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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역사)

by 安喩齋 2011. 11. 3.

  조선시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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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 사상의 흐름

조선은 주자성리학의 신흥사대부가 중심이 된 나라로 주자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사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자책봉과정에서 정도전성석린등의 간신들 의 사욕으로 적장자가 아닌 왕자를 세자로 추대하여 주자성리학의 핵심인 종법(宗法)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구테타를 반대하고 고려에 대해 충의를 지킨 목은 이색의 문하인 두문동 72현들의 제자들이  태조대의 성리학의 이념을 주도하였으나 불교는 여전히 일반화 되었다.

조선초 태종에게 암적 존재였던 정도전을 권력투쟁에서 제거한 후, 목은의 제자인 권근·하륜 등에 의해 암덩어리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비록 명나라의 것들을 모방하였지만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개혁을 서둘러 시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제도를 피상적으로 모방하는데 그쳤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태종대 후반에는 중화사전류의 검토를 통해 주자성리학의 이념에 맞게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일부의 지식인층에 의해 이제 막 받아들여진 주자성리학은 당시 주자성리학자들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일반에는 아직 보급조차 안되어 있었다.

이에 세종대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주자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노력하면서 송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삼아 한·당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주자성리학의 이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수준에 맞추어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세종대의 이러한 노력은 세조의 왕위찬탈로 역행하게 되었는데, 세조는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패도정치를 지향했으므로 왕안석의 신법을 모델로 하여 개혁을 추진하였고, 불교를 장려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추구하는 주자성리학의 이념에 역행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사육신(死六臣)·생육신(生六臣) 등과 그 후예들이 주자성리학의 이념을 일반에 확산시켜 갔다.

따라서 성종대에 이르러 등장한 사림파들이 주자성리학을 일반에 정착시켜 갔고 이를 위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권세를 누리던 이인손의 아들 5극 형제 중 한명인 이극돈과 임사홍이 연산군 때 만고 역적행위로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 : 연산군 4년; 1498)와 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 10년; 1504)를 당하여 그 동안 이루어졌던 성리학적 질서가 붕괴되었고 조선은 그동안의 질서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성리학적 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연산군 때 사화로 몰락한 영남 사림파를 대신하여 기호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정치 실현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이들의 이상을 좌절되었다.
살아남은 사림파들은 현실에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신들의 근거지에 서원을 만들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사단(四端)·칠정(七情) 논쟁과 인심(人心)·도심(道心) 논쟁이라는 심성(心性)논쟁으로 인한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와 중종 38년(1543)에 수입·간행된 『주자대전』을 대상으로 하여 주자성리학의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주자성리학의 자기화(自己化)라는 두 가지 방향이었다.


이 두 가지 방향에서의 성리학 연구는 퇴계 이황이 『심경후론』을 지어 성리학의 심학화를 진행하고, 『주자서절요』를 지어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자가학설(自家學說)을 피력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를 통해 주자학의 표면적인 이해는 완벽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성리학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율곡 이이(1536~1584)에 의해 이기일원론이 등장하면서 주자성리학은 외래 사상에서 조선의 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질서가 조선의 전 계층에 뿌리를 내리게 되어 1400년대 까지만 해도 사대부 계층에 한정되었던 삼년상 제도가 1500년대에는 양인과 천민까지 확대되었다.


2. 조선후기 사상의 흐름

조선후기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명학(陽明學)·실학(實學),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라는 용어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리학의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성리학은 성(性)을 이(理)로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실학자 중에서도 성(性)을 이(理)로 보는 성리학자와 성(性)을 이(理)로 보지 않는 탈성리학자로 구분해야 한다.
기존의 주자를 부정하는 양명학자들을 실학자로 구분해서는 안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자이므로 성리학을 탈피하여 성(性)을 이(理)로 보지 않으려는 북학파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율곡계열의 성리학자들은 율곡의 기발이승지(氣發理乘之)설에 입각하여 조선성리학의 이해를 진전시키려 하였는데, 율곡의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으로 집대성된 조성성리학을 계승하여 현실을 개혁하고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대부분 1600년대에 우암 송시열이 기(氣)중심설을 강화하는 입장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람들이 균전제를 통해 지주전호제의 폐단인 토지겸병의 모순을 해결하고, 당시에 장시(場市) 등을 통해 상공업이 발당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여 대동법 등의 조새균등론을 통해 정전제(井田制)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우계 성혼(1535~1598)의 계통을 잇는 소론계통의 학자들은 현실에 맞는 보편성을 추구하는과정에서 기본적으로는 율곡의 기발이승지(氣發理乘之)설에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양명학을 수용하여 이(理) 중심의 관념적인 성리철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소론의 성리철학은 박세당 등의 학자들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양명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조선화된 조선양명학이었다.

이러한 것들과는 달리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을 계승한 학자들은 더 이상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퇴계설을 굳게 지키거나 이발기수기(理發氣隨之)의 이(理)를 기(氣)의 개념으로 전환시켜서 시대 변화에 대처하였다.
여기에 기호 남인계통 학자들이 합류하면서 퇴계학파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각 학파간의 성리철학의 차이는 경학에 대한 입장에서도 차이를 보여 주자(朱子) 주(註)를 통해 경전을 해석하려는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와 주자주를 무시하고 경전을 해석하려는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로 구분되고 있다.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는 주자의 해석을 검토하면서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고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는 주자의 해석을 탈피하여 자신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하여 성리철학의 체계적 인식에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해하는 과정은 화이론에 입각한 북벌론과 사회구성원리인 종법 이해에 따른 예송논쟁의 시작에 의한 붕당간의 이념논쟁으로 비화되어 학파간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념논쟁에서 율곡계통의 서인이 승리함에 따라 율곡학파가 이후의 학파와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당파간의 경쟁이 점차 과열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17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파 간의 과열된 경쟁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탕평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성리학의 이념논쟁에서 패한 퇴계학파는 퇴계를 다리로 하여 주자를 직접 이해하려는 성호우파인 순암 안정복(1712~1791) 계열과 성리학을 버리고 당시에 전래되고 있었던 서학 중 천주교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성리학과 대결하려는 성호좌파인 광암 이벽(1754~1786) 계열로 나뉘었다.
이들은 1600년대를 이끌어 온 율곡 계열의 조선성리학에 대해 자신들이 실학을 한다고 표방하였으나
이렇게 자주성과 비자주성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됨으로서 당시에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개혁파에게는 주변의 견제세력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서인들이 율곡 계열의 노론과 우계 계열의 소론으로 나뉘면서 학계를 주도하였고, 노론 내에서는 율곡의 조선성리학 이해문제로 호파(湖派)와 낙파(洛派)로 분열되어 대논쟁이 벌어졌다.
호락논쟁은 숙종 34년(1708)에 『맹자』와『중용』에 있는 주자주의 해석이 발단이 되어 벌어진 논쟁으로 성리학 자체가 시대 변화에 따라 주도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도이념으로 재구성하여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보편성 즉 본질을 강조하는 낙파가 고증학을 수용하여 북학사상으로 재구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앞 시기의 전통을 이어 새로운 학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이 시기의 학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종합적인 정리에 대한 노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백과사전적인 경향은 이미 『지봉유설(芝峰類設)』·『성호사설(星湖僿設)』이래로 있어 왔으나
이 방면을 집대성한 것은 북학파의 비조 서명응의 손자인 풍석 서유구의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와 북학파 이덕무의 손자인 오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箭散稿)』이다.
『임원십육지』는 일상생활로부터 산업·문예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언급한 것이며,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천문·지리·정치·경제·사회·역사 등
학문의 전분야에 걸친 방대한 사실들에 대한 변증(辨證; 고증(考證))을 실은 것이다.

