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이 글 쓰는 목적은 미래 세대가 선조의 숭고한 정신과 행동들을 본받아, 선조의 얼을 받들어 더더욱 훌륭한 일들을 사회구성원에게 베풀도록 하는 데 둔다. 우선먼저, 이 기준에 판단할 때, 일반에게 왜곡으로 미화되어 잘 못 선정되었기에, 혹 이런자를 후세가 존경하고 본받기라도 하면 국가 사회의 불행을 야기할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를 제거하는 차원에서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연구할 때, 그 사건의 전후관계 흐름 전체를 특히, 인물사의 연구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출생 배경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걸친 행위들을 인간(행동)심리, 사회심리, 조직행위, 시민정서, 국가관, 종교 등에 입각하여 전반적으로 통찰하여야 한다. 단지, 개별적으로 어느 단면 행위만을 떼어 고찰하고, 이를 합쳐 놓는 연구는 올바른 인물 연구라 할 수 없다.
그동안 정도전에 대한 논의는 인물사 연구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거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생애 전체를 통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고, 정도전의 업적을 개별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집계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런 방법은 인물사 연구에서 개인을 미화하거나 아니면 폄하하는데 유효하게 쓰일지언정 진정한 연구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정도전에 대한 생애 전체에 대해 특히, 그가 생존했던 고려말과 조선초의 역사서를 근간으로 앞서 열거한 제 학문분야의 요소들에 반추하여 종적 횡적의 입체적 conjoint 분석으로 해석하는 연구방법을 택한다.
그러므로, 정도전의 출생배경, 성장과정, 학문적 배경, 출세 배경 및 권력을 잡은 후의 그의 행동과 그의 죽음 및 죽은 후의 평가 등에 이르기 까지 정도전 생애를 전체적으로 고찰하고, 그가 조선인에게 미쳤던 영향을 살펴 볼 것이다. 한편, 이미 이상백 한영우가 주장하는 정도전 연구에 대한 냉철한 비판도 함께 함으로써 그동안 미화되어 잘 못 알려졌던 정도전에 대한 허구성도 찾을 것이다.
당시대의 문헌에 의거 고찰하므로, 정도전이 난을 일으켜 타살된 역적이었기에, 옛사서에 편견으로 흘러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가급적 제거하기 위하여 앞에서 열거한 제 학문에서 취급되는 요소들을 동원하여 투찰하였어도 그 한계성은 존재한다.
글의 문체는 일반인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중수필 형식을 취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기틀 붕괴에 정도전이 제격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기틀을 잡은 이로 알려졌다. 처음 이러한 주장은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일본인 쓰에마츠 야스카즈 교수에 의해서다. 그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이씨조선왕조의 최초법전으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추측성 서술형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서, 조선은 이씨왕조라고 하지만, 실은 정도전이 건국하고 기틀을 마련해 놓았으니, 이씨조선에 충성 할 필요없이, 정도전처럼 망해가는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일본)에 참여하라는 메세지였다. ( 주: 이 때 부터 이씨조선 즉, 이조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됨)
일제 강점기 이상백이 진단학보에 "이조건국에 관한 연구"라는 논설에서 이를 더욱 강화하여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정도전에 대한 연구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언급조차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왕조 복귀 불안감 해소하고 건국이란 일거 양득의 정도전 등장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고 패전국이 되자, 이상백은 조선(한국)으로 돌아 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해방된 조선이 맥아더 사령관하의 미군정하에 놓이게 되자, 이승만과 임시정부 사람들은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공인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일본을 왕조로 유지하게 한 것처럼, 우리 나라도 일본 침략이전의 조선왕조로 복귀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조선왕조 복귀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왕조를 폐기하고 건국이라는 용어가 필요했다. 시류의 영합에 뛰어난 이상백은 이승만의 이러한 고심을 간파하고 그 자신이 일제시 조선얼 파괴공작으로 내밀었던 정도전 전략을 이번에는 조선왕조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도전에 의한 조선건국 논리를 등장시켜 일거양득 전략을 꾸몄다.
이러한 이유로 이상백은 그간 더 이상 거들떠 보지 않던 정도전을 다시 들고 나왔다. 국민들의 조선왕조에 대한 향수를 불식시키기 위해, 영친왕을 일본에서 귀국 못하게 하고, 1947년 "조선문화사연구논고"를 발표하면서 한 껏 미화시키기 위해 유학의 대가 건국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뒤질세라 이병도는 1948년 국사대관에서 이상백의 허무맹랑한 앞의 주장을 근거로 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역사서에서 "정도전 난" 또는 "무인년 난" "방석의 난" 기록들을 멋대로 "제1차왕자의 난"이라는 용어로 둔갑시키고 박포난을 "제2차왕자의 난"이라 칭함으로서 조선왕조를 희롱거리로 만들어 한일합방 전의 상태인 이성계에 의한 이씨 조선왕조로의 회귀를 차단하기 정도전의 조선 건국을 가일층 부각시켰다.
이들은 건국이라는 데에 촛점을 두고, 정도전을 위인시하는데 그쳐기에 수양대군을 제3차 왕자의 난, 연산군시 중종반정을 제4차 왕자의 난, 광해군시 인조반정을 제5차왕자의 난으로 칭하지는 않았다. 그 논리라면 제3차 제4차 제5차 왕자난으로 표기함이 마땅하다.
