며, 우리의 고대사 신라사 및 조선사 특히 정도전에 대하여는 수차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발표는 그를 실증사학자로 자리하게 하였다. 해방 후 우리의 국사업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와 함께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그들이 말하는 독일 랑케의 실증사학을 앞세웠지만 실은 汚랑케 식민사학을 답습한 것이다.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정도전을 조선개국의 주도자로 내세워 조선이 이성계가 세운 이씨왕조라고 하지만 실은 정도전이 세운 나라인데, 이방원(태종)이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라 왕조가 유지된 것으로 국민에게 인식시킴으로서 1. 조선 왕조의 전통성 폄하 2. 천한 신분계층으로 하여금 지조있는 조선선비 부패 인물로 인식 3. 사유화된 토지를 몰수 4. 조선사회의 간신을 선견지명 인물로 부각 5. 앞의 사항에 의거하여 친일 매국노를 선동하는 식민정책이었다. 이러한 제반 조건에 딱 들어 맞는 프러피갠디스트(propagandist)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도전을 훌륭한 인물로 흠모하도록 하여 새로운 세상(한일합방 내선일체)에 참여하는 매국행위가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였다.  

 

 

여기서 잠깐, 그들의 식민지 교화책이 얼마나 치밀하고 교묘하였는지 자신도 모르게, 조선얼 수호에 남달랐던 조윤제마져 교화된 사례를 소개한다. 1958년 조윤제가 용비어천가가 문학적 가치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데 대하여, 경성제대 후배인 김사엽이 논쟁을 일으켰다. 김사엽은 "일제시대 城大(경성제대를 말함)교수 가운데서 藤田(후지타), 末松(스에마스), 高橋(다가하시)같은 학자들도 <<龍歌>>(龍飛御天歌)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趙박사도 知悉 할 줄 압니다. .......생략....., 문학적 가치로는 대수롭잖은 것으로 다루어 그 때 교실에서 그들의 강의를 필기하면서 貶視에 가까운 평가를 하는 것을 듣고서 生은 분개하였던 것입니다."라고 조윤제에게 반론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일제는 우리를 여러 방면에서 얕잡아 최고 엘리트 경성제대 학생(지식인)에게 주입시켰다. 조윤제는 일제에 맞서 큰 불이익을 당하면서까지 우리 것을 지켰던 지조 높은 학자였으나, 경성제대 학생으로서 그 때 일인 교수들로부터 익혔던 지식으로 해방 후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섰다가 후배 김사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 (趙潤濟 著, <<朝鮮詩歌史講>> <龍飛御天歌>와 金思燁 著,<< 李朝時代의 歌謠硏究>>, 思潮 1958.12월호 참조 )            

 

 

다시 돌아가서,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 조선 최초의 헌법으로 조선의 기틀이 되었다고 주장하고는, 이를 바탕으로 '朝鮮經國典私考 (京城帝國大學 文學會編 學叢第1, 1942年刊),', ' 朝鮮經國典考(和田博士還曆記念論文集 所載)', '  三峰集編刊考 (朝鮮學報 弟1輯 日本奈良, 1951)'를 발표하였다. 

 

 

이상백은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 고등1학원, 와세다 대학, 동 대학원에서 동양사학과를 이수하고, 일본의 배려로 중국 남경대학에서 2년 6개월간 동양사를 연구하였는데 그 목적은 중국역사를 조작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그러나 전공과 달리 조선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본 일본올림픽 조직위원회 취제역으로 오늘날 상무이사로 있으며, 이렇다할 학문 활동을 하지 않고 (발표된 자료 발견 안됨) 있다가, 뜸금없이 이병도가 주도하는 1934년 5월7일에 진단학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다음해인 1935년 진단학보 2집에서 부터 시작한 글은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가 주장한 정도전을 중심에 두는 "이조건국에 관한 연구"를 논설이란 제명으로 3회에 걸쳐 발표하였고, 1935년 2월 3일자 진단학보에  "三峰人物考"를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그동안 정도전으로 하여금 서얼차대가 고착화되었다는 종전의 사실을 뒤집으며 정도전을 위인으로 만드는 공작의 일원으로 "서얼 차대의 연원에 대한 일 문제" 를 연달아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발표는 정도전을 조선의 위인으로 만드는데 걸림돌인 조선의 사료를 일제의 의도대로 간신 내지 역적이란 인식을 불식시켜 위인으로 만드는 프러피갠디스트의 역할이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실록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키는데 협조하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나 가능한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도  어찌던 일인지 이상백은 조선사편수회 촉탁도 아니였고 거기다가 동경에서 거주하며 실록의 내용을 뒤집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오비이락인지 모르겠으나 공훈을 인정받아 일본올림픽 조직위원회 전무이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건국이란 정치적 이용거리로 그리고 정부수립 후에는 농지개혁의 논리로서 정도전의 경자유전의 주창자로, 북조선 김일성은 무산자계급으로 하여금 브르조아를 척결하고 프로레탈리아 혁명의 영웅으로 거듭 날 것을 선동하며 정도전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상백 (작고) 손진태 (월북 or 납북, 작고) 신석호 (작고) 이병도(작고) 등은 우리 국사업계는 물론이고 문교부를 장악하고 이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한편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구테타를 감행하고 이를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고려를 뒤업고 조선을 개국한 혁명가로 정도전을 새삼 부각시키고 자신들을 정도전에 빗댔다. 군사구테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국사편찬위원회로 하여금  정도전을 띄우기 위해 문집을 발간케 하였으나, 번역할 시간조차없자, 서둘러 순한문으로 편집하고 발간사와 서문만을 국한문으로 했는데, 에마츠 야스카즈 (末松 保和)의 주장을 근거로 실지로는 이상백의 정도전 찬양 글로 도배하였다. 순한문 책을 몇 명이나 읽고 이해하였을까만 5개월만에 재판까지 찍어 냈다. 한편 윤병석까지 합세하며 권력에 빌붙은 나부랭이들이 정도전 찬미를 경쟁적으로 지면과 방송에서 떠들어 국민을 세뇌시키더니 이윽고 한영우는 '정도전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정도전사상연구소까지 내며 어디고 끼어들 틈만 생기면 정도전 찬양가를 불러대어 명실공히 정도전찬양 명창이 되었다.

 

우리나라 유사이래 역사 인물 평가에서, 정도전에 대한 위상을 식민지 교화 정책으로 정반대로 뒤바궈 놓았음에도 누구하나 여기에 일체 반론없이 오히려 견강부회하며 열광하였다. 바로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이 갖는 마력 때문이다. 국사업자 강만길은 이를 실증사학의 중요한 성과라 한다. 심지어 식민사관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홍이섭조차 에마츠 야스카즈 (末松 保和)의 주장을 지지한다. (洪以燮 著.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참조). 누굴 탓할 것인가? 이이제이 (以夷制夷)는 최선의 병법인 것이다. 아연할 뿐이다. 아뭍은 이상백은 사후, 일제시 공로로 일본 욱일 3등 중수훈장을 받았다. 이상백은 동경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였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가? 조선인으로서, 우리의 얼과 기상을 알리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유신 을지문덕 장군에 대해서는 일체 연구하지 않고, 조선 역사왜곡의 주범인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와 함께 정도전을 지속적으로 택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가?  

