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신도비에 숨은 노론(老論) 정치의 본색
경기도 성남시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안양판교로 도로 건너 산속에 무덤이 여럿 있다. 조선시대 무덤이다. 그 가운데 '이경석 선생 묘' 표지판을 따라가면 왼편에 작은 공터가 나온다. 그 옆 언덕에 비석이 보인다. 무덤 주인 이경석의 신도비(神道碑)다. 정2품 이상 벼슬을 지낸 망자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언덕에는 신도비가 '두 개' 있다. 하나는 1754년 영조 30년에 세운 원래 신도비고 하나는 1979년에 다시 세운 비석이다.
그런데 구(舊) 신도비는 새긴 글자가 다 깎여나간 백비(白碑)다. 원래 비석을 대체하는 비석을 세웠으니 옛 돌은 묻어버려야 마땅한데, 이 후손들은 텅 빈 옛 비석을 버리지 않고 새 비석과 함께 세워놓았다.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이다. 사리사욕을 신념이라 포장해 정적(政敵) 압살에 써먹었던, 조선 후기 정치판 이야기다.
삼전도비와 이경석
서기 1637년 음력 11월 27일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이 글을 적어 내린다. 한강 건너 삼전도에 있는 비석에 새길 글이다. 글은 이리 시작하였다. "대청(大淸)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우리 임금은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대청황제공덕비'·속칭 '삼전도비')
그런데 구(舊) 신도비는 새긴 글자가 다 깎여나간 백비(白碑)다. 원래 비석을 대체하는 비석을 세웠으니 옛 돌은 묻어버려야 마땅한데, 이 후손들은 텅 빈 옛 비석을 버리지 않고 새 비석과 함께 세워놓았다.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이다. 사리사욕을 신념이라 포장해 정적(政敵) 압살에 써먹었던, 조선 후기 정치판 이야기다.
삼전도비와 이경석
서기 1637년 음력 11월 27일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이 글을 적어 내린다. 한강 건너 삼전도에 있는 비석에 새길 글이다. 글은 이리 시작하였다. "대청(大淸)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우리 임금은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대청황제공덕비'·속칭 '삼전도비')
밤새워 글을 끝낸 이경석은 다음 날 인조 앞에 글을 갖다 바쳤다. 때는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거덜이 나고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은 그해였다. 청나라 황실이 내건 전리품은 처녀 조공과 비문 제작이었다. 그 치욕적인 비문 작성을 맡은 이가 이경석이었다. 이경석 글은 청 황실의 교정 요청을 거쳐 비문으로 확정됐다. 훗날 이경석이 맏형에게 편지를 썼다. "글 쓰는 법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有悔學文字之語)."('백헌집' 부록1 연보)
비석 제작은 더뎠다. 사대부 반감이 극렬했다. 인조로부터 함께 비문을 명받은 형조판서 이경전은 "사람이 어리석고 실성해 술병이 들었다"며 거부했다. 전 판서 장유는 직함과 이름을 빼먹는 꼼수를 부렸다(장유는 청나라로 끌려갔던 며느리가 그해 3월 송환되자 '조상에 함께 제사를 받들 수 없다'며 정부에 이혼 허가를 요청했던 인물이다). 전 부사 조희일은 글을 졸렬하게 써서 고의 탈락했다.(1638년 11월 28일 '승정원일기' 등) 각자(刻字) 담당관으로 임명된 강경파 척화론자 신익성은 "오른팔이 마비돼 수저를 못 든 지 반년"이라며 사표를 냈다.(1639년 6월 26일 '승정원일기') 결국 비석은 1639년 11월에야 완성돼 12월 8일 삼전도에 건립됐다. 이게 조선 500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추악한 정쟁의 빌미가 될 줄은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이경석보다 열두 살 어린 송시열(宋時烈)만 알았다.
이경석 장수 축하파티와 송시열
비석 제작은 더뎠다. 사대부 반감이 극렬했다. 인조로부터 함께 비문을 명받은 형조판서 이경전은 "사람이 어리석고 실성해 술병이 들었다"며 거부했다. 전 판서 장유는 직함과 이름을 빼먹는 꼼수를 부렸다(장유는 청나라로 끌려갔던 며느리가 그해 3월 송환되자 '조상에 함께 제사를 받들 수 없다'며 정부에 이혼 허가를 요청했던 인물이다). 전 부사 조희일은 글을 졸렬하게 써서 고의 탈락했다.(1638년 11월 28일 '승정원일기' 등) 각자(刻字) 담당관으로 임명된 강경파 척화론자 신익성은 "오른팔이 마비돼 수저를 못 든 지 반년"이라며 사표를 냈다.(1639년 6월 26일 '승정원일기') 결국 비석은 1639년 11월에야 완성돼 12월 8일 삼전도에 건립됐다. 이게 조선 500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추악한 정쟁의 빌미가 될 줄은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이경석보다 열두 살 어린 송시열(宋時烈)만 알았다.