조선(이조)이 망한 시점에서 조선 망국사가 아니고 "이조건국의 연구"라니
이상백은 1946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교수로 지냈는데, 한 나라가 망하면 그 이유에 대한 망국사를 연구하는 것이 역사나 사회학을 전공한 이의 임무이자 사명이다. 그럼에도 조선이 망했는데, 망국사는 커녕 이조 건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학자로서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사회학 교수로서 오백년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본질 무엇인가? 역사학과 사회학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래서 인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연구한 조선망국사가 나오지 않고있다.
이번에는 5.16 군사 구테타의 당위성으로 정도전을 활용
이승만의 정부가 확고히 자리하자 더 이상 정도전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61년 5.16군사구테타가 발발하였다. 5.16군사 구테타가 국민들로부터 당위성을 인정 받지 못했하자, 구테타 주역들은 안절부절 하였다. 이 때 절묘하게도 군사 구테타에 적극 협력한 당시 육사생도대장(대령)으로, 함경도 출생 만주일본하사관학교출신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창암이 이상백의 조카 사위였다. 박창암은 군사정부 감찰부장이 되어 국민의 생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건희 삼성회장 장인으로 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성대 총장이던 이선근은 사형선고을 받고 극적으로 소생하여 3공화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였으나, 미군정 농림부장 성대 단대 총장과 참의원을 지낸 이훈구는 옥사했다.
이상백이 이번에는 5.16군사정부의 권력과 자금지원을 업고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도전의 삼봉집을 수차에 걸쳐 발간(순 한문 재편집)하고 대대적으로 정도전의 조선건국론을 확산시켰다. 이 때를 기회로 을류문화사에서는 이병도 이상백 주도의 진단학회가 집필한 한국사 6권을 발행하였고, 이조건국부문을 이상백이 기술하였다. 이 한국사의 표제는 이완용과 당숙관계(?)인 우봉이씨로 이완용비서를 지내다가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이승만의 비서로 활약한 이병도의 친형인 이병희가 썼다. 이 한국사는 국사업계의 바이블이로 지금까지도 국사업자들의 기본서이다.
1960년대초 서울대 국사과 학부생이던 한영우는 이상백의 논리를 기반으로 박사과정까지 진학하여 "정도전의 사상연구"로 학위 받고, 서울대 교수가 되어 정도전 찬양 노예가 되었다. 학부생 그리고 석.박사 학위과정 학생들에게 논문지도하니, 이상백 이병도 한우근 한영우 등 서울대 국사업자들이 하나가 되어 적극적이고 전략적으로 미화하는 정도전 글이 연구라는 명목으로 또는 방송 드라마 소설 수필 등등의 다양한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당시 군사 구테타에 대한 국민들의 비협조적인 시선을 불식시켜 5.16 구테타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절박함에서, 고려를 뒤엎은 정도전을 미화시켜 5.16구테타의 당위성을 정도전에게 의탁하는 전략이었다.
얼마나, 전략적으로 추진했으면, 강만길은 이상백에 의한 정도전 연구는 해방 후 국사업계가 실증사학을 도입한 큰 성과라고 기슬하고있다. 좌파들에게는 정도전은 위대한 인물로 추앙된다. 그 뿐인가? 최근에 이숙번의 후손이 이숙번을 현창하는 책을 내었는데, 그 책의 주안점은 "제1차왕자의 난에 자기 선조인 이숙번이 큰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니 "제1차 왕자의 난"이라면 이 난의 주동자가 자기 선조인 이숙번 이니던가?
전략적으로 전국민에게 세뇌시켰으니, 국사를 전공한 이들도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조선의 기틀을 잡은 법전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쓰에마츠 야스카즈가 주장한 것을 이상백 이병도 후에 한영우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이성계는 1392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첫 일성이 고려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다고 공포하고, 실지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대외 정식 명칭도 권지고려국사 이성계였다. 그러니, 건국이념이고 뭐고 없었다. 조선의 학자들 하륜 김종직 신숙주 정인지 성상문 조광조 송시열 오윤 한치윤 안정복 정약용 그리고 이상백 선배에 해당하는 최남선 정인보 박은식 등등 기라성 같은 역사학자 어느 누구도 이상백이나 한영우의 논리를 지지하는 문헌은 없다. 그렇다면 이상백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그러니 구차하게 경복궁 이름을 짓고 운운하는 것이다. 이상백 이병도 자기들 편할대로 주장하는 것이 실증사학이란 말인가?
군사정권의 당위성 전략으로 펼쳐지는 정도전 위인화 작업에 서울대 국사과 교수 이상백 이병도 등이 동원되고 한영우가 줄기차게 제창하는데 누가 반론이나 이의를 펼치겠나!
정도전의 미화작업으로 활용된 史實의 虛實, 조선경국전, 원나라 경세대전 조항만 베낀 것
정도전이 1394년에 지었다는 "조선경국전"은 원나라의 "경세대전"의 조항만 베낀 것으로 실제로는 시행할 수 없어, 폐기되었다.
설령 실시되었다고 해도 원나라 "경세대전"을 차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이상백 한영우가 주장하는 정도전이 조선 건국을 설계하고 체계를 잡아 기틀을 마련하였다고하는 정도전 찬양 근간되고 있으나, 그것도 불과 몇 쪽에 불과한 것으로 제대로 된 법제는 고사하고 책의 분량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거기에 더하여, 궁궐 터를 잡고 경복궁이라 하고 근정전 광화문 등의 이름을 작명한 것을 마치 조선 국가 체계를 잡은 것처럼 견강부회하는 요설로 일반인들뿐 아니라 국사를 업으로 하는 이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사실은 무학대사가 궁궐 터를 잡았고, 건물 배치를 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이 설치며 끼어들어,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 등을 작명하였다. 정도전이 경복궁(景福宮) 이름을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고 한영우는 주장한다.