 

여기서, 박정희 정권은 안정을 찾자, 더 이상 정도전을 띄울 필요성이 없어지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르키게 되어, 겨례의 지도자로 이순신장군을 표방하고 이순신장군의 업적과 유적을 현창하였다. 물론 북한 김일성도 정도전을 더 이상 위인으로 떠 받들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서 정도전을 찬양했다는가는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정도전에 대한 시설물은 최근에서야 손학규 경기도 지사시절에 평택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삼청공원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단양 도담삼봉에는 동상이 마치 세종대왕 동상처럼 세웠는데 이는 삼봉이라는 명칭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인 모양인데 정도전의 삼봉과 도단 삼봉과의 연계는 어불성설이다. 이유는 정도전 자신은 자신의 출생지인 단양에 대하여 히스테리를 보였기에 정도전 호 삼봉이 도담삼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정도전이 어려웠던 시기에 삼각산 밑에서 승려들과 교류하며 살 때 삼각산 봉우리를 따서 삼봉이라 지었다. 

 

한영우의 기여로 정도전이 간신에서 조선의 위대한 인물로 확고히 자리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친일파 척결과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극좌파들은 일제와 군사구테타 세력에게 세뇌 당한 줄 아는지 모르는지 민중사학을 기치로 민본 어쩌구하며 정도전을 영웅으로 떠받들며 롤 모델로 삼고 있으니, 이는 정도전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프러피갠디스트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일본인 역사 교수가 우리나라 역사계를 둘러 보고, '우리가 개설한 (조선사) 철도 위를 잘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했는지의 사실여부를 떠나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는 발표했던 글을 묶어 책으로 출판했는데, 어림잡아 우리와 관련된 책은 다음과 같다. 어머어마하다. 한국의 역사업자들이 이 책들을 베껴 써먹은게 허다할 것같다.

 

近世ける北方問題進展 (1928) (国史研究叢書6) 末松 保和

 

新増東国輿地勝覧索引 (1937) 末松 保和朝鮮総督府中枢院

 

新羅史諸問題 (東洋文庫論叢36) 末松 保和東洋文庫

 

任那興亡史 末松 保和

 

朝鮮封建時代農民階級構成 金 錫亨末松 保和李 達憲

 

訓読吏文- 附吏文輯覧 前間 恭作末松 保和

 

三国遺事 一然朝鮮史学会末松 保和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上.下巻 末松保和博士古稀記念会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1954年 

 

新羅政治社会,(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末松 保和

 

高句麗朝鮮古代史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末松 保和

 

古代日本朝鮮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末松 保和 )

 

高麗朝史朝鮮朝史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末松 保和

 

朝鮮史史料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 末松 保和

 

朝鮮研究文献目録全7冊 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附属東洋学文献センター刊行委員会、1970-1972年 

  • 末松保和朝鮮史著作集全6冊 吉川弘文館、1995-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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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체적인 내용을 요하는 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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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왕조로의 복귀에 대한 불안감에서 정도전 조선건국론 등장   

     

    일본이 패망하자, 이상백은 조선(한국)으로 돌아 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해방된 조선이 맥아더 사령관하의 미군정하에 놓이게 되자, 이승만과 임시정부 사람들은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공인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미국이 일본을 왕조로 유지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일본 침략이전의 조선왕조로 복귀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조선왕조 복귀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왕조를 폐기하고 건국이라는 용어가 필요했다. 시류의 영합에 뛰어난 이상백과 이병도(이병도형인 이병희는 이완용비서였다가 이승만 비서가됨)는 이승만의 이러한 고심을 간파하고 그 자신이 일제시 조선얼 파괴공작으로 내밀었던 정도전 전략을 이번에는 조선왕조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도전을 다시 들고 나왔다. 영친왕의 귀국을 원천 봉쇄하고, 앞서의 스에마츠 야스카즈의 朝鮮經國典私考 (京城帝國大學 文學會編 學叢第1, 1942年刊)를 근간으로 1947년 "조선문화사연구논고(을류문화사)" 를 발표하면서, 정도전을 한 껏 미화 시켜 유학의 대가 조선 개국의 기초를 닦고 조선을 설계한 위인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뒤질세라 이병도는 1947년 "고려시대의 연구"라는 책자에서 그동안 방석의 난 정도전의 난은 억울하다면서 "정도전의 난"으로 규정되었던 것을 적반하장으로 난의 주동자를 뒤바꾸어 "왕자의 난 즉 이방원의 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난을 일킨자가 성공하였는데도 난이란 말인가? 난을 일킨자가 정권을 잡고서도 난주동자로 규정한 나라가 세계 어느나라에 존재하는가?  "고려시대의 연구"라는 책명이  조선에 까지 연결되어 조선초까지 언급했으니, 당시 정도전을 띄워야 하는 긴박함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사관을 가진 자가 식민사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왕자의 난은 이병도의 국사 유린 행위

     

    1948년 "국사대관"에서 역시 그간의 모든 역사서에서  "정도전 난" 또는 "무인년 난" 기록들을 멋대로 "제1차왕자의 난"이라는 용어로 둔갑시키고 박포난을 "제2차왕자의 난"이라 칭함으로서 정도전의 조선 건국을 가일층 부각시켰다. 심지어 태종실록에서 "정도전의 난" "무인년의 난"으로 되었는 내용을 번역하면서 있지도 않은 타이틀를 달아 "1차 왕자의 난"으로 적반하장으로 난 주동자를 뒤바꿔 버렸다. 심지어 권근이 지은 입학도설에 대하여도 근거도 없이 정도전이 먼저 입학도설을 지어 그걸 보고 지었다고 한다.   

     

    이병도는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정도전 난"을 "왕자의 난 즉 이방원의 난"으로 둔갑시키는데 국사 교과서 독점 집필이 유효했다.

     

    이들은 정도전을 위인시하는데 그쳤기에 수양대군을 "제3차 왕자의 난", 연산군시 중종반정을 "제4차 왕자의 난", 광해군시 인조반정을 "제5차왕자의 난"으로 칭하지는 않았다. 그 논리라면 제3차 제4차 제5차 왕자난으로 표기함이 마땅하다. 

     

    조선(이조)이 망한 시점에서 사회학 교수가 조선 망국의 연구는 어디가고 "이조건국의 연구"라니 

     

    이상백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이조건국의 연구"를 을류문화사에서 발행하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다가 1955년에는 스에마츠 야스카즈가 발표한 정도전 연구를 근간으로 서울대에서 "이조건국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창설하며 교수로 지낸 자인데, 한 나라가 망하면 그 이유에 대한 망국사를 연구하는 것이 사회학을 전공한 이의 임무이자 사명이다. 그럼에도 조선이 망한 시점에서 망국사는 커녕 이조건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말이되는 가? 그래서 인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연구한 조선망국사가 나오지 않고있다. 이상백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번에는 5.16 군사 구테타 정당화로 정도전 재등장

     

     그리고 더 이상 거들 떠 보지 않던 정도전 연구는 1961년 5.16군사구테타가 발발하자, 결정적인 호기를 맞았다. 당시 구테타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못받자, 구테타 주역들은  당위성을 찾고자 안절부절 하였다. 이 때 절묘하게도 군사 구테타에 적극 협력한 당시 육사생도대장(대령)으로, 함경도 출생 만주일본하사관학교출신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는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창암이 이상백의 조카 사위였다. 박창암은 군사정부 감찰부장이 되어 국민의 생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상백이 이번에는 정도전를 개혁의 혁명가로 내세워 5.16 군사 구테타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공작을 펼쳤다. 5.16군사 구테타 주역의 권력과 자금지원받아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할 시간조차 없게 되자 순 한문으로 편집한 삼봉집을 발간하여 대대적으로 뿌렸으나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것은 서문인 스에마츠 야스카즈와 이상백의 정도전 찬양 글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이후 즉 구테타가 일어나고 12월 말에 재판까지 찍어냈다. 번역본은 1966년에 이르러 내놓았는데 그럼에도 다른 선현의 문집에 비하여 일찍이 번역본을 내놓은 것이다. 