또 다른 이 시대의 특징은 고증학적 방법을 들 수 있다.
이규경이 고증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고증학의 대표적인 학자는 추사 김정희였다.
그는 북학파의 박제가에게 배우고 다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에게서
청조고증학을 배워 금석문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러나 김정희는 고증에만 그치지 않고 학문을 구별하지 말고 실제 일에 옳은 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경학사상 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위당 신헌, 운미 민영익, 중인인 역관 오경석 등을 가르치면서
근대사회를 이끌고 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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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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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역사인식 

한나라 이후 불교·도교가 성행하면서 쇠퇴하였던 유교는 당 태종의 유교 부흥정책으로 한나라 이후의 훈고학(訓?學)이 재정비되면서, 당말오대(唐末五代)를 거치면서 불교·도교의 철학적 우주론을 바탕으로 의리명분의 정통론에 입각한 신유학으로 변모하여,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주자성리학으로 집대성되어, 동양사회에서는 주자성리학을 이해하여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조선이 기자(箕子)가 중원문화를 전달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중화가 되기 시작한 기자조선의 정통을 이어 받는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여 건국한 이후로 주자성리학 이해가 진행됨에 따라 기자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이 강화되면서 기자·마한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이 주자성리학자인 양촌 권근(1352~1409)의 『동국사략』에서 이미 표방되었고, 『삼국사절요』·『고려사』·『고려사절요』등 왕조사로 정리되어 사림파가 등장하는 성종대의『동국통감』에 이르러 체계를 잡아갔다.

이들 역사서는 성리학적 정통론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민족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에서부터체계화하려는 공통된 역사의식에서 편찬되었다.
이것은 고려 후기 편찬된 『삼국유사』나『제왕운기』같이 단군부터 정통을 확립하려고 했던 역사의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리학적인 역사인식을 발달시켜가면서 한편으로는 당대의 역사를 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
왕조실록은 『태조실록』을 만든 이후 역대 왕은 선대왕의 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역대의 실록은 사초(史草)를 기준으로 『의정부등록』·『승정원일기』·『시정기』 등을 자료로 하여 실록청에서 만들었다.


왕조실록은 편년체(編年體)의 정사(正史)로서 4군데의 사고(史庫)에서 보존케 하였다.
왕조실록은 태조~철종까지 25대의 실록이 총 1893권이 현존하고 있다. 실록은 그 분량이 너무 많아서 열람이 어려우므로 세조 때에 역대 군주의 치적 중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국조보감』을 만들었다.

또한 전조(前朝)인 고려의 역사도 태조대에 정도전이 왕명에 의해 『고려사』를 편찬하였지만 그 내용이 불완전하여 다시 고쳐서 문종 1년(1451)에 현존하는 『고려사』가 만들어졌다.
이 역사서는 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로 이루어진 기전체의 사서로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내용들이 왜곡되어 있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편년체(編年體)로 된 『고려사절요』가 만들어졌다.

16세기에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됨에 따라 좀더 철저한 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요구되었고, 이를 반영한 역사서로 눌재 박상(1474~1530)의 『동국사략』과
몽와 유희령(1480~1552)의 『표제음주동국사략』이 있으며, 고요당 박세무(1487~1554)의 『동몽선습』에도 나타나있다.

 
또한 16세기 사림들에 의한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이로 인한 기자연구의 집대성은 이후 17·18세기에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체계화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2. 조선후기의 역사인식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이 토착화되어 역사서술체제에서는 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하여 문자표기로 포폄(褒貶 :칭찬과 나무람, 시비선악을 가림)을 가리는 강(綱)과 목(目)으로 서술하는 강목체(綱目體) 사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중원문화를 전달한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보면서 위만조선을 찬탈자로 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제외시키는 등 화이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회이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중화로 보는 역사인식은 중화의 본질 자체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주자성리학적 이기관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민족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미 『삼국사기』에서부터 소중화로 자처하던 문화적 자부심은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의 건국으로 더욱 강렬해져 신흥사대부들은 조선이 중화라는 것을 밝히고 그 연원이 깊음을 천명하기 위해 동이(東夷)에 중화문화를 확립해 준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삼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중원문화가 기자조선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리의 중원문화가 주대(周代)와 시대적으로 대등하나 공자에 이르러서야 화(化)를 이룬 중화의 중원문화에 비해 내용적으로는 더 연원이 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전기에는 기자조선만이 강조되어 왔으나 16세기부터는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18세기에 이르면 단군조선에서부터→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정통이 이어짐을 명확히 하고, 성리학의 심화된 이해로 종법질서가 일반화된 것과 맥을 같이하여 단군을 요순(堯舜)에 대치시키고 기자를 주공에 대치시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계보를 정립함으로써 단군조선이 요순시대와 함께 존재하는 이상사회로 올라가고 중원문화의 기원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군과 기자를 내세워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중화문화 유교문화의 연원이 깊다고 보고 조선(朝鮮)=중화(中華)라는 조선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에 근거한 화이론적인 민족주의 의식이었고 이는 뒤에 위정척사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의식이 국수적인 입장을 나타낼 정도로 강화되면서
민족의식을 표방한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연관이 있었는데, 당시 한족이 세운 명이 오랑케라 여겨진 여진족이 세운 후금(후에 청으로 이름을 바꿈)에게 멸망당하고 중원문화의 중심지인 중원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라서 중원문화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고, 이에 조선성리학자들은 조선에서의 중화문화의 기원과 그 정통의 전승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위에서 밝힌 이유에 따라 단군→기자로 이어지는 정통론이 체계화되었다.
여기에 명이 망한 후 명황제의 제사를 조선에서 지내 중국과 조선에서 내려오던 중화의 정통이
조선으로 합쳐지게 되어 조선만이 중화의 문화를 계승하였다는 조선제일주의가 표방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역사인식을 대표하는 사서들로는 서인인 시남 유계(1607~1664)의 『여사제강(麗史提綱)』(1667)과 남인인 목재 홍여하(1621~1678))가 쓴 『휘찬여사(彙簒麗史)』, 1672년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이 있다.