이처럼 한영우가 견강부회하며 정도전을 미화시키는 또하나의 자료이다. 설령, 작명가가 아이 이름 지었다고 하여 그 아이가 훌륭한 인재가 되었을 시, 작명가가 인재를 배출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미 신라 교종의 五敎本山으로 경복사(景福寺), 통도사, 분황사, 부석사, 금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앞뒤를 안가리고 설쳐댔으니, 자신이 광기를 보이며 배척하던 불교의 사찰명을 궁궐명으로 지었다. 정도전은 그렇다해도 한영우가 그것도 모르고 국사업자로서 요설을 피며 혹세무민하는가? 신라 사찰인 경복사란 명칭이 궁궐명 경복궁으로 유전되어 완공되고 왕실은 몇년 못가 궁궐내에서 한민족 초유의 피비린나는 살육이 있었고, 드디어 폐궁되었다.
그 자신 또한 천하의 역적으로 각인되어 목숨이 끊기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왕조와 자신에게 큰 복을 빌었던 결과였단 말인가? 제아무리 설쳐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을 정도전 자신이 입증하였다. ooo는 지금도 이를 왕조의 큰 복을 빈다고 주장하는데, 그결과가 자신의 죽음과 왕실의 살륙행위가 왕조의 큰 복인가? 결과적으로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정도전이 살해되지 않았다면 결코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의 큰 복이란 말인가?
정도전 위인화 작업 전문 기술자
모씨는 조선경국전이 마치 조선에서 시행된 것처럼 그 조항을 가지고 조선초 사회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엉터리 글 쓰기 하였다. 조선경국전은 시행된적이 없기에 조선의 제도가 아니다. "조선경국전"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이란 명칭이 없으면 원나라 "경세대전"과 그 내용이 일치하므로 "조선"이란 명칭을 구태어 넣어 부르고 있다.
태종 때, 조선에서는 체계적인 법전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법전 편찬을 시작하여 예종 때 완성하였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어, 성종 (1484년)이 공포하고 실시한다. 그러니, 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경국대전이 만들어짐으로서 조선은 바야흐로 체계와 기틀이 마련되게 된 것이다.
"경국대전"을 제정하는데, 여러 학자들이 동원되어 수정과 개정 과정을 거치면서 수십년이 걸렸다. 정도전 개인 혼자서 언제시작하였는지는 모르나, 최대기간으로 잡아, 정도전이 다른 일 전혀 않하고 전념하였다 하여도 2년에 마친 것이 된다. 이는 법전 제정기간으로 도저히 성립할 수 없으며, 그것도 몇 쪽에 불과하다. 그 당시 조선에서 정도전만큼 바쁜 사람은 없었다.
조선초 가장 바쁜 사람
정도전은 이성계에 바싹 달라붙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참견하지 않은 게 없다. 못쓸 짓, 쓸 짓 가리지 않은 그야말로 많은 일들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ㅇㅇㅇ는 이런 정도전을 많은 업적을 낸 것으로 주장한다. 조선의 모든 사가들은 정도전의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간신배로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원나라 경세대전의 내용은 고사하고 조항(서브 타이틀)만 베끼기에도 급급하였기에 요즘 볼 수 있는 팸프렛 정도에 지나지 않는 분량이다. 이를 가지고 조선의 기틀이 된 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정도전을 위인화 시키기 위하여 조선전체과 우리민족을 농락하는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내용이나 실체를 연구하기는 커녕 구경조차 않고, 이상백 한영우의 주장을 따랐다면 이제라도 구경이라도 하고 말하라!
정도전이 농지개혁했다는 실체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고려를 뒤엎고 공신전을 차지한 것 이외에 무엇을 개혁하였는지 제시해보라! 농지개혁에 대한 실체는 말 뿐이고 사찰의 토지와 고려 권신의 토지를 빼았아 자신들의 공신전으로 차지 한 것 뿐이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삼국사기는 금경록(고려사)이 이미 있었고, 물론 『경제문감經濟文鑑1395』은 중국의 유서(잡학사전)인 『문헌통고文獻通考』와 『산당고색山堂考索』 을 베낀 것에 불과하고 그것도 그 자신 혼자 지은 것이 아니다. 권근 등 공동으로 하고, 혼자 지은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권근의 증언(왕조실록)에 따르면 함께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초 4년 외, 간신 역신의 대명사
왕조실록에는 500여년에 걸처, 정도전을 조선의 간신 및 역신의 대명사로 타이틀만도 100여 번 이상 걸쳐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정도전이 죽은지 수백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자신들 정적을 탄핵할 때에 "역적 정도전을 평소 흠모하였다"는 문구를 넣어, 정적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가, 그가 죽을 힘을 다하여 해명하고서야 유배를 가는 그런 경우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유학사회에서 정도전은 기피 제1호 인물이었다.