     

    한편 이상백 이병도 심지어 윤병석에 이르기 까지 서울대 국사업자들뿐만 아니라 세칭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동원되어 전략적으로 정도전 찬양 글이 신문 소설 방송 드라마 수필 등등의 다양한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당시 군사 구테타에 대한 국민들의 비협조적인 시선을 불식시켜 5.16 구테타의 당위성을 고려를 뒤엎은 정도전에게 의탁하는 정치공작으로 三人成虎란 말을 입증하였다.  

     

    한영우는 스에마츠 야스카즈와 이상백의 논리를 기반으로 "정도전의 사상연구"로 학위 받고, 서울대 교수가 되어,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등등 수 많은글을 발표하며 정도전 찬양의 길을 갔다. 

     

    얼마나, 전략적으로 추진했으면, 강만길은 이상백 이병도에 의한 정도전 연구는 해방 후 국사업계가  실증사학을 도입한 큰 성과라고 기술하고있다.  최근에 이숙번의 후손이 출판한 이숙번을 현창하는 책을 보았다. 그 책의 주안점은 자기 선조인 이숙번이 정도전을 없애버린 정도전 난 때의 공적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왕자의 난에 자기 선조인 이숙번이 큰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 선조인 이숙번이 정도전을 제거하였는데, "제1차 왕자의 난"이라면 이 난의 주동자가 자기 선조인 이숙번 아니던가?   

     

    그뿐이랴! 전주이씨들 입에서도 왕자난을 당연한 용어로 쓰고 있으니, 그 중독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논리라면, 자신들이 말하는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고려를 뒤업은 난의 역적들이고 이방원의 후손인 조선 왕들은 역적 후손들이 아니던가?

     

    전략적으로 전국민에게 세뇌시켰으니, 국사를 전공한 이들도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조선의 기틀을 잡은 법전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스에마츠 야스카즈 처음 주장하고 이상백 이병도 후에 한영우가 이를 따른 것이다. 이성계는 1392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첫 일성이 고려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다고 공포하고, 실지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대외 정식 명칭도 고려국사권지 이성계였다. 권지란 지금으로 말하면 직무대리란 의미이다. 그러니, 건국이념이고 뭐고 없었다. 조선의 학자들 하륜 김종직 신숙주 정인지 성상문 조광조 송시열 오윤 한치윤 안정복 정약용 그리고 이상백 선배에 해당하는 박은식 최남선 정인보 등등 기라성 같은 역사학자 어느 누구도 이상백이나 한영우가 주장하는 논리가 될 만한 문헌은 일체 없다. 그렇다면 이상백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의 주장을 제외하고 국내에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구차하게 경복궁 이름을 짓고 운운하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당위성 전략으로 펼쳐지는 정도전 위인화 작업에 서울대 국사과 교수 이상백 이병도 등이 동원되고 줄기차게 제창하는데 누가 반론이나 이의를 펼치겠나! 이기백 등등 국사업들로서 기라성 모두 이병도 제자들이다.        

     

    정도전의 미화작업으로 활용되는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등은 원나라 경세대전 등을 베낀 것으로 문집에서 존재  

     

    정도전이 1394년에 지었다는 "조선경국전"은 원나라의 "경세대전"의 조항만 베낀 것으로, 태종은 법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정도전이 지었다는 조선경국전이 있다는 걸 알고 이를 활용하려 하였으나, 내용은 없고 항목만있어 이를 폐기하였다. 정도전이 국호를 조선과 화령으로 하여 명 황제가 택하도록하였다고 하나,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록에도 이 부분이 나오나 이는 조선의 명분을 위해 실록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정도전의 성격으로 보아 새나라를 세우며 엣 조선을 국호로 삼을리 만무하다. 이성계에게 아부하려 이성계 고향인 화령을 국호로 지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지어주니 조선도 제시했던 것으로 한 것이다. '경제문감'(1935)은 원나라의 '문헌통고(經濟文鑑)',  '산당고안 (山堂考索)' 거의 그대로 베끼었고, '경제육전'도 실은 조준이 지은 것이다. 나아가 정도전의 대표작으로 떠드는 '불씨잡변'도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주자의 불교 비판론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백 한영우는 문헌고증사학이라는 식민사관으로 정도전 문집을 바탕으로 스에마츠 야스카즈가 주장하는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하고 설계하고 체계를 잡아 기틀을 마련하였다고하는 정도전 찬양을 근간되고 있으나, 그것도 불과 몇 쪽에 불과한 것으로 제대로 된 법제는 고사하고 책의 분량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전해지는 것은 필사본으로 간략하기 그지 없다. 조선건국의 기틀이 된 법전이 필사본 한 부로 출간도 하지 않은 법전이 어떻게 기틀을 마련한단 말인가? 의문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한양천도를 마치 정도전의 업적으로 주장하는 데 이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양천도는 이미 공민왕 때부터 논의되었던 것이고, 이성계는 왕권을 잡고는 천도를 구상하였다. 그는 한양을 염두에 두었으나 호응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하륜이 적극 한양을 수도로 주장하여 이뤄진 것이다. 이성계 앞에서 알짱거리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도성을 쌓을 자리를 정하도록한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건축을 직접 도맡아 한 이는 김주 (金凑)이다. 물론 건축에 지대한 공헌한 이는 김사행(金師幸)이다. 

     

    생각해 보라. 설계나 건축은 전문가가 하는데 정도전이 끼어들지 않은 곳이 없다지만, 그런 곳까지 전문가가 될 수 있겠는가? 한영우가 조선의 설계자니 어쩌구 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니 어중이떠중이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일반인이 세뇌된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 등의 이름을 작명한 것을 마치 조선 국가 체계를 잡은 것처럼 견강부회하는 요설로 현혹하니 일반인들뿐 아니라 국사를 업으로 하는 이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사실은 무학대사가 궁궐 터는 잡았고, 정도전은 중간에 끼어 들었으며 한양을 수도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도전이 경복궁(景福宮) 이름을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것도 정도전 찬양의 하나로 주장한다.  

     

    설령, 작명가가 아이 이름 지었다고 하여 그 아이가  훌륭한 인재가 되었을 시, 작명가가 인재를 배출했다고 주장하는 요설이다.

     

    국호로 지은  '조선'은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처음 언급했고, 경복궁은 신라 교종의 五敎本山으로 경복사(景福寺)가 있었다.  

     

    앞뒤를 안가리고 설치며 광기에서 불교를 배척하였으나, 그 자신은 어려울 때 삼각산 아래에서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친하게 지냈다. 조선이란 국호는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언급되어 우리민족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明나라 역사서인 明史 朝鮮傳 (明史 券 320, 列傳 208, 外國1, 朝鮮列傳)에 '조선은 箕子에게 封國한 곳이다. 漢以前은 조선이라고 했다.'라는 기술에서 알 수 있는 듯 조선은 자기 들이 통치하던 곳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정도전이라면 조선을 국호로 사용해 달라고 했을리 만무하다. 이는 정도전이 이성계 고향 화령을 국호로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명에 대해서도 간신 근성을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다. 심지어 신라시대 사찰명이었던 경복사를 궁궐명 경복궁으로 지었다. 정도전은 그렇다해도 한영우가 그것도 모르고 국사업자로서 혹세무민하는가? 신라 사찰인 경복사란 명칭이 궁궐명 경복궁으로 유전되어 완공되고 왕실은 몇년 못가 궁궐내에서 피비린나는 살육이 있었고, 드디어 폐궁되었다. 