한편 숙종 초의 남인인 미수 허목(1595~1682)은 1670년대에 『동사(東事)』를 써서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숙종 말년에 소론 학자 노촌 임상덕(1683~1719)은 1710년대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써서 고대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고 있다.


또한 허목의 계통을 잇는 성호 이익(1681~1763)은 삼한정통론을 지지하면서 정통의 시작을 단군부터로 보았고, 이러한 입장은 제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에게 전수되어 기자이전에단군시대부터 이미 유교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단군·기자·삼한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완성하면서 위만조선을 찬탈왕조로 다루고 발해를 말갈왕조로 보아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켜 버렸는데, 이는 조선성리학자로서 당연한 인식이었다.

반면에 담헌 홍대용(1731~1783) 이후 북학 사상가들은 북벌론과 정반대 되는 북학을 주장하면서
조선 = 중화라는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하고 조선 = 동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하여 갔다.


이에 따라 화이론적인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은 부정되고 강목체 서술방법도 지양되었다.
오히려 계속 정통에서 제외되어 연구되지 않았던 발해왕조가 북학사상가들 대부분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옥유당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우리나라의 하나의 왕조로 다루어져 위만조선과 함께 세가(世家)에 기록되었다.

이와 함께 경전 자체의 고증을 바탕으로 기자동래설이 재검토되면서 당시까지 중국인으로 다루어졌던 기자를 동이족 중의 한족(韓族)으로 봄으로써 조선 = 중화라는 인식 대신에 조선 = 동이(東夷) = 한(韓)이라는 인식이 새롭게 확립되었다.

이는 발해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여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확립해 가는 북학사상가들이 화이론적인 정통론을 확립해 가는 성리학자들의 역사인식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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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그림과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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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그림

조선전기의 회화는 주자성리학자들을 거쳐 내려온 조맹부(1254~1322)풍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조선서화 풍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안평대군(1418~1453)을 중심으로 활약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각기 중국의 고전적인 그림을 이해하고 각기 취향에 맞는대로 자기화 하였다.
도화서 화원인 안견은 북송원체화 풍의 아주 세밀한 그림의 선구를 이루었고, 안평대군의 처종제(?從弟)로 명문의 후예이며 집현전 학사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꼽히던 강희안은 수묵화의 선구를 이루어 장차 궁정학파(宮庭學派)와 사인학파(士人學派)의 유파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세기 후반에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한훤당 김굉필(1454~1494)과 같은 사림의 종장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사대부화풍을 주도해가고, 왕실에서도 성종(1469~1494)과 이성궁 관(1489~1552) 등이 그림을 그려 화원화풍을 이끌어 갔으나 성종이 성리학에 심취하여 사대부와 같은 취향을 보임으로써 점차 사대부화풍을 추종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산군 시대의 무오(戊午, 1498년)·갑자(甲子, 1504)의 양대 사화로 사림세력이 크게 꺾여 사대부화가들의 진출이 어려워졌지만 중종대 조광조(1482~1494)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세력이 재등장함으로써 사대부화풍이 다시 성행하였다.

 
비록 기묘사화(1519)로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이 참화를 입었으나 이들은 모두 서화에 능하여 조선중기 화풍을 사대부화풍을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김종직의 손제자들에 해당하여 김종직으로부터 한원당 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사대부 화맥을 이어가서, 중종조의 화원화가를 대표하는 학보 이상좌(?~?)까지도 사대부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주자성리학은 조선성리학으로 심화되었는데 이 단계에서는 양성당 김시(1526~1595)와 같은 사대부화가가 나와서 남송원채화풍에 근간을 두었던 사대부화풍을 보다 조선화 시켰다.

그림에서 화원 이신흠(1517~1631)이 비록 실패하였지만 진경풍속화를 시도했고, 율곡계열의 사대부 화가들인 탄은 이정(1541~1626)은 묵죽기법을 창안하였고 영곡 황집중(1533~?)은 포도그림의 기틀을 확립했으며 설곡 어몽룡(1566~?)은 묵매의 일인자가 되어 문인화에서부터 조선고유색을 선도하였다.
산수화부문에서는 인조반정(1623)에 참여했던 창강 조속(1595~1668)에 이르러 진경화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 조선후기의 그림

16세기 이후부터 17세기까지의 회화는 남송적 회화전통을 잇는 강렬하고 거칠며 간결한 묵법의 시정(詩情)어린 변각구도의 그림들이 정통성리학자인 창강 조속 등에 의해 그려지며 동국진경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이는 18세기에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자부심이 강화되면서 조선 고유색이 더욱 발전하였다.
사대부화가들이 앞장서서 조선의 진경과 풍속을 그려냄으로써 화원들도 이에 뒤따르게 되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을 확립하고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은 풍속화풍을 현재 심사정(1707~1769)이 남종문인화풍을 정립하였는데, 바로 이들이 사인(士人) 삼재(三齋)라 하여 진경산수와 풍속을 그려내어 조선 국화풍의 시조가 된 사람들이다.

특히, 겸재 정선에 의해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중국의 남종화기법을 종합하여 금강산준법 같은 독자적인 화법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동국진경의 대표작으로는 「인왕제색도」·「금강전경」·「경교승명도」 등이 있고, 본격적인 진경산수화풍의 문인화로는 관아재 조영석의 「현기도」 등이 있으며, 조선화된 남종문인화풍으로는 현재 심사정(1707~1769)의 「삼일포」등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화원화가를 살펴보면 우선 왕실 전속의 화원집안 출신인 단원 김홍도(1745~1806?)는
조선 왕조 후기의 회화사상 겸재 정선(1676~1759)과 쌍벽을 이루는 대화가이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비호아래 대성한 궁정화가로, 겸재 정선의 화풍이 사대부적인 질박·건실한 취향과 준경한 필치가 중심을 이루는데 반하여, 단원 김홍도의 화풍은 바르고 아담하며 품위가 있고
간결한 궁정취미와 그에 알맞은 섬세한 필목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총석정도」가 있다. 김홍도는 산수·신선·화분 등을 모두 잘 그렸으며, 특히 수법이 유명하지만 풍속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풍속화의 대표작인 「풍속화첩」에는 밭가는 광경, 추수하는 모양, 대장간의 풍경 등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상풍속이 주로 그림의 소재가 되었는데, 특히 「무악」과 「씨름」이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세기 말에 성리학적 명분론이 크게 풀리어 느슨해지고 척족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말기의 향락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짐에 따라 이를 반영하여 국화풍의 그림을 그린 혜원 신윤복(1758~?)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풍속화에 당시의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자신의 풍속화에 여속도를 그리면서 사대부가의 점잖은 여인네에서부터 민간의 아낙네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인들의 행태(하는 짓과 몸가짐, 행동하는 모양)와 기방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정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매우 은근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대개가 춘의(春意 : 남녀간의 정욕)를 나타내어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척족 귀족들의 향락적인 분위기를 비판하여 청조문인화풍(淸朝文人畵風)이 새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세기말 청조고증학을 수용한 북학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개혁 운동은 진경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표암 강세황(1713~1771)으로부터 청조문인화풍의 화풍이 나타났다.
이후 위항도인 박제가(1750~1805)·신위(1769~1845)를 거치면서, 청조고증학을 조선에 정착시킨 주사 김정희(1786~1856)에 이르러 새로운 화풍인 청조문인화풍이 확립됨으로써 순조 이후부터는 극도로 관념화된 감필체(減筆體)의 문인화풍이 화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에 나타난 것처럼 진경산수가 아닌 고차원의 이념적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는 사대부와 화원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추사화파를 계승한 이들로는 우봉 조희룡(1797~1859)·소치 허유(1809~1892) 고람 전기(1825~1854) 등이 있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과 운미 민영익(1860~1914)의 문인화도 같은 경향을 띄었다. 이렇듯 그의 화풍은 양반문인과 화원들에게까지 번져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17·18세기에 일어난 조선 국화풍(國畵風)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발전이 저지되어 조선 3대 화가의 한사람으로 불리우는 오원 장승업(1843~1897)같은 천재화가가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과 민씨세도 하에서의 개혁이 실패함으로 인하여 진경산수화풍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추사화풍은 중국화풍의 맹목적인 모방으로 전락하여 고유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3. 조선전기의 글씨