조선 기틀마련이 아니라 조선얼 허무는 일등공신
일제강점 1910년 이 후에 와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인 교수에 의하여 정도전이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었다. 일제는 우리 조선의 얼을 파괴하여, 내선일체에 동조토록하는 정책을 편다. 그 절차로 종교 즉, 신앙을 타파시키고, 조선 선비사회에서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던 인물들 대신에 조선사회에서 간신, 역적, 배신자 등 지탄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현명하게 처신한 위인으로 미화시킨다.
그럼으로서,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이들을 흠모하여 이들처럼 처신(일본에 합류) 할 것을 주입시킬 인물을 발굴했다. 그 대상자 1호가 정도전이고 신숙주, 한명회,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조선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나, 조선 유학사회 선비들로 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경원시 되던 인물들이다.
조그만 조직도 어느 한 명에 의하여 이뤄지는게 아니다. 하물며 국가가 어느 특정 1인에 의하여 기틀이 마련될 수 있는가? 이런 기본적 발상에서 판단할 때, ㅇㅇㅇ는 사이비 학자로 적격이지, 사이비를 떠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종교(신앙) 힘이 두려워
일제는 이미 임진왜란시 승병과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익히 알기에 불교가 내선일체에 큰 걸림돌이라는 걸 잘 알고, 문화정책으로 불교(신앙)를 타파하는 정책을 쓴다. 그 주요 핵심은 신앙적 요소가 없는 유학을 종교로 내세워, 조선의 건국이념이 유교이며, 유교는 조선의 국교라는 이제까지 조선 사회에서 듣던보지도 못하던 종교를 창시하였다. 유학을 유교로 탈바꿈시켜 조선의 종교로 내세운 것이다. 즉, 역설적으로 종교 말살정책을 펼쳤다.
해방 후에도 이상백 이병도 ㅇㅇㅇ 등이 이를 한결같이 금과옥조로 삼아 주장하여, 온 국민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유교를 종교로 당시 문교부에 등록까지하고 종교단체로 인정하나, 이렇다할 조직이 없고, 기존 유림 조직에 유교라는 명칭을 덧붙이기 한 것이다.
지금 현재도 성직자 배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 불리는 사람도 없다. 신자를 어떻게 모으고, 교육하는지 전혀 종교로서 성립하는 기본 요소를 갖추지 않고 있다. 현시점에서도 유교라 할 때, 이를 종교로 인정하는데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식민사관에 중독된 일제 앞잡이들에게 수학한 국사전공자들은 창피한 줄도 모르며, 당당하게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고 주장한다. 현재까지 일제 식민사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유 안되는 곳이 아이러니컬 하게도 국사업계다.
왕, 사대부 백성 불교 신봉, 국가 고시로 승려배출
이성계(태조)는 무학대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자문 받았으며, 왕(태조)이 된 후에는 왕사로 대접하고, 자신이 사찰을 왕궁(회암사)처럼 짓고 거주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딸 옹주도 직접 삭발시켜 승려로 출가시키고, 정종은 아들 15명 모두 승려가 될 것을 권유했고, 세종, 세조는 궁궐안에 사찰을 지었고,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월인석보, 월인청강지곡 등 불서를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조선에서는 승과제도를 두어 고시를 통하여 승려를 국가가 양성하였다. 왕실에서는 수시로 사찰에가 불공했고, 대부분 왕과 왕비의 능 옆에는 원찰을 정하여 그 넋을 기렸다. 일반인들은 물론 사대부들도 대부분이 사찰에 불공하였다. 사찰에 가보면 그들이 불사(중수)하였다는 기록을 안내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당시 일반화된 종교는 엄연히 불교였다. 유학은 조선의 정치 이데오로기(ideology)로서 유학이었지, 종교가 아니었다.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는 주장은 정치학 사회학 종교학 기본지식 결핍자들이 식민사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불치의 증세다. 이 증세는 해방 후에도 사이비들이 전파시켜 전국민에게 감염되었다.
유학을 유교로 탈바꿈, 조선 국교, 유교의 허구
그러니, 유교가 국교 운운하는 자체는 지적 장애자들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모씨는 글을 통해, 일관되게 조선의 국교는 유교라면서, "유교사회"를 빼면 글을 못쓰는 금단현상을 보인다. 그래도 잘 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성립조차 안되는 글로 혹세무민하고 있다. 유학은 이미 신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도전이 생존하던 고려말에도 유학이 정치이론의 대세였으며, 그럼에도 불교는 종교로서 존재하였다.
외국의 역사 입문서는 역사가는 반성하여야 한다고 쓰고 있다. 혹, 시대의 해석이 잘 못되면, 이를 수정하고, 반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갖춘이가 역사가라고 쓰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모씨는 역사가가 절대 아니며, 제대로 된 역사 입문 기본서도 안 읽고 정치적 시류에 곡학아세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학자라는 사람이 유학과 유교의 개념 구분 못해
모씨의 글을 보면, 조선사회를 언급하면서, 수 쪽에 걸쳐, 매 문장 시작을 "조선은 유교사회"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한심한 것은 유학과 유교의 개념을 전혀 구분치 않고, 상호혼용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유학을 유교로 변형하여 쓰고 있음을 자승자박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유학과 유교의 개념조차 구분 못한다. 조선시대에서 발간된 서적 내지 실록을 보면 儒敎라는 단어 자체가 없으며, 儒學 내지 약칭하여 儒로 표기하였다. 그 시대 일본조차도 儒敎라하지 않고 儒學 내지 儒家라 썼다.