     

    그 자신 또한 천하의 역적으로 각인되어 목숨이 끊기지 않았던가? 경복궁은 흉지 중의 흉지이다. 그야말로 왕조와 자신에게 큰 복을 빌었던 결과였단 말인가? 제아무리 설쳐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을 정도전 자신이 입증하였다. 한영우는 지금도 이를 왕조의 큰 복을 빈다고 주장하는데, 그결과가 정도전 자신의 죽음과 왕실의 살륙행위가 왕조의 큰 복인가? 

     

    정도전 위인화 작업  전문 기술자

     

    모씨는 조선경국전이 마치 조선에서 시행된 것처럼 그 조항을 가지고 조선초 사회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식민사학의 핵심인 문헌고증사학이란 '역사를 위한 역사'로  글을 썼다. 조선경국전은 시행된적이 없기에 조선의 제도가 아니다. "조선경국전"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이란 명칭이 없으면 원나라 "경세대전"과 그 내용이 일치하므로 "조선"이란  명칭을 구태어 넣었다. 전적으로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의 식민사학을 사실인양 되풀이하는 것이다.

     

    태종 때, 조선에서는 체계적인 법전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법전 편찬을 시작하여 수차례의 개정과 수정을 거쳐 성종 때(1484년),"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이를 실시한다. 그러니, 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짐으로서 조선은 바야흐로 체계와 기틀이 마련되게 된 것이다. 

     

    "경국대전"을 제정하는데, 여러 학자들이 동원되어 수정과 개정 과정을 거치면서 수십년이 걸렸다. 정도전 개인 혼자서 언제시작하였는지는 모르나, 최대기간으로 잡아, 정도전이 다른 일 전혀 않하고 전념하였다 하여도 2년에 마친 것이 된다. 이는 법전 제정기간으로 도저히 성립할 수 없으며, 그것도 몇 쪽에 불과하다. 그 당시 조선에서 정도전만큼 바쁜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이상백 한영우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경국전은 원나라의 경세대전의 조항을 베낀 것인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도 원나라 법전인 경세대전을 참고하였기에 조항들이 비슷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을 토대로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앞뒤 전후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의 노림 수에 넘어간다. 그러나,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이런 논리에 현혹되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이 수년간 동원되어 개정과 수정을 거쳤는데 원나라 경세대전 전체를 참고하면 하였지, 출간도 하지 않은 정도전 혼자만이 갖고 있던 필사본 한 부에 의거하였으며 또한 당시 역적의 대명사인 정도전이 짖지도 않고 원나라 경세대전을 허둥지둥 베낀 몇 쪽을 토대로 하였단 말인가?  그들은 어떻게든 정도전 업적으로 내세우려하니 이런 것조차도에도 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의 주장을 토대로 검증조차 안하고 정도전 업적으로 견강부회한 결과다.

     

    조선초 가장 바쁜 사람

     

    정도전은 이성계에 바짝 달라붙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참견하지 않은 게 없다. 못쓸 짓, 쓸 짓 가리지 않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정도전을 많은 업적을 낸 것으로 주장한다. 조선의 사가들은 정도전의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간신배로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원나라 경세대전의 내용은 고사하고 조항(서브 타이틀)만 베끼기에도 급급하였기에 요즘 볼 수 있는 팸프렛 정도에 지나지 않는 분량이다. 이를 가지고 조선의 기틀이 된 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정도전을 위인화 시키기 위하여 조선전체과 우리민족을 농락하는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내용이나 실체를 연구하기는 커녕 구경조차 않고, 이상백 한영우의 주장을 따랐다면 이제라도 구경이라도 하고 말하라! 

     

    정도전이 농지개혁했다는 실체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고려를 뒤엎고 공신전을 차지한 것 이외에 무엇을 개혁하였는지 제시해보라! 농지개혁에 대한 실체는 말 뿐이고 사찰의 토지와 고려 권신의 토지를 빼았아 자신들의 공신전으로 차지 한 것 뿐이다. 그것도 후에는 모자라 제대로 지급도 못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삼국사기는 금경록(고려사)이 이미 있었고, 물론 경제문감 등등 그 자신 혼자 지은 것이 아니다. 권근 등 공동으로 하고, 혼자 지은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권근의 증언(왕조실록)에 따르면 함께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초 4년 외, 간신 역신의 대명사    

     

    왕조실록에는 500여년에 걸처, 정도전을 조선의 간신 및 역신의 대명사로 타이틀만도 100여 번 이상 걸쳐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정도전이 죽은지 수백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자신들 정적을 탄핵할 때에 "역적 정도전을 평소 흠모하였다"는 트집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길삼봉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유언비어로 유포하고 길삼봉을 색출하다며 백수십명을 열거한 후, 전주지역에서 덕망을 얻고 있던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뒤집어 씌워 죽음을 맞게하였고, 허균을 탄핵 할 때에도 평소 정도전을 사모하였다는 이유를 붙였고, 허균은 능지처참당했다. 조선 유학사회에서 정도전은 기피 제1호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슨 조선의 기틀이라니.... 

     

    조선 기틀마련이 아니라 조선얼 허무는 식민사관 주의자들이 내세운 일등공신 정도전

     

    일제는 우리 조선의 얼을 파괴하여, 내선일체에 동조토록하는 정책을 편다. 그 절차로 종교 즉, 신앙을 타파시키고, 조선 선비사회에서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던 인물들 대신에 조선사회에서 간신, 역적, 배신자 등 지탄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현명하게 처신한 위인으로 미화시킨다. 

     

    그럼으로서,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이들을 흠모하여 이들처럼 처신(일본에 합류) 할 것을 주입시킬 인물을 발굴했다. 그 대상자 1호가 정도전이고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조선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나, 조선 유학사회 선비들로 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경원시 되던 인물들이다.

     

    조그만 조직도 어느 한 명에 의하여 이뤄지는게 아니다. 하물며 국가가 어느 특정 1인에 의하여 기틀이 마련될 수 있는가? 

     

    종교(신앙) 힘이 두려워

     

    일제는 이미 임진왜란시 승병과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익히 알기에 불교가 내선일체에 큰 걸림돌이라는 걸 잘 알고, 문화정책으로 불교(신앙)를 타파하는 정책을 쓴다. 그 주요 핵심은 신앙적 요소가 없는 유학을 종교로 내세워, 조선의 건국이념이 유교이며, 유교는 조선의 국교라는 이제까지 조선 사회에서 듣던보지도 못하던 종교를 창시하였다. 유학을 유교로 탈바꿈시켜 조선의 종교로 내세운 것이다. 즉, 역설적으로 종교  말살정책을 펼쳤다. 

     

    해방 후에도 이상백 이병도 ㅇㅇㅇ 등이 이를 한결같이 금과옥조로 삼아 주장하여, 온 국민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유교를 종교로 당시 문교부에 등록까지하고 종교단체로 인정하나, 이렇다할 조직이 없고, 기존 유림 조직에 유교라는 명칭을 덧붙이기 한 것이다. 

     

    지금 현재도 성직자 배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도 없다. 신자를 어떻게 모으고, 교육하는지 전혀 종교로서 성립하는 기본 요소를 갖추지 않고 있다. 현시점에서도 유교라 할 때, 이를 종교로 인정하는데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식민사관에 중독된 일제 앞잡이들에게 수학한 국사전공자들은 창피한 줄도 모르며, 당당하게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고 주장한다. 현재까지 일제 식민사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유 안되는 곳이 아이러니컬 하게도 국사업계다. 