고려 말기 이래의 경향으로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평대군(1418~1453)이 있는데, 안평대군은 조맹부보다도 송설체를 수려하고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여 명(明)에서 조차 당대 제일로 꼽았으며 당시의 예술계에서는 그의 서체를 좇아 이후 송설체가 조선서체로 정착하게 되었다.


문종·성종을 비롯하여 최홍효·강희안(1417~1464)·박팽년(1417~1456)· 이개(1417~1456) 성삼문(1418~1456)·서거정(1420~1488)·성임(1421~1484)·박증영(1464~1494) 신공제(1469~1536)·임희재(1472~1504)·김희수(1475~1527)·성세창(1481~1548) 등이 송설체의 대가로 등장하였다.

서예에서는 주자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이해되면서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자기 서체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자암 김구(1488~1534)가 왕희지체와 거의 비슷한 인수체(仁壽體)를 이룬 것을 시작으로 청송 성수침(1493~1564)·하서 김인후(1510~1560)·퇴계 이황(1501~1570)·우계 성혼(1535~1616)·율곡 이이(1536~1584)·월정 윤근수(1537~1616) 등 대학자들이 뒤를 이어 독특한 자가서체(自家書體)를 확립해 감으로써 송설체의 굴레를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글씨는 송설체의 특징이자 결점인 연미지체(姸媚之體)를 벗어났지만 송설체의 성리학적 규범에 맞도록 근엄 단정하게 변화되어 조선화 되었다.

이렇게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변화되어 여러 문화현상들이 고유색을 나타내는 시대상황 속에서 봉래 양사언(1517~1584)과 석봉 한호(1543~1605)와 같은 대가들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의 서체는 송설체를 바탕으로 하면서우리 고유의 예술감각인 강경명정성(剛硬明正性)을 첨가하여 근엄·단정·강경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서체였다.


그래서 한석봉의 글씨는 명의 감식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특징은 조선성리학이 요구하던 서체였으므로 선조의 어필체(御筆體)가 되었고 왕실과 사대부 계층에서 따라 쓰게 되어,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석봉체는 전 조선을 석권하게 되었으며, 송설체는 청평위 심익현(1641~1683)·해창위 오태주(1668~1716)와 같은 왕실과 왕의 인척을 중심으로 남아 있다가 사라지게 되었다.


4. 조선후기의 글씨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사조는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 제일 먼저 양송체(兩宋體)와 미수체(眉·體)를 출현시켰다.
양송(兩宋)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1607~1689)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웅대하고 힘차며 장엄하고 정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한편, 탈주자학파인 미수 허목(1595~1682)은 주자 이전의 유학을 지향한 것처럼 서법(書法) 또한 삼대(三代) 문자로의 복고를 신념으로 하여 진위를 가리지 않고 고전체(古篆體)의 특징을 취하여 기이하고 옛스러운 서체를 이룩하였다.


허목의 서체는 그에게 배운 옥동 이서(1662~1723)에게 영향을 미친 듯한데, 이서는 「필결」을 지어 조선서예사상 최초로 서론(書論)을 남긴 서예이론가로서 그의 서예이론은 서(書)의 본질을 철저하게 『주역(周易)』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서의 서체를 세상에서는 동국진체라 불렀는데 이 동 국진체는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해졌는데, 윤순은 이론적으로는 이서의 왕희지 유일주의의 논리를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이를 정비하고 서체 자체도 김생(711~791) 이래 우리나라의 대가들의 서체를 소화하여 왕희지체로 절충·흡수함으로써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는데, 위부인(衛夫人)과 왕희지의 글로 되어있는 「필진도(筆陣圖)」를 기본으로 삼고 옥동 이서의 「필결」을 본받아 훨씬 더 방대한 체제를 갖춘 「원교필결」전후 양편을 지어 동국진체의 이론적 체계를 발전적으로 정비하였다.

