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1.19 17:17 | 수정 : 2012.01.23 11:31
설 특집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의대 교수·병원 과장직 던지고
2009년 쪽방촌 무료병원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신도림 방향으로 1~2분, 불과 30여m를 걸어가면 ‘이곳이 서울일까’란 생각이 들 만큼 초라한 동네가 눈앞에 나타난다. 집과 집을 양철지붕으로 서로 이어 붙인 쪽방들.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서기만 해도 꽉 차는 좁디좁은 골목. 그 골목 어디쯤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조차 없을 만큼 동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퀴퀴한 냄새까지. 세상이 숨찰 만큼 빠르고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거꾸로 시간을 30~40년쯤 뒤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32번지 쪽방촌 모습이다.
이곳 영등포 쪽방촌 골목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3층 건물의 요셉의원이 있다. 이 요셉의원에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가 있다. ‘영등포 슈바이처’ 신완식(61) 박사다.
요셉병원은 1987년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불리던 고(故) 선우경식 박사가 ‘세상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위해 세운 무료병원이다. 선우경식 박사가 200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사라질 뻔했던 이곳을 지키겠다며 나선 이가 신완식 박사다. 신 박사는 감염내과 분야 한국 최고 권위자다. 2년 전만 해도 신 박사는 가톨릭의대 교수이자 여의도성모병원 내과과장,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과 가톨릭 생명위원회 위원까지 겸직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다.
이곳에선 늘 부끄러워진다
그가 2009년 2월, 정년까지 6년이나 남아 있던 교수직을 내던지고 단 한 푼의 보수조차 받지 못하는 요셉의원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지금 치료비 한 푼 낼 수 없는 노숙자와 행려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이곳 영등포동 쪽방촌을 지키고 있다.
1월 6일, 2012년의 첫 금요일에 찾은 요셉의원 2층. 진료실에서 만난 신완식 박사의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가슴으로 웃는 법을 알았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찾았다”고 했다.
“제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또 교수로 부족한 것 없이 나만을 생각하며 살 때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말이지요. 제가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저보다 일찍 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청소를 해 주시는 분들. 술 취하고, 더러운 행색으로 밀려드는 환자들을 마치 자기 몸을 씻어내듯 닦아주면서도 단 한 번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을 하루도 빼지 않고 마주하게 됩니다. 그분들을 마주하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더군요. 이분들뿐 아니지요. 차가운 우리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쓰러졌던 분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하루에도 수십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되더군요. 그분들을 통해 오히려 제가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쪽방촌 요셉의원의 천사들
요셉의원에서 그는 너무나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신 박사가 “이곳에서 만나는 천사들로 인해 늘 한없이 부끄러워진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셉의원에 종종 들러 목욕봉사를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 그분이 병원에 오신 날 하반신을 못 쓰는 행려 환자가 실려 왔지요. 얼마나 안 씻었는지 몸 전체에서 심한 악취가 났어요. 치료를 위해 발과 항문을 반드시 씻겨야 했는데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저조차 발과 항문 주위를 씻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봉사자 분께서 조용히 행려 환자의 옷을 벗기더니 환자의 발에 따뜻한 물을 몇 번 적시더군요. 그리곤 그 발에 입을 맞추셨지요. 그 순간 봉사자 분의 표정에선 더 이상 악취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발과 항문 주변까지 깨끗이 씻겨 주셨지요.” 그는 “불과 30여분쯤이었다”며 지금껏 자신의 기억이 담아낸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했다. “‘천사가 살아있다면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지 못했던 제 자신에게 ‘부끄럽다’란 게 어떤 건지 처음 알게 됐습니다. 또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사는 법을 그제야 알게 됐지요. 지금은 그분 같은 천사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신 박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감사함을 배울 수 있어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던 그가 영등포 쪽방촌의 무료 진료소에 둥지를 튼 이유는 무엇일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의대교수를, 그것도 정년을 6년이나 남겨 두고 왜 그만뒀냐’는 게 가장 궁금한 모양입니다. 사실 딱히 답할 수 있는 이유가 없어요.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니까요.”
그는 “막연히 ‘의사 신완식, 교수 신완식’으로만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의대 졸업과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치고 전문의가 됐을 때 ‘이제 개업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힘들게 공부한 만큼 세상과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시더군요. 그 말에 개업을 접고 학교에 남아 교수까지 했던 겁니다. 근데 50줄에 접어들면서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또 생각나더군요. 물론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까’를 그려 놓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 사이, 신 박사는 곧 60줄에 들어서게 될 자신을 생각하니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냥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사표를 냈던 겁니다. 어쩌면 막연한 공명심이나 정의감을 하늘에 계실 아버지나, 제 주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뭐 그렇게 의대와 병원에 사표를 냈던 겁니다.”