     

    왕, 사대부 백성 불교 신봉, 국가 고시로 승려배출  

     

    이성계(태조)는 무학대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자문 받았으며,  왕(태조)이 된 후에는 왕사로 대접하고, 자신이 사찰을 왕궁(회암사)처럼 짓고 거주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딸 옹주도 직접 삭발시켜 승려로 출가시키고, 정종은 아들 15명 모두 승려가 될 것을 권유했고, 세종, 세조는 궁궐안에 사찰을 지었고,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월인석보, 월인청강지곡 등 불서를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조선에서는 승과제도를 두어 고시를 통하여 승려를 국가가 양성하였다. 왕실에서는 수시로 사찰에가 불공했고, 대부분 왕과 왕비의 능 옆에는 원찰을 정하여 그 넋을 기렸다. 일반인들은 물론 사대부들도 대부분이 사찰에 불공하였다. 사찰에 가보면 그들이 불사(중수)하였다는 기록을 안내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당시 일반화된 종교는 엄연히 불교였다. 유학은 조선의 정치 이데오로기(ideology)로서 유학이었지, 종교가 아니었다.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는 주장은 정치학 사회학 종교학 기본지식 결핍자들이 식민사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불치의 증세다. 이 증세는 해방 후에도 사이비들이 전파시켜 전국민에게 감염되었다. 

     

    유학을 유교로 탈바꿈, 조선 국교, 유교의 허구

     

    그러니, 유교가 국교 운운하는 자체는 지적 장애자들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모씨는 글을 통해, 일관되게 조선의 국교는 유교라면서, "유교사회"를 빼면 글을 못쓰는 금단현상을 보인다. 그래도 잘 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성립조차 안되는 글로 혹세무민하고 있다.  유학은 이미 신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도전이 생존하던 고려말에도 유학이 정치이론의 대세였으며, 그럼에도 불교는 종교로서 존재하였다.

     

    외국의 역사 입문서는 역사가는 반성하여야 한다고 쓰고 있다. 혹, 시대의 해석이 잘 못되면, 이를 수정하고, 반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갖춘이가 역사가라고 쓰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모씨는 역사가가 절대 아니며, 제대로 된 역사 입문 기본서도 안 읽고 정치적 시류에 곡학아세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학자라는 사람이 유학과 유교의 개념 구분 못해   

     

    모씨의 글을 보면, 조선사회를 언급하면서, 수 쪽에 걸쳐, 매 문장 시작을 "조선은 유교사회"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한심한 것은 유학과 유교의 개념을 전혀 구분치 않고, 상호혼용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유학을 유교로 변형하여 쓰고 있음을 자승자박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유학과 유교의 개념조차 구분 못한다. 조선시대에서 발간된 서적 내지 실록을 보면 儒敎라는 단어 자체가 없으며, 儒學 내지 약칭하여 儒로 표기하였다. 그 시대 일본조차도 儒敎라하지 않고 儒學 내지 儒家라 썼다.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는  1923년에 조직된 일제강점기에 유교단체로  조선 전체의 유교를 조직화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실제로는 친일 단체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고 기록된 자료는 일체없고, 혹 근거라면 조선이 망해가며 몸부림치던 고종 말기에 흩트러진 기강을 잡고자 유학을 조선의 기강으로 한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조선의 국교가 유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언급을 기본으로 하는 가보는데 이 공표를 하고 이윽고 조선은 망했다. 대한민국 국교가 "民主敎"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도 비논리적이다. 우리 헌법 1조에 분명하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 국가는 정치이념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질서를 민주주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며, 공교육은 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교가 "민주교"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선에서 유학은 국교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정치이념으로 사회질서의 근간이며 추구하는 이념으로서 학문이었지 절대로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데오로기와 종교를 구분 못하는 수준의 식견으로 사회학(국사) 전공 교수이며 학자로서 생존해온 방법을 유추해 보면 어이가 없다.   

     

    문집은 사후 제자 및 후손이 미화하여 발간되는데,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은 생존시 발간된 것으로 되어 신뢰성 의문  

     

    문집은 저자가 편찬한 것이 아니라 후손 또는 후학들이 사후에 자기 선조 내지 스승을 그리기 위해 통상 미화되어 발간된다. 그래서 신뢰성의 문제을 남긴다. 삼봉집은 정도전이 생존해 있을 때 쓰여진 필사본으로 수백년 후에 목판으로 간행된 사례는 다른 문집에는 없으며 문집이 생존시에 발간되는 것은 정도전의 삼봉집 밖에 없다. 그러니 그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원래 삼봉집에는 권근의 발문이 없는데, 권근이 발문을 썼다고 주장하여 현재 재편집된 삼봉집에는 권근의 발문이 넣어있다. 

     

    이처럼 모씨는 정도전을 미화하기 위해 당시 그야말로 학자이자 영의정으로 조선의 기틀마련에 지대한 공로자 권근을 어떻게든 끌어 들여 정도전 미화에 급급하였다. 

     

    어느 드라마 작가는 왕조실록을 열번을 읽었다고 자랑하지만 무식을 드러내는 것 같아 무척 민망하다. 실록 열번 아니라 백번 읽으면서, 상술이 앞서 실록과 정반대로 드라마에서 실록을 들먹여 무엇하나, 소설을 논해야 할 것이다.    

     

    이런한 오류는 이상백 이병도 모씨가 국사학계에 뿌리박고 좌지우지 한 결과다. 번역이 무엇인지 기본양심마저 조차 저버린 이들의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식민사관자들

     

    일제시(1934년경), 이상백이 원고를 작성하고 차마 발표할 용기를 못내 망설였는데, 이병도 손진태가 이상백을 부추겨 진단학보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왕 내침김에서인지, 이상백은 "조선문화사 연구"에서 고려말의 대학자들을 폄하고 정도전을 유학의 대가로 설정하였는데, 그 중심 논리가  정도전만큼 불교를 배척한 이가 없다는 데서 찾는다. 그 근거로 불씨잡변을 들고 있다. 유학의 본질을 불교 배척으로 보는 이상백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읽고 연구하였는지 윤사순은 현재도 불씨잡변을 성리학의 시발로 주장한다. 불씨잡변에서 주장하는 불교비판은 이미 주희가 주장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으면서도  정도전 자기가 주장한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니 수박 겉 핱기 식으로 알면 속아 넘어간다.

     

    물론 당시 불교는 불승의 그릇된 행위로 타락하였다. 그 결과 고려 사회가 혼란에 빠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사상면에서 불교 교리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불승의 타락으로 사회의 타락된 부분을 고치자는 주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이 땅에 유학의 기틀을 마련한 유학의 대학자 목은을 불교를 옹호했다고 비난한다. 당시 불교는 사회전반에 걸처 종교로서 보편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백은 앞의 책에서, 유학발전 계기를 마련한 선현 안향, 유학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이제현, 유학의 대학자 목은 그리고 목은이 유학의 비조로 칭한 정몽주 등 유학의 대가들을 일일이 거론 한 후에, 이들 거유(대유학자)들을 폄하하여 정도전보다 하위로 치부하였는데, 그 방법이 치졸하기 그지 없다. 여기서 이상백의 인간성을 측정하는 좋은 자료이다. 

     

    프랑스 시인이자 대표 지성인 폴 발레리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구성 요소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불교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는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에 찬성한다. 세계 질서의 혼란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는 불교다. 세계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게 되건 불교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우리들, 문명들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도덕적 붕괴나 사회적 해체는 옛 제국들이 파괴될 때에도 일어났다.'