이경석 장수 축하파티와 송시열
송시열은 이경석과 친했다. 열두 살 연상에 벼슬길도 먼저 오른 이경석은 틈이 날 때마다 송시열을 왕에게 추천해 중용을 권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학문과 품행으로 이름난 지 오래입니다. 정성을 들여서 찾고 예의를 갖추어서 부른다면 분수나 의리로 보아 어찌 감히 나오지 않겠습니까."(1645년 10월 9일 '인조실록') 그럴 때마다 '송시열은 누추한 행색으로 공(이경석)을 찾아왔으나 공은 대등한 예로 대하였다.'(박세당, '이경석 신도비문')
1668년 11월 이경석 나이가 73세가 되었다.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무리 없이 잘 수습한 노 대신에게 나라에서는 궤장연(几杖宴)을 열어주었다. 궤장은 왕이 내리는 지팡이다. 문관에게 최고 명예다. 이에 이경석이 친한 후배인 송시열에게 축문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궤장까지 주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하고 말꼬리를 달면서도 축하 메시지를 이리 전했다.
"생사를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해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여(壽而康·수이강) 우리 성상에게 융숭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송시열, '송자대전' 137권 '영부사 이공궤장연서·領府事李公几杖宴序') 한 사람은 청과 무난한 조선 관리였고 한 사람은 그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강경파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하며 국정을 함께 했다. 동지애는 이듬해 무참하게 깨졌다.
송시열의 좀스러운 본심
1669년 3월 몸이 좋지 않은 왕비 김씨를 위해 현종이 온양 온천으로 행차했다. 한 달이 넘는 체류 기간 지방에 있던 관리들이 한 명도 행궁으로 나온 자가 없었다. 이에 4월 3일 영부사 이경석이 "국정이 급하니 얼른 서울로 돌아오시라"고 문서로 권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행궁에 달려가 문안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으니 기강과 의리가 무너졌다."(1669년 4월 3일 '현종실록') 이 보고서에 나온 '신하'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뜨끔한 사람이 있었다. 송시열이었다. 자기도 행궁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달 14일 송시열이 왕에게 이렇게 상소를 했다. "병 때문에 길을 지체했다가 출발하는데, 신(臣)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금나라에 항복문서를 바친 송나라 역적 손종신처럼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나를 비난한다."(1669년 4월 14일'현종실록') 바로 넉 달 전 궤장연 때 이경석에게 써줬던 바로 그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다름 아닌 '역적'이라는 뜻이었다. 송시열은 정치적, 학문적 선배의 축사에 암호처럼 욕설을 삽입해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송시열 본심을 알아차렸다. 연유를 묻는 제자에게 송시열은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이 워낙 아첨을 잘하는 자로 오랑캐 세력을 끼고 평생 몸을 보전하니,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송시열, '송자대전' 70, '송도원에게 답함·答宋道源') 송시열은 이경석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금됐다 생환한 사실을 두고 "그때 죽지 않았던 것도 삼전도비 글을 잘 썼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라고까지 했다. 이 격렬한 비난에 이경석은 "송시열은 명단에 없으니 그가 오해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1668년 11월 이경석 나이가 73세가 되었다.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무리 없이 잘 수습한 노 대신에게 나라에서는 궤장연(几杖宴)을 열어주었다. 궤장은 왕이 내리는 지팡이다. 문관에게 최고 명예다. 이에 이경석이 친한 후배인 송시열에게 축문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궤장까지 주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하고 말꼬리를 달면서도 축하 메시지를 이리 전했다.
"생사를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해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여(壽而康·수이강) 우리 성상에게 융숭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송시열, '송자대전' 137권 '영부사 이공궤장연서·領府事李公几杖宴序') 한 사람은 청과 무난한 조선 관리였고 한 사람은 그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강경파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하며 국정을 함께 했다. 동지애는 이듬해 무참하게 깨졌다.
송시열의 좀스러운 본심
1669년 3월 몸이 좋지 않은 왕비 김씨를 위해 현종이 온양 온천으로 행차했다. 한 달이 넘는 체류 기간 지방에 있던 관리들이 한 명도 행궁으로 나온 자가 없었다. 이에 4월 3일 영부사 이경석이 "국정이 급하니 얼른 서울로 돌아오시라"고 문서로 권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행궁에 달려가 문안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으니 기강과 의리가 무너졌다."(1669년 4월 3일 '현종실록') 이 보고서에 나온 '신하'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뜨끔한 사람이 있었다. 송시열이었다. 자기도 행궁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달 14일 송시열이 왕에게 이렇게 상소를 했다. "병 때문에 길을 지체했다가 출발하는데, 신(臣)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금나라에 항복문서를 바친 송나라 역적 손종신처럼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나를 비난한다."(1669년 4월 14일'현종실록') 바로 넉 달 전 궤장연 때 이경석에게 써줬던 바로 그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다름 아닌 '역적'이라는 뜻이었다. 송시열은 정치적, 학문적 선배의 축사에 암호처럼 욕설을 삽입해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송시열 본심을 알아차렸다. 연유를 묻는 제자에게 송시열은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이 워낙 아첨을 잘하는 자로 오랑캐 세력을 끼고 평생 몸을 보전하니,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송시열, '송자대전' 70, '송도원에게 답함·答宋道源') 송시열은 이경석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금됐다 생환한 사실을 두고 "그때 죽지 않았던 것도 삼전도비 글을 잘 썼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라고까지 했다. 이 격렬한 비난에 이경석은 "송시열은 명단에 없으니 그가 오해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송시열도 이경석도 모두 서인 지도자였다. 송시열이 가진 적개심은 당파와도 무관했고 나이도 무관했다. 자기와 뜻이 다르면 그자는 타도 대상이었다. 이경석은 무탈하게 살다가 2년 뒤 1671년 죽었다. 1682년 서인 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송시열의 노론이 권력을 잡았다. 그해 선조의 손자 낭선군 이우가 송시열에게 아버지 인흥군 신도비문을 받아갔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인흥군 묘에는 이미 1655년 이경석이 썼던 신도비가 서 있었다. 권력은 송시열에게 있었다. 1689년 그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노론은 건재했다. 이후 독재가 이어졌다.