당연히,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고 기록된 자료는 일체없다. 조선의 국교가 유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교가 "民主敎"라고 주장하는 논리와 똑 같다. 우리 헌법 1조에 분명하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 국가는 정치이념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질서를 민주주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며, 공교육은 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교가 "민주교"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선에서 유학은 국교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정치이념으로 사회질서의 근간이며 추구하는 이념으로서 학문이었지 절대로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데오로기와 종교를 구분 못하는 수준의 식견으로 사회학(국사) 전공 교수이며 학자로서 생존해온 방법을 유추해 보면 어이가 없다.
문집은 미화되어 발간, 신뢰성 미흡
문집은 저자가 편찬한 것이 아니라 후손 또는 후학들이 사후에 자기 선조 내지 스승을 그리기 위해 통상 미화되어 발간된다. 그래서 신뢰성의 문제을 남긴다. 삼봉집이 정도전 사후 몇 년에 발간되었는지 알기나 하는가? 정도전의 작인지 확실치 않은 출처 불분명한 삼봉집을 근거로 정도전 사상 연구하면서 원래 삼봉집에는 권근의 발문이 없는데, 권근이 발문을 썼다고 주장하여 현재 재편집된 삼봉집에는 권근의 발문을 넣어 혹세무민한다.
이처럼 모씨는 정도전을 미화하기 위해 당시 그야말로 학자이자 영의정으로 조선의 기틀마련에 지대한 공로자 권근을 어떻게든 끌어 들여 정도전 미화에 급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출생시기도 불분명한 정도전을 신뢰할 수 없는 근거로 출생연도까지 제시해 놓고 있다.
어느 드라마 작가는 왕조실록을 열번을 읽었다고 자랑하지만 무식을 드러내는 것 같아 무척 민망하다. 실록 열번 아니라 백번 읽으면서, 상술이 앞서 실록과 정반대인 거짓으로 드라마에서 표현하면서 실록을 들먹여 무엇하나, 소설을 논해야 할 것이다.
이런한 오류는 이상백 이병도 모씨가 국사학계에 뿌리박고 좌지우지 한 결과다. 번역이 무엇인지 기본양심마저 조차 저버린 이들의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식민사관 악성 바이러스 숙주
일제시(1934년경), 이상백이 원고를 작성하고 차마 발표할 용기를 내지 못했으나, 이병도 손진태가 이상백을 부추겨 진단학보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진단학보가 일인들만이 발표하는 청구학보에 대항하여 조선의 얼을 유지하기 위해 간행된 것 처럼 해방 후에 와서 주장하지만, 청구학보에도 조선인의 글이 게재되었다. 또한 진단학보 간행이 중단되었는데 이를 마치 일제에 대항하다가 그런 것처럼 주장하나, 진단학회 회원 중에 최현배, 이희승, 조윤제, 정인승 등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기에 그들이 속한 진단학보를 폐간시킨 것이다. 그러니, 진단학회 활동이 항일한 것이 아니라 조선어 학회가 항일한 것이다.
불교배척이 유학?
이상백은 "조선문화사 연구"에서 고려말의 대학자들을 폄하고 정도전을 유학의 대가로 설정하였는데, 그 중심 논리가 정도전만큼 불교를 배척한 이가 없다는 데서 찾는다. 그 근거로 불씨잡변을 들고 있다. 유학의 본질을 불교 배척으로 보는 이상백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시 불교는 불승의 그릇된 행위로 타락하였다. 그 결과 고려 사회가 혼란에 빠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사상면에서 불교 교리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불승의 타락으로 사회의 타락된 부분을 고치자는 주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이 땅에 유학의 기틀을 마련한 유학의 대학자 목은을 불교를 옹호했다고 비난한다. 당시 불교는 사회전반에 걸처 종교로서 보편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백은 앞의 책에서, 유학발전 계기를 마련한 선현 안향, 유학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이제현, 유학의 대학자 목은 그리고 목은이 유학의 비조로 칭한 정몽주 등 유학의 대가들을 일일이 거론 한 후에, 이들 거유(대유학자)들을 폄하하여 정도전보다 하위로 치부하였는데, 그 방법이 치졸하기 그지 없다. 여기서 이상백의 인간성을 측정하는 좋은 자료이다.
불교가 종교인지 모르는 서울대 교수
그 때나 지금이나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의 대상이다. 정도전은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의 필요성 개념조차 전혀 무지인 사상 측면에서 불씨잡변을 썼다. 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의 사상적 지식수준을 가름할 수 있다. 자신의 태생적 콤프렉스에서 발광하는 폭언으로 비춰진다. 정도전 외할아버지가 중이었다. 그 중이 절 여노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가 정도전 어머니다. 또한, 자기 아비인 정윤경이 봉화에서 서울(개성)가는 길에, 단양 우현보 집 근처에서 비를 피하려 초막에 들어 가있었는데, 마침 비를 피하려 들어 온 우현보 집 여종(사찰 승려와 사찰 여노비에서 태어냄)을 희롱하여 낳은 이가 정도전이다. 그래서 이름을 길가다 전해지게 되었다하여, 길 道에 전할 傳으로 지어, 道傳이 되었다. 자신의 출생 연도가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출생사실을 숨기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죄가 정도전에게 현실을 적개심으로 지내며, 권력에 빌붙어 아첨하며 지내다 결국에는 타살되고 말았다.