    불교가 종교인지 모르는 서울대 교수       

     

    그 때나 지금이나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의 대상이다. 정도전은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의 필요성 개념조차 전혀 무지인 사상 측면에서 불씨잡변을 썼다. 불씨잡변에서 윤회설을 가지고 논하는데 낙엽이 지고 새로나온 잎이 어찌하여 지난 가을에 떨어져 썩은 잎이냐며 윤회설을 부정하는 좋은 거리로 잡설을 늘고 있다. 신앙을 어설픈 이치로 검증하려는 취지는 기특하지만 신앙의 개념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임이 틀림없다. 현대과학은 오히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질량불변의 법칙과 어너지보존의 법칙으로 답하고 있다. 

     

    정도전이 주장하는 유학이 지금 이 시대에서 현대인에게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유학이 현대를 유지하여 갈 수  있겠는가? 정도전의 사상적 지식수준을 가름할 수 있다. 자신의 태생적 콤프렉스에서 발광하는 폭언으로 비춰진다. 정도전 외할아버지가 중이었다. 그 중이 절 여노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가 정도전 어머니라고 전해졌다. 또한, 자기 아비인 정윤경이 봉화에서 서울(개성)가는 길에, 단양 우현보 집 근처에서 비를 피하려 초막에 들어 가있었는데, 마침 비를 피하려 들어 온 우현보 집 여종(사찰 승려와 사찰 여노비에서 태어냄)을 희롱하여 낳은 이가 정도전으로 이름을 길가다 전해지게 되었다하여, 길 道에 전할 傳으로 道傳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출생 연도가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출생사실을 숨기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죄가 정도전에게 현실을 적개심으로 지내며, 권력에 빌붙어 아첨하며 지내다 결국에는 타살되고 말았다. 

     

    정도전의 경우는 당시 종교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 못하던 시대였으나, 현대에 살면서 사회학 전공 서울대 교수인 이상백이 종교개념 없이 불교를 보았다는 것은 학문을 떠나, 한 자연인으로서 그 행동거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저술당시), 불씨잡변을 반박한자가 없기에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학문하는 이의 논리가 아니다.

     

    자기보다 훌륭하면 막가파 살해, 사창가에 정려문   

     

    정도전이 유학자며 사상가란 주장은, 유학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면 그렇 수 없다. 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 인 의 예 지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정도전 분장 기술자들은 이 고려국사를 위대한 업적으로 든다. 고려사도 이미 목은과 이인복이 함께 편찬한 금경록(고려사)이 나와 있었으므로, 이를 베끼지 않고는 단시일내에 혼자서 편찬했다는 것은 당시 정도전의 시간상으로 볼 때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도전 미화에 훌륭한 사료로 든다. 당시 폐기처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은사며 은인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룬다.

     

    정도전의 후학이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후학이 없는 이유는 조선에서 정도전을 거명만 하여도 역적으로 몰리었는데 후학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니? 정도전은 유학을 글로 쓰고 말로 하였으나, 행동은 유학과 정반대였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콤프렉스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전혀없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 자기에게 불리한 기존질서를 타도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걸 감추고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의 포장지는 유일하게 유학밖에 없었다. 지금도 포장의 달인 정치인들이 나라를 혼란시키고 있다. 

     

    돌보는 이가 없어, 당시 대유학자 목은이 친구의 자식이라는 인연으로, 자신의 아들과 함께 키워주고, 자신의 문하에서 당대 기라성같은 이들인 길재 이숭인 권근 하륜 박상충 등등과 함께 공부시키고, 성인이 되었을 때는 정몽주의 원나라 수행에 추천하여  공직에 첫 걸음을 내딛게 하였으니, 자기 부모 이상이며,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이유없이 목은의 두 아들인 이종덕과 종학을 귀양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귀양가는 길에 매질하여 죽이고, 어려서 자기보다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은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이숭인을 죽이고, 그 칭찬을 했던 하늘처럼 모셔야 할, 은인이자 스승인 목은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며 두 번이나 죽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이성계(태조)가 이를 받아드리지 않자, 종국에는 독약 탄 술을 선물로 가장하여, 기여코 살해 하였다. 어느 부분이 유학의 본질과 합치된다는 소리인가? 이런 자를 대유학자라니, 사창가 여인에게 정려문 세워주는게 훨씬 교훈적이라 할 것이다.

     

    정도전의 조선 기틀 마련은 이렇게 

     

    이처럼 막가파 정도전 살륙행위는 어디 그뿐인가? 자기의 과거를 안다는 이유로 여러 가문 특히 자기 어머니가 종으로 있던 당시 명문 우현보 가문을 박살 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으로,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하로서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여 이성계가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게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계략에 적극 동조함으로서 이성계의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해 주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켰다는 내용은 재평가 되어야 한다. 단, 이성계 일파의 음모를 모르고 있다가, 자신이 살해당하던 날 이성계의 본심을 살피려다 정도전 이방원 일당에게 역습당한 것이다. 

     

    정도전은 귀양지를 전전하던 중, 통진(김포) 귀양지에서, 더 이상 출세 길이 막힐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아오는 죄과들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당시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명성도 있던 함경도 주둔의 이성계에게 찾아가 구테타를 이르키도록 부추겨 이윽고 이성계가 구테타를 결심하게 하고는, 왕위 계승에 대해 그동안 잠잠히 있고 있다가 이 때 정몽주는 이들 편에서서 이들을 도왔다. 계속 시비를 걸며, 기회를 살피다가 위화도 진군 명을 기회로 이핑게 저핑게로 진군을 미루다가 이를 군사동원 기회로 이용하여 진군하는 척하다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케하고, 이성계의 상관인 군 총사령관 최영장군을 투옥 시키고, 급기야 사형시킴으로서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그러고는 이성계에 찰거머리 이상으로 딱 붙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설치며 나서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정도전이 아니었으면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정도전의 살륙행위는 자신이 온전히 권력을 획득한 후에도, 대항은 고사하고 반항의사가 전혀없는 상태였음에도 스승이고 은인이고 가리지 않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기여코 살해해 없애 버렸다. 

     

    이러한 행위를 들어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했다느니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면 그런대로 말은 되나, 조선경국전 경복궁 운운하는 것은 사이비들의 요설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도전이 그나마 약간 거론되는 때는 정조이고 그 후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 작업으로 경복궁을 재건하고 조선의 전통성을 찿으려했다. 그런데 경복궁을 재건하고 나니 경복궁이란 명칭을 정도전이 작명하였기에, 역적인 정도전을 찬양하는 결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경복궁을 완공하고 궁을 옮기는 바로 전날 밤에서 대원군은 정도전에 대한 제사를 올려 줌으로서 역적 흠모 논란에서 벗어나려했다.   

        

     

    정도전만 조선건국 1등 공신처럼 기술하나, 1등공신은 17명 + 3명 도함 20명 

     

    한영우는 1등공신이라고 강조하는데, 그 당시 1등공신이라고 이성계에 의하여 선정된 자는 17명이었으며, 정도전의 주장으로 이방원과 이방의 이방간은 이성계의 아들이라 빠졌으나, 그 후 정종에 의해 이들이 추가 되어 모두 20명이다. 그럼에도 1등공신이 마치 정도전 혼자인 것인 양,  다른 이들은 언급조차 안하는데 이는 혹세무민의 전형이다.

     

     

    1등 공신,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20명이다.

