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올렸던 내용을 약간 수정 보완하여 ....
앞에서 언급된 극악무도한 인간 정도전이 일제시 일인 식민사학자가 조선은 이성계가 아닌 실질적으로 정도전이 세운 정도전의 나라라고 퍼트렸다. 이는 조선의 정체성을 흐러트리는 술책이었다.
일본의 대표적 식민사학자 스에마즈 야스카즈( 末松 保和すえまつ やすかず, 1904. 8.10 ~ 1992. 4.)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이씨조선왕조의 최초법전으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 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朝鮮經國典》은 元왕조에서 편찬한《皇朝經世大典 약칭 經世大典》의 항목만 베낀 것으로 속 내용이 없어 실지로 조선에서 활용하지 않았다. '朝鮮'이란 문구를 빼면 《皇朝經世大典》과 대부분 일치한다.
설령 그 편제가 조선에 있다하여도 그건 정도전의 《朝鮮經國典》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皇朝經世大典》을 활용한 것이다.
이방원(태종)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 있다는 걸 알고 가져 오라하여 본 후에 항목만 있을 뿐 속 내용이 없어 활용할 수 없다며, 법전 만들 것을 명한다.
성종 1년 (1470)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다. 이로서 조선의 기틀이 마련된다. 물론 元나라의 《皇朝經世大典》을 참고하였기에 정도전이 베껴 만든 《朝鮮經國典》과 일부 항목이 중복되기는 하나, 내용도 없는 단지 항목만 있는 정도전의 《朝鮮經國典》을 참조할리 만무하다.
정도전이 저술했다는 책들 거의가 남의 것에 자기 이름을 올려 마치 자기것인 양한다. 일례로 《불씨잡변》은 주희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정도전 찬양자들은 그걸 들어 정도전을 위인화 하는데 활용한다. 이를테면 서울 천도를 정도전의 업적으로 하지만 이는 이미 그전부터 거론되던 일이고 터 또한 무학대사가 잡은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던 이상백(李相佰, 1904.8.6 ~ 1966. 4.14)은 앞서 일인들의 주장이 있은 후, 진단학회를 창설한 이병도(李丙燾, 1896.9.20 ~ 1989.8.14)의 부추김에 1934년 《진단학보》에 <이조건국에 관한 논설>를 게재했다.
이상백은 연달아 정도전 옹호 글을 게재하면서 조선 510여년간 역적 간신의 대명사 인물에서 영웅으로 둔갑시켰다. 이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목적이었다.
이와 달리, 일본에 체류하던 월남의 대표적 지식인 판보이쩌우 (潘佩珠Phan Bội Châu, 1867 ~ 1940)와 중국의 梁啓超(량치차오, 1873~1929)가 나눈 대담집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가 1905년 梁啓超에 의해 나왔다. 내용은 1884년 프랑스의 월남 침략을 고발하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을 비난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된지 23년이 흐른 시점에서 '조선망국사'가 아닌 '이조건국에 대하여...' 쓴 목적은 무엇일가?
이상백은 일본에서 와세다대 부설 고등학교, 와세다대학, 와세다대학원까지 마치고 일본 정부로부터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역사를 조사 (조작?)하는 일을 하다가, 일본 올림픽위원회 임원으로 후에는 전무까지 올라 일본 상류사회에 활동하며, 일본 욱일중수(훈)장도 받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국내로 들어 와,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탄생하자마자 《이조건국의 연구》라는 책(1949년, 乙酉文化社)을 내어 대한민국건국과 농지개혁의 당위성으로 정도전을 활용했다. 책명 부제로 -이조의 건국과 전재개혁문제-라고 됐다..생각해 보라! 대한민국이 막 탄생했는데, 《이조건국의 연구》라니 어떤 의도일가?
서울대 사회학과를 개설하여 교수로 대한올림픽위원회 회장으로 일제시에는 욱일중수훈장을 받은 사람이 대한민국 건국훈장까지 받았다.
이병도는 일제시 우리 얼을 말살하기 위해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를 편찬하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시작하여, 1934년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해방후에는 문교부장관, 서울대교수 및 고려대동창회장을 18년하면서 국사업계를 평정하였다.
한영우(韓永愚, 1938.7.12 ~ )는 이상백 이병도 밑에서 '정도전의 사상과 철학'으로 철학박사가 아닌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틈만 나면 지금까지 읊어대고 펜만 잡으면 써낸다.
《朝鮮經國典》의 항목에서 나오는 편제에 근거하여 조선을 설계하고 활용했다는 논문을 발표하고, 줄기차게 그걸 주장하며, 정도전을 위인화하는데, '경복궁'을 예로 든다.
한영우는 문학박사의 실력으로 글자 맞추기 퀴즈에 성공하는데, "정도전이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고 주장한다.
현실은 정반대로 경복궁을 짓고 송진 냄새도 채 가시기 전에, 바로 그 곳에서 무인년의 난 (정도전의 난, 방석의 난)으로 정도전이 내세운 세자 방석이 살해되고 자신도 살해되고, 왕(태조)은 스스로 자리를 내 놓고 떠나고, 궁은 폐궁되었다.