정도전의 경우는 당시 종교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 못하던 시대였으나, 현대에 살면서 사회학 전공 서울대 교수인 이상백이 종교개념 없이 불교를 보았다는 것은 학문을 떠나, 한 자연인으로서 그 행동거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저술당시), 불씨잡변을 반박한자가 없기에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학문하는 이의 논리가 아니다.
자기보다 훌륭하면 막가파 살해, 사창가에 정려문
정도전이 유학자며 사상가란 주장은, 유학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면 그렇 수 없다. 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 충 효 인 의 예 지가 아니던가? 려말 유학자들은 불사이군으로 자기 나라 고려에 충성하였다. 자기 나라인 고려에 충성하기는 커녕 고려를 뒤엎은 자에게 유학을 거론할 수 있는가? 그 다음이 효가 아닌가? 정도전에게서 효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거짓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미화시킨 것이 전부다. 결국, 탄로나 편찬의 신뢰성 문제로 그가 편찬한 고려사 전체를 폐기처분 한 것 이외 어디에도 효라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럼에도 정도전 분장 기술자들은 이 고려사를 위대한 업적으로 든다. 고려사도 이미 목은과 이인복이 함께 편찬한 금경록(고려사)이 나와 있었으므로, 이를 베끼지 않고는 단시일내에 혼자서 편찬했다는 것은 당시 정도전의 시간상으로 볼 때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도전 미화에 훌륭한 사료로 든다. 당시 폐기처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은사며 은인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룬다.
정도전의 후학이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후학이 없는 이는 학자가 아니다. 정도전은 유학을 글로 쓰고 말로 하였으나, 행동은 유학과 정반대였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콤프렉스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전혀없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 자기에게 불리한 기존질서를 타도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걸 감추고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의 포장지는 유일하게 유학밖에 없었다. 지금도 포장의 달인 정치인들이 나라를 혼란시키고 있다.
돌보는 이가 없어, 당시 대유학자 목은이 친구의 자식이라는 인연으로, 자신의 아들과 함께 키워주고, 자신의 문하에서 당대 기라성같은 이들인 길재 이숭인 권근 하륜 박상충 등등과 함께 공부시키고, 성인이 되었을 때는 정몽주의 원나라 수행에 추천하여 공직에 첫 걸음을 내딛게 하였으니, 자기 부모 이상이며,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이유없이 목은의 두 아들인 이종덕과 종학을 귀양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귀양가는 길에 매질하여 죽이고, 어려서 자기보다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은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이숭인을 죽이고, 그 칭찬을 했던 하늘처럼 모셔야 할, 은인이자 스승인 목은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며 두 번이나 죽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이성계(태조)가 이를 받아드리지 않자, 종국에는 독약 탄 술을 선물로 가장하여, 기여코 살해 하였다. 어느 부분이 유학의 본질과 합치된다는 소리인가? 이런 자를 대유학자라니, 사창가 여인에게 정려문 세워주는게 훨씬 교훈적이라 할 것이다.
정도전의 조선 기틀 마련은 이렇게
이처럼 막가파 정도전 살륙행위는 어디 그뿐인가? 자기의 과거를 안다는 이유로 여러 가문 특히 자기 어머니가 종으로 있던 당시 명문 우현보 가문을 박살 냈고, 정몽주를 경계하며 이성계에 대한 충성과 학문에서 밀린다 싶으니, 결국 정몽주도 일당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으로,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하로서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여 이성계가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게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계략에 적극 동조함으로서 이성계의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해 주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켰다는 내용은 재평가 되어야 한다. 단, 이성계 일파의 음모를 모르고 있다가, 자신이 살해당하던 날 이성계의 본심을 살피려다 정도전 이방원 일당에게 역습당한 것이다.
정도전은 귀양지를 전전하던 중, 통진(김포) 귀양지에서, 더 이상 출세 길이 막힐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아오는 죄과들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당시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명성도 있던 함경도 주둔의 이성계에게 찾아가 구테타를 이르키도록 부추겨 이윽고 이성계가 구테타를 결심하게 하고는, 왕위 계승에 대해 그동안 잠잠히 있고 있다가 우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트집을 잡더니, 이 때 정몽주는 이들 편에서서 이들을 도왔다. 이성계 조카 사위인 창왕을 옹립하고도 계속 시비를 걸며, 기회를 살피다가 위화도 진군 명을 기회로 이핑게 저핑게로 진군을 미루다가 이를 군사동원 기회로 이용하여 진군하는 척하다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케하고, 이성계의 상관인 군 총사령관 최영장군을 투옥 시키고, 급기야 사형시킴으로서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그러고는 이성계에 찰거머리 이상으로 딱 붙어, 모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설치며 나서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정도전이 아니었으면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정도전의 살륙행위는 자신이 온전히 권력을 획득한 후에도, 대항은 고사하고 반항의사가 전혀없는 상태였음에도 스승이고 은인이고 가리지 않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기여코 살해해 없애 버렸다.
이러한 행위를 들어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했다느니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면 그런대로 말은 되나, 조선경국전 경복궁 운운하는 것은 사이비들의 요설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도전만 조선건국 1등 공신처럼 기술하나, 1등공신은 17명 + 3명 도함 20명
1등공신이라고 강조하는데, 그 당시 1등공신이라고 이성계에 의하여 선정된 자는 17명이었으며, 이방원과 이방의 이방간은 이성계의 아들이라서 빼졌으나, 그 후 정종에 의해 이들이 추가 되어 모두 20명이다. 그럼에도 1등공신이 마치 정도전 혼자인 것인 양, 다른 이들은 언급조차 안하는데 이는 혹세무민의 전형이다.