     

     

    이방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전의 공헌도를  등수로 치면 7등에 해당한다고 왕조실록에 있다. 이런 정도전이기에 이를 뒤엎을 위인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어설피 해서는 결코 안되기에 이를 적극적이고 확고하게 미화하여야 하였다.

     

    사상가요, 철학가요, 유학자요, 정치가요, 혁명가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온갖 훌륭한 능력을 가진 자로 분장시킨 것은 식민사관에 중독된 분장 기술자들의 작품이다. 

     

    정도전의 인간성을 전혀 무시하고, 오히려 위인화하여 조선의 기틀과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유학의 대학자라고 주장하니, 그들의 정신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그들의 학문을 논하는 것이 순서라 하겠다. 국사업계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교육하고 있으니, 과연, 국사교육이 누구를 위해 교육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처럼 우리가 배격하여야 할 인물을 훌륭한 인물로 설정하는 국사교육은 폐지되어야 한다. 지금 국사교육의 축소내지 폐지에 적극 찬성한다. 

     

    이런 자는 기존질서 타도의 선동자로서, 더할 나위없기에, 일제시에는 일본이 조선얼 말살과 내선일체 협력에, 해방 후에는 조선왕정 복귀에 대한 이승만의 두려움 불식시켜야 했다. 또한 1948년 정부가 수립되었던 당시 전국 농가는 200만호. 자기 땅이 전혀 없는 완전 소작농이 49%, 약간의 토지를 갖고 소작을 병행하는 농민이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였다. 농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정도전의 경자유전 (耕者有田) 원칙을 내세워 명분을 마련하였다.

     

    유상몰수·유상분배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절묘하게 조합한 조봉암 장관의 농지개혁안은 성공했고, 신생 대한민국은 사회안정 토대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그 때의 논리가 정도전이 고려를 무너드리는데 써 먹었던 경자유전 원칙으로 헌법에 명문화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 121조와 농지법으로, 농업인과 농업법인만이 농지를 소유하게 하고 있다. 지금 시골에는 빈집과 버려진 밭이 널려있다. 그럼에도 이 경자유전원칙이 수차례 헌법을 개정하면서도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은 전혀 세태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은 프로레탈리아 혁명의 선구자로 기득층의 재산 몰수를 , 5.16 군사 구테타시에는 기존질서 및 기존 정치인 타도와 구테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도전을 등장시켰다. 이처럼 정도전은 우리 현대사에서 질곡이 있을 때마다 등장되며, 현제까지도 기존질서를 부정하려는 자들의 흠모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식민사관을 신봉하는 학자 탈을 쓴  위장 기술자들의 작품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은 정도전을 역적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왜 그렇가?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 질서를 엎어버리는 자로서 프로레탈리아 혁명가로 적격이지만 안정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써먹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역적으로서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최고 엔터테인먼트 주인공

     

    이처럼 위장된 정도전은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서 이를 능가할 인물이 없기에 드라마 소설 그리고 상업적 돈벌이 책에서는 최고의 주인공이다. 작가 PD 출판업자 국사업자들이 이야기 거리가 시원찮으면 정도전을 소재로 재탕 삼탕을 시도한다. 학자(?)라는 이들이 논문이랍시고, 발표해 놓았으니, 권위가 있어좋지 않은가? 감히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지금 우리는, 정치집단의 하수인들이 정도전을 위인으로 만들어 전파시킨 줄도 모르고,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왔다. 

     

     

    일제시, 일본에서 가장 출세한 조선인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상백은 시인 이상화의 아우이며 대구지역에서 내놓라 하는 대지주의 아들로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와세다 제1고등학원과 와세다 대학 및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의 지원아래 중국 남경대학 대학원에서 동양사학을 2년 6개월 전공하였다. 여기서 이상백이 남경대학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연구한 목적이 무엇인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 그 후 일본 농구계에 진출하여 일본 체육회 임원으로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르린 올림픽 때는 상무이사로 있었으며, 전무이사까지 지냈으니, 조선인 출신으로서 일본사회에서 활약한 최고의 거물이었다. 그 공로로 사후 일본정부로부터 3등 욱일중수훈장을 받았다. 

     

    독립군 토벌하던 일본군 하사관 출신, 5.16 군사혁명정부 혁명재판소 감찰부장   

     

    이상백의 형은 시인 이상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항일 시를 발표하였는데, 그 아우 이상오는 함경도 출신의 일본군 하사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와 근접한 부대에 독립군 토벌에 참가한 박창암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에도 의구심이 남는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신분에서 5.16군사구테타에 생도들을 동원한 공으로, 군사혁명정부 혁명재판부 감찰부장(대령)이되었다. 당시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생사가 갈리는 그런 위세를 가졌다. 

     

    박창암이 5.16군사 구테타는 정당성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던 차에 자기 장인의 형(처숙)인 서울대 사회과 교수 이상백에게 부탁, 이미 일제시 내선일체 협력에 써먹었고, 대한민국 건국에도 활용된, 고려를 뒤엎은 정도전의 행위를 리바이블하여 이들의 당위성에 합치하도록 부각시켰다. 앞에서 언급 바와같이, 이로서 혁명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위장된 정도전이 일반인에게 요지부동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5.16 군사 구테타 당위성으로 정도전을 미화 찬양, 발간사가 주 목적

     

    박창암은 박정희를 이성계에 비유하고 자기들 즉 5.16 주체세력을 정도전에 비유하였으니, 정도전을 가일층 미화하기에 이르렀다. 5.16군사 정부는 구테타의 당위성으로, 이상백의 자문에 의거 정도전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정책을 펼친다.

     

    그 일환으로, 혁명정부는 이상백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하고 문교부 관할인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석호가 정도전 문집인 삼봉집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는데, 구테타가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났고, 그 문집을 연말에는 재판까지 간행하였으니, 얼마나 급박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국사편찬위원회가 순한문으로 문집을 재판까지 간행한 것은 정도전의 삼봉집이 유일무이하다. 번역할 시간조차 없어, 순 한문으로 문집을 발간했으니 몇 명이나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가?

     

    그야말로 발간사만이 발간의 목적이었다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그 발간사를 토대로 정도전에 대한 모든 글들이 나오고 있다. 거듭 말해서, 한문을 별도로 전념하여 수 년간 공부하지 않은 이는 절대로 본문을 읽기조차 못하니, 이해는 어림없다.

     

    그러나, 발간사만은 국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도 이해할 수있게 하였는데, 당시 문교부장관 문희석(당시 해병대 현역 중령) 이름으로 하였으나, 실은 이상백의 글로, 정도전을 미화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은 정도전을 미화한 발간사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발문은 국사편찬위원장인 신석호 이름으로 썼는데 앞의 서문과 마찬가지로 찬양일색으로 에마츠 야스카즈가 주장한 조선경국전이 조선건국의 기초를 닦고 기틀이 되었다는 글로 도배되었다.  

     

    한영우는 쓰에마츠 야스카즈 이상백과 신석호의 미화 찬양된 이 발간사를 근거로 현재까지도 정도전을 미화찬양하는데서 나아가 우상화 작업의 바이블이 되고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백은 서울대 석.박사학생들에게 정도전 연구를 장려하였으며, 한영우는 "정도전사상"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없는 생소한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고, 서울대 교수가 되어, 정도전사상연구소 소장으로서 열정을 보이며 정도전 미화 작업자로 나섰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박창암은 한 때, 반혁명자로 몰리기도 하였으나, 자신이 주도가 되어 정도전을 영웅으로 미화하는데 성공하면서 역사조작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말년까지 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출판사를 하며 허무맹랑한 한단고기를 사실화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가 작고하였다.   