그런 정도전은 이상백에 의해 거론되기전까지 조선 510년여년간 역적 . 간신의 대명사로 내려왔다.
'경복'이란 명칭은 이미 신라 4대사찰의 하나인 경복사가 있었다. 경복사에서 따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도전이 위인으로 부각시키는 이유가 있다.
➀ 일제시에는 일인 식민사학자들과 여기에 이상백 이병도가 앞장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허물어 일본에 저항(독립운동)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조선은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이 세운 나라로, 이씨왕조에 미련갖지 말고 내선일체에 동조하라는 식민지정책이었다.
➁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토지개혁으로 인한 지주들의 반발에 정도전의 '경자유전' 논리를 들어 정도전을 부각시켰다. 여기에 이상백과 이병도가 있었다. 제헌헌법에 '경자유전' 원칙을 명시하여 현재까지 존재한다.
현재 농촌에는 빈 집이 허다하여 마을자체가 폐허로 변하고, 농지가 묵혀지고 있는 실정에서, 620년 정도전의 주장이 살아있다.
➂ 토지분배가 큰 탈없 이뤄져, 정도전이 용도폐기되는가 싶더니, 1961년 5.16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혁명정부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5.16 구테타의 당위성을 고려를 뒤엎은 정도전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구테타 주체세력인 박창암이 있다. 박창암은 이상백의 동생 이상오의 사위로 혁명감찰부장이었다. 여기 또한 이상백 이병도가 있다. 박창암은 자신을 정도전으로 자처하였다. 당시 박창암의 혁명재판은 단심제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 사형시켰다.
➀ 사형당한 사람
3.15부정선거 책임자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인규, 4.19시 발포명령자로 곽영주, 정치 강패로 이정재, 임화수, 좌익관련 조용수, 최백근 등
➁ 사형선고 받고 옥사한 사람
미군정 농림부장(관)과 성대총장 지내고 당시 단대 총장인 이훈구
➂ 사형선고 받고 집행전 살아난 사람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당시 성대총장인 이선근,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홍진기(삼성 이재용 외할아버지)
<혁명정부 내각>
1961년 6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을 출간했다. 시간에 쫒겨 한문을 번역조차 않은채, 발간사에 정도전 찬양글을 국사편찬 위원장 신석호가 이상백의 주장을 요약해 썼고, 당시 혁명정부 문교부장관 해병 중령 문희석의 축사가 실렸다.
한문판 《삼봉집》을 불과 5개월이 지난 12월에 재판까지 찍어 무상으로 각급 관공서 학교 등에 돌렸다. 얼마나 대량으로 찍었던지, 50년이 지난 2010년에 무더기로 헌책방에 나돌았다.
글 좀쓰고, 말 좀 한다는 교육계 언론계 나부랭이들이 신문 잡지 방송에 나와 이상백의 글을 바탕으로 요설을 덛붙여 곡학아세하며 정도전 찬양에 견강부회했다.
한편, 북한 김일성은 미천한 신분에서 권력을 잡은 정도전을 프로레탈리아 계급투쟁 영웅 롤모델로 선정하여, 지주들을 숙청하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김일성 체제가 안정되고 세습되면서 김정은 시대에 정도전을 입에 올렸다간 체제 전복을 꾀하는 이로 몰려 총살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몇년전 KBS에서 정도전 드라마 방영할 때, 숨어서 보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남한의 좌파들은 정도전에 열광한다. 이유는 김일성이 혁명가로 띄웠고, 이상백, 이병도, 한영우가 각색하여 기존체제를 뒤엎는 프로갠디스트로 적격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사철 석.박사과정은 철저한 도제식 전수교육으로 이뤄져왔다. 혹, 이론을 제기하면 그들이 장악한 문사철 특히 국사업계 제도권에서 추방 (현재) 된다. 거기다 원전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아, 이상백 이병도 특히 한영우의 2차 3차의 글에 짜집기하고 여기에 견강부회 말을 붙여 (학위)논문 등 잡글을 썼으니, 하물며 일반인이 정도전 환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여파는 연속극으로 재탕 삼탕 사탕하여 근자에 '용의 눈물' '정도전' '이방원' 등의 이름으로 2022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P.S.>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은 함북북청 출신으로 일본 만주군 간도특설대 하사관학교를 나와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는 특수 목적의 독립군 토벌부대에서 복무하였다.
일본이 패전하자, 남으로 와, 1946년 미군정하에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고, 북으로가 김일성 정권수립에 관여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1949년 육군 중위로 특별 재임관되었다.
5.16구테타시 육사생도대장(대령)으로 생도의 지지 시위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혁명감찰부장이 되어 수 많은 이들을 사형시켰다.
그러던 그가 1963년 3월 11일 군 일부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아래 두번째 사진 오른쪽의 박창암은 1963년 9월 27일 보통군사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후 풀려나 박정희의 지원아래 '자유의 벗'이라는 반공 화보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국사에 관심을 갖고, 유사(사이비) 사학 환단고기 연구모임을 이끌며 발표회와 《환단고기》 잡지를 발행하다 생을 마쳤다. 역사 조작의 가능성을 정도전의 사례에서 확신한 것 같다.
<왼쪽 첫번째 김동하, 한사람 건너 끝 박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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