이에 뒤이어 표암 강세황(1712~1791) 같이 북학을 이해하는 학자들이 이광사 서론(書論)의 근거가 되는 「필진도(筆陣圖)」를 부정하여 동국진체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하였다.
이 이후 북학파의 서체는 동국진체를 탈피하여 구양순체나 동기창체를 귀의처로 삼아 무징불신(無徵不信)의 고증적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어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한예(漢隸)에 바탕을 두고 여러 필체의 특별히 뛰어난 장점을 겸비한 추사체를 이루어내었는데, 이는 중국의 청조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1733~1818) 일파가 이상으로 하면서 이루어내지 못한 서예사상 이상적인 경지였다.
이러한 추사체는 중국 서예계에도 충격을 주어 추사보다 어린 중국 서예가들이 다투어 이를 추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자하 신위(1769~1845)·눌인 조광진(1772~1840)·이재 권돈인(1783~1859) 이당 조면호(1803~1887)·위당 신헌(1810~1888)·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등 명문 출신들과 이상적(1804~1865)·오경석(1831~1879)·김준석(1831~1915) 등 중인인 헌역관(漢譯官)들이 추사체를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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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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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문학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학문과 문장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을 문장론의 원칙으로 삼았으므로 기본적으로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도(道, 학문)와 문(文, 文章 내지 詞章)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도문일치론 이 송의 문학사조를 그대로 반영되어 주도적인 문학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학문이론은 현실적으로 쉽게 실현된 것은 아니어서 도학파(道學派)와
사장파(詞章派)의 대립으로 사화를 초래하기도 하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학문의 주류였던 한문학은
학풍 및 학파에 따라 일정 정도 다른 사조를 띠게 되었다.
건국 초 정도전(1337~1398)과 권근(1352~1409)은 관학풍을 조성하였고
권근의 제자대에 이르러 권우(1363~1419)·변계량(1369~1430·맹사성(1360~1438)·
허조(1369~1439) 등은 사장 중심의 관학풍(官學風)을 권근의 제자로서
목은의 제자 길재(1353~1419)는 영남 지방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양성하여
학풍(私學風)을 조성함으로써 이대(二大) 조류를 형성하였다. ( 길재를 정몽주의 제자라고 하는 것은 기대승이 잘 못 지적한 것으로 그것을 이제까지 정식으로 인용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정몽주의 제자라고 특별히 지적되는 인물은 없다 그들 모두가 목은 이색의 제자이다. 정몽주를 유학의 조라고 칭하는 것도 목은 이색이 제자인 정몽주에게 칭찬해 준 것이다. 이를 가지고 정몽주가 마치 목은 이색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하로서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고려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거짓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허수아비 공양왕을 세우는데 맨 앞장섰다. 이로 인해 9공신이 되어 많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한편 목은 이색은 이성계와 친하게 지냈으나 이성계의 정책에는 응하지 않았다.  정몽주는 허수아비로 세운 공양왕에게 신임을 얻자 이성계의 움직임에 의심을 품고 있다가 이윽고 한 패였던 정도전을 투옥시키고 동태를 파악하던 중 같은 무리였던 이방원에게 역습당한 것이다. 이는 역사서를 원전에의거 읽었다면 금방알 수 있는 것이다. 2차 3차 인용하면 절대로 모른다.   정몽주의 업적으로 단심가를 대표로 하고 있으나 이는 정몽주가 죽은지 225년 후에 심광세의 어린이용 노래책 해동악부에 처음 나타난다. 이 또한 위작이다.)
전자가 그 문사(文詞)에 대한 조예로서 국초 문화에 공헌한 반면에, 그들은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양대 조류는 세종대에 집현전에서 성리학 연구를 하면서 점차 도문일치론으로 진전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성리학이 체질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교 등 비성리학(非性理學)적 요소가 온전하고 있었고,
집현전 출신의 관료를 제거하면서 이루어졌던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비성리학적 요소는 더욱 부각되었다.
세조에 동조하여 살아남은 일부 학자들은 명분과 의리의 약점 때문에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발전시키지 못한 채
세종대 이래 문물 제도 정비에 주력하여 사장풍이 성리학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생육신 계열들이
재야에서 도문일치론을 발달시켜갔다.

성종대에 이르러 생육신 계열의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다시 도문일치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는데
연산군대에 일어난 조의제문(弔義帝文)에 얽힌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반면에 훈척들은 사장풍을 발달시켜 문학의 형식을 다양화시키면서 양적·질적인 성장을 하였다.
고려말에 이루어진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문화 수용에는
송대(宋代)의 사(詞) 문학과 원대(元代)의 소설도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 건국초에 경기체가와 전(傳)류의 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문학은 한글 창제라는 획기적인 성과 때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집현전 학자들을 다년간 동원하여 연구한 결과 창제(세종 25년, 1443)·반포(1446)된 한글은 그
동안 우리 말 소리를 정확히 낼 수 없었던 불편함을 해소시켰고,
그에 따라 중국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풍토에 맞는 국문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① 소설 : 김시습은 중국 명나라 초기에 구우의 『전등신화(前燈神話)』를
우리나라 민간설화를 배경을 번안하여 『금오신화(金鰲神話)』라는 소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지었고 그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하고 단종을 애도하였다.
또한 고려 후기의 설화문학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어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용재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등의 작품도 나왔다.

② 시조(時調) : 고려시대에 시작된 시조 문학도 선초부터 발달하게 되어
조선 개국의 정당성, 새시대 건설에의 포부, 호방하고 진취적인 기상,
고려에의 우국충절 등을 노래한 작품이 많았다. (이는 잘 못된 주장이다. 시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우리 말을 우리 글자로 표기하면서 부터 나타났다. 고려 말의 선현이 지었다는 시조는 실은 김천택이 청구영언에서 그들을 가차한 위작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시조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퇴계 이황의 도산 12곡이라고 본다. 그 전에 농암 이현보의 어보가는 최초의 가사 문학이라 본다. 정극인의 상춘곡 또한 위작이다.) 
시조 문학은 한글의 창제로 더욱 성장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시가(詩歌)로 형상화 되었다.

③ 가사(歌辭) : 한글 창제는 가사 문학의 발달도 촉진시켰는데,
고려 이래의 별곡체(別曲體)는 조선전기까지 계속되다가 점차 정리되어
장형시(長型詩)인 가사(歌辭)로 발전하렸으며
성종대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에서는 새로운 형체가 보여졌다. (상춘곡은 정극인 사후 350년이 지나서 그의 문집에 나타난다. 정극인이 상춘곡을 이를 그런 능력이 없었다. 상춘곡은 훈민정음 표기로  되어있는데, 당시 정극인은 훈민정음을 습득할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또한 위작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④ 악장(樂章) : 한글 창제 후 세종은 그 시행과 보급에 힘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동국정운(東國正韻)』·『석보상절(釋譜詳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등을 비롯한
많은 서적들을 간행하도록 하였는데,
『월인천강지곡』과 국문학 작품의 효시인 『용비어천가』는 악장(樂章)이라는
독특한 시형(詩型)으로 발전하였다.


2. 조선후기의 문학

이황과 이이의 출현을 거쳐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체질화되자
자기화된 고유사상을 바탕으로 곧 제반 문화 양상에 고유색이 발현되어
조선성리학의 이론적 기초 위에 수많은 문장가가 배출되어 도학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① 한시(漢詩) : 한문시에서는 17세기 초에
상촌 신흠(1566~1628)·계곡 장유(1587~1638)·택당 이식(1584~1627)·
월사 이정귀(1564~1635) 등이 이름을 날렸다.
18세기 진경문화가 만발하는 숙종 말~영조대에는
삼연 김창흡(1653~1722)이 진경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사천 이병연(1671~1751)이 이를 완성하였다.
이병연은 정선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전대에도 있었지만 중국의 역대 문장가들의 시풍을 모방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운자(韻字)를 따와 작품을 만들거나
중국고사를 인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상황에서 확실히 변모하였다.