     

    우상화 기능장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역대 인물 중, 사상가라고 일컫는 이는 원효 의상 퇴계 정도이다. 원효 의상 퇴계가 불문 내지 학문에 매진한 기간이 얼마인지 아는가? 정도전은 학문에 매진한 기간은 당시 유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수학 기간뿐이다. 사상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 지느게 아니다. 누가 그럴 듯한 말했다고 해서, 그를 사상가라고 하는가? 우상화 작업자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씨는 "정도전사상"이라는 금시초문 기절초풍의 용어를 탄생시켰다. 사상연구라면 철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학위를 받아야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전공한다는 이가 역사학과에서 이를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병도는 같은 국사 전공자라 하더라도 조선 중기 전공자가 조선 초에 대한 글만 써도 호통치는 사람인데, 철학 전공으로 국사과에서 박사논문을 썼는데도 학위를 주다니 말이나 되는가? 한영우는 박사학위가 절박하여 그렇손 치더라도 국사과 교수이며 대학원장인 이병도는 뭐 했단 말인가? 자신의 전공이 어느 학문(학과)에 해당하는지 알기나 하는가? 당시 서울대나 다른 대학에는 철학과가 없었던가? 어떻게 사상연구를 역사과에서 박사학위를 줄 수 있는가? 그러니 그 연구논문이라기 보다는 소설에 불과하다고 밖에, 그러서 그런지 한영우는 장소불문 시간불문으로 줄기차게 정도전을 미화시키는데 앞장서며 곡학아세 하였다. 조선 기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 중의 한사람인 권근을 정도전 제자로 만드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은 그가 조선 선비를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조선 선비 중에 몇 명이나 정도전을 존중했는 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 제시해보라! 

     

    정도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권근이 목숨을 걸고 명에 갔다 살아 돌아오는데, 오히려 그를 죽이라고 상소하는 정도전

     

    한영우의 정도전 찬양 글은 도를 넘는다. 국초에 정도전이 쓴 표전에 대해 명나라는 정도전을 보내라하는 일대 사건이 있었다. 정도전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갈리가 만무하다. 이 때 권근이 정도전 대신 가서 굴욕적인 제안으로서 정도전의 목숨을 건졌지만, 이 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의 굴욕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건져준 권근이 조선으로 돌아 온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정도전은 권근을 죽이라고 이성계에게 상소하였다. 권근이 자기 대신 명에 가서 살아 온다니 권근의 지위가 자신보다 높아지고 자신에 대한 비겁함이 명약관화할게 아니가? 어떻게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흠집을 내야 속이 후련한 정도전의 인간심리를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자신을 살리려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가서 살아 돌아오는 권근을 죽이라고 상소하다니 이런 행실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과연 이런자를 존경하여야 하는가? 한영우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전문을 지은 권근의 탓으로 돌리고 오히려 정도전을 찬양하는 논문을 쓴다. 실록 원전을 꼼꼼히 살피며 궁극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한영우의 말에 넘어 갈 수 밖에 없다. 명에서 문제 삼은 것은 전문이 아니라 정도전의 표문이다. 이를 쓴 정도전을 보내라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세종대왕 이순신장군도 이처럼 지속적으로 연구한 이는 없다. 정도전이라는 팽이를 계속 치지 않으면 더 이상 돌 수 없기에 계속 채찍하는 것은 아닐가? 정도전 전용 분장 기술자가로 자처하는 데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분명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문화훈장 받고, 일제시 충성 댓가 일본욱일중수훈장 받아

           

    이상백은 1963년 대한민국 건국문화훈장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일제시 공로로 3등 욱일중수훈장이 수여되었다. 건국문화훈장은 조카사위인 박창암에 의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이로서, 일제시 일본정부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니, 사후라 하더라도,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자가 일제 강점기 일제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건국훈장은 당연히 박탈되어야 한다. 이상백이 국사 내지 사회학자 이전에 국가관은 무엇인가? 그건 개인사라 제처두고라도, 그런 자를 떠받들며 그의 주장을 금과옥조로 삼는 서울대 출신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행태가 바로 현 국사업계 종사자들의 모습이다.  

     

    국사업계 엉터리들 

     

    일반인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주입식 국사를 배우는 것을 끝으로,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흥미위주로 각색된 픽션으로 국사지식을 쌓아 갈 뿐이다.  설령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한 자라 할지라도 원전에 기초를 두지 않고 쓰에마츠 야스카즈 이상백 이병도 한영우 등이 발표한 2차 자료를 인용하고 그 인용된 자료를 3차 4차 이렇게 간접 자료에 의한 연구는 연구로서 가치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문을 왜곡하여 악영향을 미치므로 이런 연구는 없어져야 한다. 미화된 거짓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나아가 미화된 거짓을 점점 덧붙혀가니 원래 역적애서 위대한 위인으로 가공된 정도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 서울 대 출신의 어느 교수의 글을 보자!

     

    "정도전의 척불은 반대세력에 대한 반격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이색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정도전 개인에게 있어서 이색이나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핵심적인 인간관계만으로부터 이탈을 뜻하였다. 이 때문에 인간적인 비난이 없지 않았고, 오랜 친구들과 결별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私情을 버리고 대의명분에충실한 유자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 글은 연세대에서 발행하는 "동방학지"에 실린 것이다.  정도전이라면 그 변이라도 삼킬 기세가 아닌가? 그러나 세자책봉과정에서 정도전은 사욕으로 적장자가 아닌 왕자를 세자로 추대하여 주자성리학의 핵심인 종법(宗法)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유자의 심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 仁이 아닌가? 요즘 맹자를 언급하며 왕도정치를 주장하는데 왕을 교체하는 것이 맹자의 핵심인양 떠들어 대는데, 이는 정도전의 광신도이다.   

     

    금단현상 극복 

     

    이처럼 원전에 의거하지 않고, 정도전을 연구한 자들은 이 글이 얼토당토치도 않고, 엉둥한 거짓을 끌어들여, 거짓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에 대한 당시의 입증자료로서 기술한 것이므로, 일단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하여도, 이는 전적으로 앞서 열거한 악성 바이러스 중간 숙주들이 국사계를 선점 하고 독점체제를 유지하며 악성 바이러스를 전파시킴으로서 이에 감염되어 자각증세가 마비된 결과이다. 무려 80여년간 감염된 증상을 극복하는데는 분명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그 금단현상은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흥분과 긴장 속에서 지켜보련다. 

     

    역사는 어느 특정한 한사람에 의하여 이뤄지는게 아니라, 묵묵히 일한  훌륭한 다수의 선열들에 의하여 이뤄져왔다. 그들의 얼을 발굴하여 사표로 삼아야 한다. 

     

    백성을 위한다는 그렇듯한 구호를 앞세워, 자신의 그릇된 복수심에서 끝없는 권력을 추구하던 패륜아의 당연한 죽음을 우상화하는 것은 우리인류에게 교훈적 내지 교육적 측면에서 크게 잘 못되었기에 바로 잡을 필요성이 있다.  

     

     

    결론적을 말하면, 정도전은 자신의 처신으로 인하여 타살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초를 제외하고, 조선왕조 510년 동안, 간신, 역신의 대명사로 가장 많이 조선의 역사서에 기록된 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백성을 위한 다는 이름으로 야비한 행동을 하면 그 것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다는 인류가 추구하여야 할 참된 진리"를 그 자신이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이것 하나만큼은 정도전 스스로, 명백하게 입증하여, 우리 인류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