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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두문동 72현 허구

by 安喩齋 2018. 7. 9.

영조 16년 (1740) 두문동 이야기 출현   


두문동 72현이란, 고려 말에 지조있는 인사들이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협조하지 않고, 개성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한 72명을 일컬어 말한다. 

'고려 유생들이 단체로 조선의 과거시험을 거부하여서 과장에 한 사람도 없었다더라 급기야, 이성계가 그들에게 벼슬을 주며 출사를 청하였으나 거부하자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두문동에 불을 놓았으나 끝내 나오지 않아 모두 불타죽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웬만한 성씨들은 그들의 족보, 문집에 자신들의 선조를 두문동 72현으로 게재하고 자랑스러워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두문동 72현 이야기는 영조 때에 정치적 안정과 충성심을 꾀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두문동 72현의 생성과정 

굳이 따지면 현재 두문동 72현이라고 알려진 분들 가운데 행적이 확인되는 이는 태학생 임선미, 조의생 이 두 사람이다. 은거한 행적이 확인된다는 것이지 두문동에서 은거하다 불타 죽었다는 것은 아니다.

정조와 순조시기에 와서,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언급된 임선미, 조의생, 맹씨성을 가진 사람(혹은 맹호성)외에, 개성 유생들이 주장하여 4명이 추가 되었는데 직제학 성사제, 찬성사 박문수, 예의판서 민안부, 예의판서 김충한이다. 3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실현된 사례이다.  

성사제 후손이 두문동 실기 (杜門洞實記,1809년) 간행  

굴러 온돌이 박힌돌 뺀다고, 추가로 표절사에 배향된 직제학 성사제 후손이 조선 순조대에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1809년)를 간행하면서 400여년전 조상이 벼슬을 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은둔했다고 기록하고, 두문동 72현이라는 이들의 이름을 몇 명 게재해 놓았는데, 오늘날 두문동 72현 가운데 이름이 남았다고 하는 이들은 여기에 기록된 이들이다.  

또한, 1909년에 구홍(具鴻)의 후손이 자기들 선조 구홍이 두문동 72현이라고 주장하며 <송은실기松隱實紀>를 만들었는데, 부록 <두문제현충렬록 杜門諸賢忠烈錄>에는 박문수(朴門壽)를 비롯 구홍·성사제(成思齊)·조의생(曺義生)·임선미(林先味)·고천상(高天祥)·전귀생(田貴生)·이숭인(李崇仁)·이맹운(李孟芸)·전조생(田祖生)·조승숙(趙承肅)·채귀하(蔡貴河) 등 124명의 고려 유신들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연산군(燕山君) 때의 이행(李荇, 1478-1574)이 지었다는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 있다고 하나 고려 충신을 열거한 것이고, 저자 미상의 1923년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등이 있으나, 차원부처럼 아예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사람도 있으니 과연 누가 진짜 두문동에서 절의를 지키며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각 문중별로 조상의 행적을 두문동과 엮다보니 두문동 출신이라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72명에 맞추려니 자기 선조를 넣기 위해 다른 이를 빼어 명단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다(최근 사육신 명단도 이런 경우임). 결국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이 '어느 한 고을에 머문 고려 충신들'이 아니라 마치 고려말 충신 총람이 되었다. 

황희 정승마저도 두문동 72현으로 등장 

황희의 경우엔 아예 1890년에 황희의 후손들이 '황희 정승도 사실은 두문동 출신이었다'고 문집을 발간한 경우다. 그것도 황희를 문묘에 배향해 달라면서 그렇게 주장했다. 이 정도는 애교로 볼 수 있겠으나 조견의 경우에는 완전범죄가 대성공한 경우다. 뒤에서 별도로 언급하겠다.

이러다보니 이제는 '다른 곳에도 두문동이 있었다더라'라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실제로 강원도 정선군에 두문동재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그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고려 두문동 72인이 다 불타죽었는데 그 중에서 7명만 살아서 여기서 살았다하여 두문동이라 한다'라는 이야기까지 써놨다. 불타 죽었다라는 건 전설이니 이런 지명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원래는 개성인근 지역명이었던 두문동이 명성을 얻음에 따라 다른 지역 지명으로까지 퍼져나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두문동 이야기의 변천과정

이른바 두문동 불 지르기는 한식의 유래인 진문공과 개자추의 일화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또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는 뜻으로 조선 왕조 이전인 고려 고종대의 이규보의 간찰에서 ‘두문불출’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 말은 당 태종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에도 나오며,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에도 두문불출이 기록된 바 있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보다 먼저 나왔고 두문동은 두문불출에서 유래되었으니 앞뒤가 전도되었다.

또 세간에 잘 안 알려진 이야기로 사실 72명 두문동은 문신만 기거하는 서두문동이고 동두문동이라고 해서 48인의 무인이 따로 은거했다더라라는 얘기도 있다. 

두문동 설화가 유포된 배경

두문동 72현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당시 국왕인 영조 의도에서 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 때부터 경종 (조선의 제20대 왕 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독살설에 시달렸고 정미환국(영조3년, 정미년1727) 이인좌의 난 (영조4년, 1728년 음력 3) 등 영조에 반발하는 무리가 즉위 초부터 만만치 않았다. 또 이 이야기가 알려진 영조 16년은 경종 시해 음모죄로 처형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무죄이며 영조의 충신임을 선언한 경신처분(영조 161740년)이 있었다. 즉 영조에게는 일편단심 왕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과 그의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매우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능행길에 두문동 이야기를 끌어내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정을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72현까지 배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도 모두 영조대에 시행된 정책이다.