이 시기 근기남인학파는 문풍(文風)에서도 육경(六經)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정치 권력을 잡고 있는 서인계열 특히 노론계열에 대해 재야 비판세력으로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노론계열이 조선성리학을 시대사상으로 하여 이루어낸 학풍과
그에 따른 문화현상들을 동리(東俚 : 동국적인 속됨)이라고 비판하였다.
영조대 근기남인학파 시인의 한사람인 혜환 이용휴는 압록강 이동(以東)의 시어를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이 쓰는 싯구를 모두 중국의 고전에 그 뿌리를 두었다.

이러한 학풍을 지닌 이용휴와 같은 시기의 사람인 이병연을 비교해 보면,
이병연이 조선문화와 조선의 산하에 대해 깊은 애정과 자부심에 찬 시어를 구사하여
중국의 고사에 얽매이는 학풍에서 탈피한 점은 확실해졌다.
이러한 흐름은 이병연의 스승 김창흡이나 그 형인 김창협에게 이미 나타나고 있었으나
이병연에 와서 뚜렷한 특색을 갖게 되는바
그의 친우 정선이 조선의 실제 풍경을 그림으로 구현해내는 진경산수화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성립된 것이었다.

② 소설(小說) : 진경문화로 불리는 문학경향은 소설에서는
숙종비 광산 김씨의 작은 아버지이면서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대사헌을 지낸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조선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둔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등의 한글 소설을 써냈다.
그외에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심청전(沈淸傳)』·『흥부전(興夫傳)』·『옥루몽(玉樓夢)』·
『춘향전(春香傳)』·『숙향전(淑香傳)』등의 가정·윤리·애정 소설과 『임진록(壬辰錄)』·
『임경업전(林慶業傳)』·『유충열전(劉忠烈傳)』등의 군담(軍談) 소설 등의 국문 소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허난설헌(1563~1589)·이옥봉(?~?)·의유당 김씨 등의 규방문학(閨房文學)과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계축일기(癸丑日記)』·
혜경궁 홍씨(1735~1815)의 『한중록(閑中錄)』등 의 궁중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③ 가사(歌辭) : 문학에서는 국문의 가사 문학이 송강 정철(1536~1593)에 의해 절정에 달하였으며,
「송강가사(松江歌辭)」·박인로(1561~1642)의 「노계가(盧溪歌)」·
김인겸(1707~?)의「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그 대표작이다.

④ 시조(時調)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국문학 부류로 자리잡은 시조는
후기에 들어와 정치 현상보다는 인간의 애환을 담은 사설시조가 출현하였다.
18세기 사설시조는 서리 출신의 김천택과 김수장(1690~?)에 의해서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로 편집되었다. 한글로 된 시가나 소설은 주로 불우한 하층양반이나
서얼·서리 혹은 평민층에서 창작되고 애독되었으며
내용이나 표현 기법으로 보아 이 시기에 서민 문학이 대두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18세기는 진경문화로 일컬어지는 조선문화가 한창 번성한 시기였지만
19세기로 올수록 조선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점차 퇴조하여
시대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가면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그 대체이념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은 상공업 중심으로 변모하는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사상이었다.
정조는 높은 학자적 소양을 갖춘 군주로서 그 자신이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으며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화정책을 시행해 나가면서 북학사상을 수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신사상으로서의 북학은 철학·역사인식 등 모든 면에서 탈(脫)성리학적이었고
그것은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하여
그러한 움직임을 견제할 정도로 북학파들에 의해
성리학적 고문체(古文體)를 탈피하는 문체가 등장하였다.

① 소설(小說) : 조선전기의 국문소설들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면서
조선의 고유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북학 사상가들은
박지원의 『양반전』·『호질(虎叱)』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리학적 이념을 탈피하고 있다.
특히 박지원의 작품들은 꾸밈없는 문체로 당시의 양반들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등
주제와 문체 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② 한시(漢詩) :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가 등장하여
북학을 학문적으로 성숙시키고 고증학을 발전시킨 위에 예술의 독특한 경지에 이르러
이 시기의 문화계는 그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정희의 문하에는
시·서·화 삼절(三絶)의 예술인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그들 중 중인 계층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시대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었고,
근대적 상공업사회에 적합한 기술과 행정능력을 겸비한 중인 계층이
새로운 사상인 북학을 수용하여 주도계층으로 성장하였다.
전(前)시대부터 중인 계층은 신분상승의 일환이었던 위항(委巷)문학운동을 추진하여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이들 위항시인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위항문학은 17세기 후반 숙종 연간부터 시작되었는데,
‘위항’이란 양반사대부를 제외한 하층 계층 전체를 일컫는 말로 기술직을 세습해온
잡직중인·서얼·이서 등이 주축이 되는 넓은 의미의 중인계층을 핵심으로 한다.
중인 계층은 북학사상을 수용하여 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하고
18세기부터 궤도에 오른 위항문학운동을 통해 지적 기반의 확대와 사대부에 필적하는
시·서·화의 교양을 쌓으면서 신분상승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북학적 소양에서 유래한 시무(時務)에 대한 인식과 선
진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방적 사고는 개화사상으로 발전되어
중인층의 문학운동은 이후 개화사상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러한 중인·서얼·서리 들의 문학은 철종 8년(1857)애는 유재건(1793~1880) 등에 의해서
『풍요삼선(風謠三選)』으로 편집되었는데,
여기에는 승려나 부녀자를 포함한 약 305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수집되어 있어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이로서 하류신분층에서 많은 문학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시사(詩社)를 맺고 있었는데, 장지완 등 7 명의 시사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이윤·김병연(1807~1863) 등과 같은 풍자시인의 존재도
이 시대 한문학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의식의 변화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종래의 양반 중심적인 문예를 비판하고
일반 민중들의 문학과 예술을 성장시켰다.
국문학에서는 박효관·안민영이 고종 13년(1876)에 시조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집했고, 특히 판소리가 성행하였다.
한민족의 독특한 문학인 판소리는 광대들이 청중을 상대로 장편의 이야기를
창(唱)으로 부르는 것으로,
19세기에 이르러 송홍록·모흥갑 등 명창이 나와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 사설이 12마당으로 정리되었다.
판소리 사설이나 가면극에는 양반에 대한 풍자가 들어있어
사회적 모순에 대한 울분을 들어낼 수 있었다.