사문난적 낙인과 박세당
세월이 흘러 1703년 소론 당수인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문을 지었다. 박세당은 유학을 노자와 장자에 빗대어 재해석해 교조주의 노론이 벼르고 있던 학자였다. 신도비문은 이러했다.
'시경에 말하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으니 감히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상서롭지 못한 보복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하늘의 도리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누가 보아도 이경석을 비난한 송시열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문은 이렇게 끝난다. '거짓됨과 방자함과 허망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자가 있다. 올빼미와 봉황은 애당초 다른 새인데 화를 내고 꾸짖더라. 선하지 않은 자가 군자를 미워했으니 이 무슨 흠이 되리(姿僞肆誕世有聞人 梟鳳殊性載怒載嗔 不善者惡君子何病).' 이경석을 중년 이후 괴롭혔던 '오랑캐에게 붙어먹었다'는 비난은 노론 독재 시대에 펄펄 살아 있었다. 박세당은 그 세태를 비웃은 것이다.
송시열이 올빼미라니. 때는 글귀 하나를 핑계 삼아 정적 목을 날려버리는 노론 독재 시대였다. 홍계적 등이 청하기를 "세당이 주자의 학설과 어긋나고 다름이 있으며 이경석 비문에 송시열을 침범해 욕한 말이 있나이다. 글은 거두어 물과 불 속에 던져버리고 박세당은 성인을 헐뜯고 현인을 업신여기는 죄로 다루소서." 이에 숙종은 "박세당의 글이 성리학에 반하므로 결코 내버려 두기 어렵다"며 비문과 그 책들은 태워버리고 박세당을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1703년 4월 17일 '숙종실록') 정적에 대한 비난과 맞비난이 누대에 겹쳐 또다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프레임에 정치가 갇히고 만 것이다.
결국 이경석 후손은 비문을 숨겨뒀다가 50년 뒤에야 신도비를 세웠다. 이후에도 비석은 수난을 받았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비석에서 글자들이 죄다 깎여나가더니 결국 땅에 묻혔다. 분노한 노론 짓인지 공포에 질린 후손이 한 일인지 알 수는 없다. 왕조가 사라지고 식민지가 사라지고 공화국 대한민국 시대가 와서야 비석은 햇살을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 신도비 이야기, 정치 이야기였다.
사문난적 낙인과 박세당
세월이 흘러 1703년 소론 당수인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문을 지었다. 박세당은 유학을 노자와 장자에 빗대어 재해석해 교조주의 노론이 벼르고 있던 학자였다. 신도비문은 이러했다.
'시경에 말하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으니 감히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상서롭지 못한 보복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하늘의 도리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누가 보아도 이경석을 비난한 송시열을 두고 한 말이었다. 비문은 이렇게 끝난다. '거짓됨과 방자함과 허망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자가 있다. 올빼미와 봉황은 애당초 다른 새인데 화를 내고 꾸짖더라. 선하지 않은 자가 군자를 미워했으니 이 무슨 흠이 되리(姿僞肆誕世有聞人 梟鳳殊性載怒載嗔 不善者惡君子何病).' 이경석을 중년 이후 괴롭혔던 '오랑캐에게 붙어먹었다'는 비난은 노론 독재 시대에 펄펄 살아 있었다. 박세당은 그 세태를 비웃은 것이다.
송시열이 올빼미라니. 때는 글귀 하나를 핑계 삼아 정적 목을 날려버리는 노론 독재 시대였다. 홍계적 등이 청하기를 "세당이 주자의 학설과 어긋나고 다름이 있으며 이경석 비문에 송시열을 침범해 욕한 말이 있나이다. 글은 거두어 물과 불 속에 던져버리고 박세당은 성인을 헐뜯고 현인을 업신여기는 죄로 다루소서." 이에 숙종은 "박세당의 글이 성리학에 반하므로 결코 내버려 두기 어렵다"며 비문과 그 책들은 태워버리고 박세당을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1703년 4월 17일 '숙종실록') 정적에 대한 비난과 맞비난이 누대에 겹쳐 또다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프레임에 정치가 갇히고 만 것이다.
결국 이경석 후손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7/20190717001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