1등 공신,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20명이다.
이방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전의 공헌도를 등수로 치면 7등에 해당한다고 왕조실록에 있다. 이런 정도전이기에 이를 뒤엎을 위인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어설피 해서는 결코 안되기에 이를 적극적이고 확고하게 미화하여야 하였다.
사상가요, 철학가요, 유학자요, 정치가요, 혁명가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온갖 훌륭한 능력을 가진 자로 분장시킨 것은 식민사관에 중독된 분장 기술자들의 작품이다.
정도전의 인간성을 전혀 무시하고, 오히려 위인화하여 조선의 기틀과 체계를 마련하였으며, 유학의 대학자라고 주장하니, 그들의 정신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그들의 학문을 논하는 것이 순서라 하겠다. 국사업계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교육하고 있으니, 과연, 국사교육이 누구를 위해 교육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처럼 우리가 배격하여야 할 인물을 훌륭한 인물로 설정하는 국사교육은 폐지되어야 한다. 지금 국사교육의 축소내지 폐지에 적극 찬성한다.
이런 자는 기존질서 타도의 선동자로서, 더할 나위없기에, 일제시에는 일본이 조선얼 말살과 내선일체 협력에, 해방 후에는 조선왕정 복귀에 대한 이승만의 두려움 불식으로 또 농지개혁의 밑바침으로, 김일성은 프로레탈리아 혁명의 선구자로 기득층의 재산 몰수를 , 5.16 군사 구테타시에는 기존질서 및 기존 정치인 타도와 구테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도전을 등장시켰다. 이처럼 정도전은 우리 현대사에서 질곡이 있을 때마다 등장되며, 현제까지도 기존질서를 부정하려는 자들의 흠모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식민사관을 신봉하는 학자 탈을 쓴 위장 기술자들의 작품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최고 엔터테인먼트 주인공
이처럼 위장된 정도전은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서 이를 능가할 인물이 없기에 드라마 소설 그리고 상업적 돈벌이 책에서는 최고의 주인공이다. 작가 PD 출판없자 국사업자들이 이야기 거리가 시원찮으면 정도전을 소재로 재탕 삼탕을 시도한다. 학자(?)라는 이들이 논문이랍시고, 발표해 놓았으니, 권위가 있어 좋지 않은가? 감히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지금 우리는, 이상백 모씨가 정치집단의 하수인이 되어 정도전을 위인으로 만들어 전파시킨 줄도 모르고,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왔다.
일제시, 일본에서 가장 출세한 조선인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상백은 시인 이상화의 아우이며 대구지역에서 내놓라 하는 대지주의 아들로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와세다 제1고등학원과 와세다 대학 및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의 지원아래 중국 남경대학 대학원에서 동양사학을 2년 6개월 전공하였다. 여기서 이상백이 남경대학 대학원에서 동양사를 연구한 목적이 무엇인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그리고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 그 후 일본 농구계에 진출하여 일본 체육회 임원으로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르린 올림픽 때는 상무이사로 있었으며, 전무이사까지 지냈으니, 조선인 출신으로서 일본사회에서 활약한 최고의 거물이었다. 그 공로로 사후 일본정부로부터 3등 욱일중수훈장을 받았다.
독립군 토벌하던 일본군 하사관 출신, 5.16 군사혁명정부 혁명재판소 감찰부장
이상백의 형은 시인 이상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항일 시를 발표하였는데, 그 아우 이상오는 함경도 출신의 일본군 하사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와 근접한 부대에 독립군 토벌에 참가한 박창암을 사위로 삼았다는 것에도 의구심이 남는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신분에서 5.16군사구테타에 생도들을 동원한 공으로, 군사혁명정부 혁명재판부 감찰부장(대령)이되었다. 당시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생사가 갈리는 그런 위세를 가졌다.
박창암이 5.16군사 구테타는 정당성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던 차에 자기 장인의 형(처숙)인 서울대 사회과 교수 이상백에게 부탁, 이미 일제시 내선일체 협력에 써먹었고, 대한민국 건국에도 활용된, 고려를 뒤엎은 정도전의 행위를 리바이블하여 이들의 당위성에 합치하도록 부각시켰다. 앞에서 언급 바와같이, 이로서 혁명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위장된 정도전이 일반인에게 요지부동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5.16 군사 구테타 당위성으로 정도전을 미화 찬양, 발간사가 주 목적
박창암은 박정희를 이성계에 비유하고 자기들 즉 5.16 주체세력을 정도전에 비유하였으니, 정도전을 가일층 미화하기에 이르렀다. 5.16군사 정부는 구테타의 당위성으로, 이상백의 자문에 의거 정도전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정책을 펼친다.
그 일환으로, 혁명정부는 이상백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문교부 관할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도전 문집으로 순한문으로 쓰여진 삼봉집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는데, 구테타가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났고, 그 문집을 1961년 12월에 재판까지 간행하였으니, 얼마나 급박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국사편찬위원회가 순한문인 문집을 재판까지 간행한 것은 정도전의 삼봉집이 아직까지도 유일무이하다.