또 평민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예(演藝)로서는 가면극이 있었다.
춤·노래·사설을 섞어 진행하는 가면극은 무격적 요소가 들어 있어서 대중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극중의 사설에는 대개 양반을 희롱하고 풍자하는 대목들이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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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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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음악

음악은 정치 교화 수단의 하나로써 극히 장려되었고, 전통음악과 중국음악을 함께 정리하여 민족음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는 세종대에 박연(1378~1458)이 아악을 연구·집대성하고 이를 이어 받아 성종대의 학자 성현(1439~1504)은 이를 총정리하고 악률·악기·악무 등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매어 국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또한 세종대의 박연은 아악을 정리하여 「여민락(與民樂)」등의 우리나라 식의 정악을 이루는 근본이 되도록 하여 이후 모든 궁중 음악에 중국의 아악보다는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등 우리의 정악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악은 그 본산인 중화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현존하며 민족 문화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학·연화대·처용무 합설을 공연할 때 「영산회상(靈山會相)」이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이 당시 「영산회상」은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이라는 불교가사를 가진 관현반주의 성악곡이었고, 현행 「상령산(上靈山)」에 해당하는 곡만 있었다. 가곡은 선조 6년(1572)에 편찬된 『금합자보(琴合字譜)』에는 「만대엽(慢大葉)」만 있다.

그리고 민간 음악은 속악으로서 대개 현악기에 따라 불렸던 창이 성행했으며 농악이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궁중에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노래하고 춤추는 「봉래의」가 있고, 섣달 그믐날에 「처용가(處容歌)」가 있었다.
민간에서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는 산대도감극을 비롯하여 인형극인 꼭두각시 놀음이 성행하였다.
이는 대개 탈선한 양반과 승려를 풍자하는 것으로서 그에 종사하는 재인은 광대라 하여 천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안동 지방의 하회 가면극, 봉산탈춤, 동래 야유 등이 유명하다.


2. 조선후기의 음악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이 사람의 성질과 심정을 천리(天理 :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추구하여 음악도 사람의 성질과 심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변주곡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는 우선 정악에서 「여민락」의 변주곡이 생기는 것을 비롯하여, 「영산회상」의 변주곡이 「중령산」등으로 생기는 데서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가곡의 발달에서 「만대엽」·「중대엽」·「삭대엽」으로 불려지면서 빨라지더니 후에는 「중대엽」·「삭대엽」으로 주로 불리웠다. 1601년에 편찬된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만대엽」과 「중대엽」이 실려있는데 「만대엽」은 가사가 없고, 「중대엽」에 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반에는「중대엽」에 가사를 얹어 부르는 것이 유행하고, 「만대엽」은 기악곡으로 연주된 것 같고 「삭대엽」은 춤반주에 쓰기 때문에 싣지 않는다고 하였다. 1620년에 편찬된 『현금동문류기』에는 「만대엽」·「중대엽」·「삭대엽」이 다 있다.

1680년의 『금보신증가령(琴譜新證假令)』에는 「만대엽」,「중대엽」1·2·3, 「삭대엽」1·2·3이 있다.
영조대(1724~1776)은 『성호사설』에서 “「만대엽」은 극히 느려서 사람들이 싫어하여 없어진지 오래고, 「중대엽」은 조금 빠르나, 역시 좋아하는 이가 적고, 지금 통용되고 있는 것은 「삭대엽」이다.” 라고 하였다.

가시(歌詩)는 가곡·시조와 함께 정악에 드는 대표적인 성악의 한 갈래이다. 음악의 관심사인 가사의 음악적 구성은 시조나 각곡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가사의 불규칙한 길이 때문이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가사의 연주곡목이 열두 가지이기 때문에, 가사라는 명칭보다 흔히 12가사로 불린다.


현재의 12가사의 하나인 「어보사(漁父詞)」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전하고 있어서 어보사가 오늘의 모습과 비슷한 곡조로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 후기의 노래책인 『고금가곡(古今歌曲)』·『청구영언(靑丘永言)』·『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에 전하는 가사의 사설이 그 당시 가객들에 의해서 가곡처럼 노래로 불렀다고 보아야겠으며,
현재의 12가사와도 역사적으로 관련되었다고 볼 때, 현재의 12가사의 유래는 18세기 초기 무렵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죽지사(竹枝詞)」·「춘면곡(春眠曲)」·「양양가(襄陽歌)」·「어부사」가 『고금가곡』에 전하고,
「백구사(白鷗詞)」·「황계가((黃鷄歌)」·「춘면곡」·「군악(길군악)」·「상사곡(相思曲)」「권주가(勸酒歌)」·「양양가」·「처사가(處士歌)」·「매화가(梅花歌)」가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에 전하고 있다.

가사의 악보를 최초로 담은 거문고악기가 19세기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죽금보(三竹琴譜)』인데, 이 악보에는 「상사별곡」·「길군악(行軍樂)」·「매화곡」「권주가」·「황계곡」의 여섯곡이 전하고 있다.
19세기 전반 무렵에 연주되었던 가사는 가곡처럼 거문고 반주에 의해서 연주되었는데, 그 이유는 장고 반주에 따르는 현재의 가사 연주 형태가 거문고 반주를 지녔던 본래의 연주 형태를 잃고 근래에 변천되었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죽금보(三竹琴譜)』에 전하는 여섯 곡은 19세기 전기부터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연주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12가사의 전통은 19세기 말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금세기 초반의 가곡의 대가 하규일(1867~1937)과 가사의 명인인 임기준(1868~1940)에 의해서 현재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판소리의 유래는 18세기 전후의 숙종(재위 1674~1720)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유진한(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한문시 200구로 된 춘향가 사설이 있기 때문이다.

북학사상의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우선 악기에서 양금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홍대용이 서양의 쳄발로 등을 우리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조율한 것으로 구라파(서양)의 철로 된 금이란 뜻에서 구라철사금이라고도 한다. 「영산회상」이 「상령산」의 변주곡인「중령산」이외에 「세령산」,「가락덜이」가 첨가되고「삼현도드리」와 그 변주곡인 「하현도드리」가 추가된 후 여기에 「염불도드리」,「타령」,「군악」등이 첨가되었다.
가곡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의 『유예지』에는「삭대엽」의 파생곡인 「중거」, 「평거」,
「언편」,「태평가」가 실려있다.

산조는 기악 독주곡의 하나로 굿에서 연주되던 남도소리의 시나위와 판소리 가락에서 발전되어 온 음악이다.
김창조(1876~1930)가 처음으로 가야금으로 산조가락을 연주했다고 하며, 그 후 백낙준(1876~1930)에 의해 거문고 산조가 시작되었고, 대금 산조는 박종기(1880~1947)에 의하여, 해금 산조는 지용구·지영희·한범수 등에 의하여, 아쟁 산조는 한일섭(1929~1973)에 의하여 연주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춘향가를 포함한 판소리 12마당은 19세기 전후 무렵에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서유구(1764~1845)의 사촌처남인 송만재는 가난하여 자기 아들의 과거급제에 광대를 불러 축하연을 해주지 못하고, 그 대신에 「관우회」라는 한문시를 자기 아들에게 주었는데, 그 안에 당시 광대들이 연주했던 판소리 열두 마당이 소개되어 있다.

 
기록되어 있는 판소리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화룡도」·
「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산신타령」·
「강릉매화전」이다.