2009년 초 사표를 낸 그 길로 신 박사는 작별 인사를 위해 자신을 마냥 믿어주기만
지난 1월 6일 서울 영등포 쪽방촌 요셉의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근로자들.
“행복한 자원봉사자 얼굴 보며 대학병원 과장 때는 잘 하지 않던‘고맙습니다’를 말하게 됐다”했던 가톨릭중앙의료원장 최영식 신부를 찾아갔다.
“사표 내고 처음 찾아뵌 분이 최영식 신부님이었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라고 고백했어요. 신부님께선 ‘행여 그런 말 하지 마시라’며 농담인 줄 아셨나 봐요.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긴 했지만 언젠가 그렇게 할 거라 짐작은 했었다’며 웃으시더군요. 그리곤 ‘이제 뭐하시게요?’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계획이 없어요’라고 솔직히 말씀 드렸어요. 그러자 ‘전부터 상의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며 2008년 돌아가신 선우경식 박사님과 요셉의원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입으로 꺼내진 않으셨지만 신부님 눈이 ‘신 박사님 그곳에 둥지를 터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걸 알았어요. 사실 제가 어른들 말씀 참 잘 듣습니다.(하하하) 고민이고 뭐고, ‘아 왜 그런 자리 이제껏 얘기 안 했냐’고 말한 후, 다음날부터 요셉의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겁니다.(하하하)”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참 많이도 아파하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몸 아픈 사람이야 X레이 찍어주고, 약 주고, 정 안되면 수술이라도 해주면 되지요. 그런데 여기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서 더 아픈 거랍니다. 고쳐 주기도, 보듬어 주기도 힘든 마음의 상처에 아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서, 뜻하지 않았던 단 한 번의 실수로 세상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을 향해 너무 깊고 가혹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도 울고, 요셉병원 사람들도 울고, 쪽방촌 사람들도 함께 울었던 기억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노숙자나 행려자입니다. 돈도 없고, 연고도 없지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마 여기에 오기 전까지 병원은커녕 약국에서 감기약 한번 얻어 먹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견디다 견디다, 더 이상 못 견딜 지경이 돼서야 이곳을 찾아오지요. 근데 그때는 대부분 손쓰기 힘들 지경이랍니다.”
그가 처음 이곳에 둥지를 틀고 얼마 안됐을 때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교도소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욱’ 하는 바람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 죄로 20년을 교도소에 있다 나왔지만 그를 받아줄 이가 우리 사회엔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 병을 얻었어요. 알고 보니 폐암이었지요. 손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겁니다.”
신 박사는 의사도, 이곳 원장도 아닌 그냥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에 사정했더니 치료는 해주겠지만 입원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서 항암치료를 받아보게 했지만 이미 몸이 견디지 못했어요. 마지막엔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더군요. 죽었습니다. 제 품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한 생명을 보냈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20년을 넘게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접니다. 근데 눈물이 나더군요. 머리를 아주 세게 맞은 것 같았어요. 이곳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더군요.”
그의 눈이 붉어졌다. 신 박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촉촉해진 눈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는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의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막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곳이 지금처럼 하루 100명이 넘는 노숙자와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일이 더 이상은 없어 제가 백수가 되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 아닐까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건 결국 우리 사회가 약자를 끌어안아 줄 만큼 포용력 있는 따뜻한 사회가 못 된다는 말이잖아요. 나와 다른 이도 품어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정부·서울시 지원 한 푼도 없어
요셉의원은 매일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 등 100명이 넘는 환자가 밀려든다. 기자가 찾았던 1월 6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 역시 초라한 행색을 한 노숙자와 행려자들의 행렬이 요셉의원 정문을 지나 밖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을 볼 때마다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이 가득했던 대학병원에서만 생활해 온 신완식 박사에게 요셉병원의 상황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어찌하겠습니까. 요즘은 조금 아쉽고, 빠듯한 이곳 살림이 저뿐 아니라 요셉의원 가족 모두를 좀 더 열정적으로 만드는 에너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가 요셉의원의 상황은 비슷한 전국의 다른 무료진료소들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고맙게도 주말이면 자원봉사 오는 의사와 간호사가 꽤 됩니다. 또 수술이나 정밀검사가 필요한 환자를 부탁하면 내치지 않고 응해 주는 몇몇 큰 병원과 의사들도 있지요. 이런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지방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셉의원은 정부나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보통 사람들이 한 푼 두 푼을 모아 보내준 성금과 자원봉사자들의 열정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 박사는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진 못하지만 꼭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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