순한문으로 되어있기에 웬만큼 한문을 공부하지 않고는 알 수없다. 문집을 영인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활자화하여 편집하였기에 그 내용의 진실성에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발간사만이 발간의 목적이었다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지금도 그 발간사를 토대로 정도전에 대한 모든 글들이 나오고 있다. 거듭 말해서, 한문을 별도로 전념하여 수 년간 공부하지 않은 이는 절대로 본문을 읽기조차 못하니, 이해는 어림없다.
그러나, 발간사만은 국문(국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도 이해할 수있게 하였는데, 당시 문교부장관 문희석(당시 해병대 현역 군인) 이름으로 하였으나, 실은 이상백의 글로, 정도전을 미화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은 정도전을 미화한 발간사만 읽을 수 있다.
한영우는 이상백의 미화 찬양된 이 발간사를 근거로 현재까지도 정도전을 미화찬양하는데서 나아가 우상화 작업의 바이블이 되고있다.
우상화 기능장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역대 인물 중, 사상가라고 일컫는 이는 원효 의상 퇴계 정도이다. 원효 의상 퇴계가 불문 내지 학문에 매진한 기간이 얼마인지 아는가? 정도전은 학문에 매진한 기간은 당시 유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수학 기간뿐이다. 사상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 지느게 아니다. 누가 그럴 듯한 말했다고 해서, 그를 사상가라고 하는가? 우상화 작업자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씨는 "정도전사상"이라는 금시초문 기절초풍의 용어를 탄생시켰고, 시도때도 없이 줄기차게 정도전을 미화시키는데 앞장서며 곡학아세하고 있다. 만약 최소한의 학자이기 이전에 역사 전공자라면, 콜링우드의 "The Idea of history"를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앞서 언급한 행운이 이어져 노망이 비켜갔는지 아니면 노망인지 초지일관 정도전 전용 위장 기술자에서 우상화 기능장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세종대왕 이순신장군도 이처럼 지속적으로 연구한 이는 없다. 정도전이라는 팽이를 계속 치지 않으면 더 이상 돌 수 없기에 계속 채찍하는 것은 아닐가? 정도전 전용 분장 기술자가로 자처하는 데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분명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문화훈장 받고, 일제시 충성 댓가 일본욱일중수훈장 받아
이상백은 1963년 대한민국 건국문화훈장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일제시 공로로 3등 욱일중수훈장이 수여되었다. 건국문화훈장은 조카사위인 박창암에 의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이로서, 일제시 일본정부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니, 사후라 하더라도, 그 가족들의 철면피 행태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자가 일제 강점기 일제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건국훈장은 당연히 박탈되어야 한다. 이상백이 국사 내지 사회학자 이전에 자신의 국가관과 자기 가족에게 심어준 국가관은 무엇인가? 그건 개인사라 제처두고라도, 그런 자를 떠받들며 그의 주장을 금과옥조로 삼는 서울대 출신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행태가 바로 현 국사업계 종사자들의 모습이다.
국사업계 엉터리들
일반인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주입식 국사를 배우는 것을 끝으로,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흥미위주로 각색된 픽션으로 국사지식을 쌓아 갈 뿐이다. 설령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한 자라 할지라도 원전에 기초를 두지 않고 이상백 이병도 한영우 등이 발표한 2차 자료를 인용하고 그 인용된 자료를 3차 4차 이렇게 간접 자료에 의한 연구는 연구로서 가치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문을 왜곡하여 악영향을 미치므로 이런 연구는 없어져야 한다. 미화된 거짓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나아가 미화된 거짓을 점점 덧붙혀가니 원래 역적애서 위대한 위인으로 가공된 정도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금단현상 극복
이처럼 원전에 의거하지 않고, 정도전을 연구한 자들은 이 글이 얼토당토치도 않고, 엉둥한 거짓을 끌어들여, 거짓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에 대한 당시의 입증자료로서 기술할 것이므로, 일단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하여도, 이는 전적으로 앞서 열거한 악성 바이러스 중간 숙주들이 국사계를 선점 하고 독점체제를 유지하며 악성 바이러스를 전파시킴으로서 이에 감염되어 자각증세가 마비된 결과이다. 무려 80여년간 감염된 증상을 극복하는데는 분명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그 금단현상은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흥분과 긴장 속에서 지켜보련다.
역사는 어느 특정한 한사람에 의하여 이뤄지는게 아니라, 숨겨져 묵묵히 일한 훌륭한 다수의 선열들에 의하여 이뤄져왔다. 그들의 얼을 발굴하여 사표로 삼아야 한다.
백성을 위한다는 그렇듯한 구호를 앞세워, 자신의 그릇된 복수심에서 끝없는 권력을 추구하던 패륜아의 당연한 죽음을 우상화하는 것은 우리인류에게 교훈적 내지 교육적 측면에서 크게 잘 못되었기에 바로 잡을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시간이 허하는 대로, 이어 지는 형식으로 전개한다. 이미 기본 틀은 완료되어, 이를 정리하며 여기에 올리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요약한다.
성미 급한 이를 위해 결론 부터 말하면, 정도전은 자신의 처신으로 인하여 타살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초를 제외하고, 조선왕조 510년 동안, 간신, 역신의 대명사로 가장 많이 조선의 역사서에 기록된 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백성을 위한 다는 이름으로 야비한 행동을 하면 그 것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다는 인류가 추구하여야 할 참된 진리"를 그 자신이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이것 하나만큼은 정도전 스스로, 명백하게 입증하여, 우리 인류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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