결국 영조가 두문동비를 세운 건 맞는데, 정작 그 고려 유신 72명이 실제로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 새 왕조에 저항을 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의 윤색이다. 조선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들이 섬겼던 왕이 때려 죽인 포은 정몽주나 사육신을 추숭하면서 그들의 충성을 본 받으라는 예시로 내세우며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 당장 사육신 이야기만 해도 당대에는 소설로 취급받았던 추강 남효온의 <육신전>이 공인 정사로 취급 받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왕조가 얼마나 충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천인공노할 두문동 72현    

조견(趙狷,1351 ~ 1425)의 경우, 그가 살았던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을 보면 조견은 조선 개국시부터 멀쩡하게 출사해서 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0년(정종 2)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1402년(태종 2) 도총제(都摠制) 재직 중에 사은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칭하여 이를 사퇴하였다. 이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직첩을 몰수당한 뒤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었다.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으며, 이 해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충청도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자기 딸이 공녀로 차출되자 이를 저지한 일로 개령에 부처되었다. 곧 사면되어 청성군에 봉해졌다.
1410년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태조 진영(眞影)을 완산부(完山府)에 봉안하였기에 현재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이성계의 영정은 이 때 조견이 주도하여 설치한 것이다. 1419년(세종 1)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보임되고, 1421년 3월 71세로 퇴관해야 했지만, 궤장(几杖)을 받고 계속 벼슬길에 있다가 같은 해 12월 평성부원군에 진봉되었으니, 개국공신에 온갖 벼슬을 다 하고 영화를 누리며 평성부원군에 오르고 세종에게 궤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두문동은 고사하고 어디에서도 은둔하다가 억지로 나온것도 아니다. 더구나 세종 실록에는 원로대신으로 표기되었고 그가 죽자 시호로 평간(平簡)을 내렸으며 실록에 졸기까지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백 수십년 후의 1779년의 정조실록 (3년, 2월 29)에는, 조견의 후손 조항(趙沆)과 경유생(京畿儒生)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고려조(高麗朝) 때 온전히 절개를 지킨 신하들 가운데 월등히 뛰어나다고 칭송할 만한 사람은 오직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뿐이라고 합니다. ...조견은 곧 평양백(平陽伯) 조준(趙浚)의 아우입니다. 고려조의 국명(國命)이 바뀌자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는데 태조(太祖)께서 그의 거처로 거둥하여 조준을 시켜 데리고 나오게 하였으나 조견은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태조께서 청계(淸溪) 한 구비를 봉(封)하여 주었습니다. 숙묘(肅廟) 임진년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사천(沙川) 땅에다 묘우(廟宇)를 짓고 두 신하를 나란히 제향(祭享)하였는데 유독 조정의 은액(恩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표양(表揚)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소서." 그러나 허락하지 안았다.
그러자 1784년 경기유생 정동우 등이 다시 상소하기를 
"고려 말엽의 충절신(忠節臣) 남을진(南乙珍) 조견(趙狷)의 사원(祠院)이 아직도 선액(宣額)하는 명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인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정몽주(鄭夢周)와는 친하게 지냈으며 명예와 절개를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준이 〈태조를〉 익대(翊戴)할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세가(喬木世家)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 달가(達可, 정몽주) 는 국가의 주석(柱石)같은 존재이니 만약 구하는 것이 달가와 다르면, 이는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며 국가가 멸망하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조준이 그의 뜻을 알고 영남(嶺南)으로 떠나게 하였는데, 미쳐 돌아오지 못해서 고려 왕조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으므로,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옮겨서 청계산(淸溪山)에 머물었는데,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임명하자 조견이 말하기를, ‘송산(松山)에서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성세(聖世)의 백성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날 태조 조준과 10수 기(騎)를 따르도록 하여 청계산에 거둥하자, 조견이 굳게 누워 이불로 낯을 감추거늘, 태조가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자격으로 서로 볼 수 없겠는가?’라고 하자. 그제야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지 않았는데, 청계산 일면(一面)을 봉(封)해 주고 석실(石室)을 쌓아 정절(貞節)을 표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견은 지금의 임금이 〈석실을〉 쌓도록 명한 것이니, 구국(舊國)의 신하가 거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즉시 양주(楊州)로 옮겨 머물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산(松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두 신하가 충절을 지켜 신하가 되지 않은 뜻은 은(殷)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나 제(齊)나라의 왕촉(王蠋)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많은 선비들이 재물을 모아 사천(沙川)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빨리 화액(華額)을 내려 주도록 하소서."하였는데,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790년에는 경기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아이 때부터 경학(經學)에 열중하였습니다.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달가(達可)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준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 조준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준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楊州)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遺民)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鐵)·석(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합니다. 이 두 신하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금석을 뚫을 만합니다. 비록 따로 서원을 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응당 한 사당에서 제사지내주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야가 다같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명하여 조견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행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여기까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형편이니 이 이외에도 반드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이런 일련의 자료를 근거로, 고려조의 충신이라면서 정조한테 화액을 청하니 정조 22년(1798)에는 시행케 하고  절의를 기리는 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삼귀서사(三歸書社)에 화액을 내리고 삼귀서사는 순조 3년(1803)에 조견의 호를 따서  송산사(松山祠)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도 고려 충신 운운하며 지자체 지원금으로 사당이 유지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대체 무슨 염치로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정말 고려에 대해 절개를 지킨 다른 사람들이나 진짜 이름없는 유생으로 절의를 지킨 이들이 본다면 어이 없는 일이다.

결국 소위 두문동 72현은 절대적인 충성을 얻고자 옛 왕조의 충신들을 띄운 조선왕들의 욕망과 선조들의 충절을 띄워 충신의 자손이라는 명망을 얻고 싶어한 후세사람들, 후손들의 욕심이 버무려진 것이라고 밖엔 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정말 두문동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절의를 지킨 이름없는 이들을 모욕하는 떠도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