19세기 중엽에 신재효는 판소리 12마당 중 「춘향가」·「퇴별가」·「심청가」·「박흥보가」·
「적벽가」·「변강쇠가」의 여섯 마당의 사설을 우리말로 기록하였다. 신재효의 여섯 마당이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다가 1933년 이선유의 『오가전집(五歌全集)』에 정리된 후 현재까지 전승되었다.

이렇게 19세기 후반을 거치는 동안 일곱 마당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판소리 청중이 확대됨에 따라 양반이나 중인 출신의 지식층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이루던 유(儒)적 관점에서 판소리 사설이 조명되었으리라는 것과 명창 광대들의 출신이 천인계급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 말기의 사회적 변동 속에서 차츰 중인을 포함한 서민층에 확대되어 나갔던 추세의 결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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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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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건축

원나라가 성립되면서 주자성리학을 국학으로 하면서 고려에 주자성리학이 들어왔으며 그 에 따라 다포식 건축 양식이 들어와 건물의 용도에 따라 조선후기까지 전승되었다.
다포식 건축양식은 원나라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성행하던 두공(枓?)이 많고 장중하고 위풍있는 옛 북조(北朝) 계통의 목조건축 분위기를 가진 양식을 중원(中原)에 이식시킨 것이다.

다포식 건축양식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얹은 것으로서 그를 기둥 사이를 잇는 창방 위에 다시 평방을 가설한 것인데, 공포가 많이 사용되어 화려하고 장엄한 외형을 보이게 되어, 이 양식이 나온 이래 사찰에서는 주법당에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지붕마루의 웅장함이 있는 팔작지붕 형식에 내부의 서까래가 보이지 않도록 반자를 설치하여 가려서 장엄한 우물천장 형태를 보인다.
다포식 공포로는 북한에 있는 심원사 보광전 등이 가장 오래된 예이며, 서울 남대문, 창덕궁 명정전 등으로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또한 건축 양식으로도 음양오행설에 더욱 충실한 건축 배치가 궁궐에서부터 사대부 집안 건물에까지 일반화되었다.

2. 조선후기의 건축

이미 말한 것 같이 다포식 양식은 주심포 양식과 더불어 건물의 용도에 따라 그대로 후기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성리학이 성립되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창방과 십자로 하여 기둥에 얹히는 익공식 양식이 등장하여 후기 건축 양식을 주도해 간다.

익공식 양식은 기둥 위에 새날개처럼 뻗어나온 첨차식 장식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있는 건축 양식이다.
주두와 소로의 굽은 사면으로 만들어지며 평방(平枋)과 주간포작(柱間包作)이 없으므로 간단히 주심포집에 가까운 외형을 갖추었으나 출목(出目)이 없는 것이 보통이고 대규모의 건축에는 외부의 일출목을 두는 경우도 있다.
익공식은 주심포와 같이 기둥 위에만 익공을 얹었으나 세부기법은 다포식과 흡사하며, 익공식과 주심포식은 공포에서 차이가 난다.
즉, 익공식은 보통 기둥머리와 주두를 동시에 익공이 물고 있는 짜임수법이며, 원칙적으로 출목(出目)이 없다.
그러나 주심포식 공포는 허첨차(虛?遮)나 살미첨차가 기둥머리와 주두를 동시에 물고 있지 않으며,
익공식과 달리 출목이 있다.

그리고 영조대 진경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를 대변하는 익공식 건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전에는 사대부 집안의 건축에 주로 사용되었던 익공식이 궁궐내의 누정(樓亭)이나 행각(行閣) 및 부속기와, 능의 정자각(丁字閣) 등 사묘건물, 성곽건물과 서원·향교 건물, 사찰의 부속건물에 나타났으며,. 이는 경회루와 강릉 오죽헌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건축 배치에서도 음양 오행설에 충실하고 인간생활과 인간 심성과 밀접한 건물 배치를 추구해갔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정조대에 북학사상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건축 양식을 들여오게 되는데, 화성(수원성)의 건축이 바로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지정 : 사적 제3호)에 위치한 화성(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착공되어 정조 20년(1796)에 완공되었다.
조선 의 22대 왕인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의 정 때문에 양주 배봉산 기슭에 있던 능을 수원부의 화성으로 옮기면서 그 읍치소와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게 하고 신도시 조성을 위해 쌓은 성이다.
2년 6개월이 걸린 공사는 당시에 새로운 토목·건축기술을 도입하여 문루와 포루, 장대, 망루 등을 완공하였다.

화성 성곽의 축조방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축성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의 발달과 중국 성제(城制)의 장점을 혼합하고 있다.

 
일반적인 조선의 성곽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둘레에 성곽을 쌓은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 반면에, 화성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주민들이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때문에 전통적인 한국성곽에서 찾기 어려운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고, 종래의 수법과 달리 돌과 벽돌을 섞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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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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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전기의 도자기

조선초기에는 다양한 도자기가 만들어졌는데,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분청사기와 조선청자라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⑴ 조선청자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초기 청자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려말에 퇴락한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 문양 등이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청자였다.
조선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 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이 있고 활발했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 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⑵ 분청사기

① 분청사기의 발생

분청사기(粉靑沙器)란 분청회청사기의 준말로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하고 그 위에 회청색 유약(釉藥)이 시유(施釉)된 사기로서 기원은 고려말의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磁)에서 크게 바뀐 것으로 토속적이며 서민적인 흥취로 우리의 생활이나 감정에서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하는 자기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백자 일변도로 향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분청사기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② 분청사기의 발달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로부터 변모·발전하여 조선의 태조, 정종을 거쳐 태종대에는 분청사기의 특색이 분명히 드러남에 따라 15·16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扮裝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청사기가 유교적인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고 고려 이래의 불교와 함께 표면상으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 양식이었다고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분장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7가지로 구분된다.

15세기 중엽에는 인화기법(印花技法), 상감기법(象嵌技法), 박지기법(剝地技法), 음각기법(陰角技法) 등이 더욱 세련되어 갔고, 철화기법(鐵畵技法), 귀얄기법, 분장기법은 15세기 후반에 성행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인화기법과 귀얄기법이 같이 시문되고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무늬보다는 백토분장이 주가 되고 차츰 태토(胎土)와 표면분장 상태가 백자화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외적요인과 사기제조에 있어서 제도상의 문제 등 내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분청사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⑶ 백자

백자(白磁)는 규사와 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태토(胎土)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서 1300℃~1350℃에서 번조(燔造 : 구워서 만들어 냄)하여 자화(磁化)된 치밀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조선의 백자는 고려 연질 백자를 계승한 것과 중국 원·명대의 새로운 백자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의 두 종류로 구별되는데, 전자는 태토가 무른 편인 연질백자로 우윳빛의 유백색 유약이 사용되었고,
후자는 주로 경질백자로서 투명한 백자 유약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의 상품(上品) 백자는 갑(匣 : 작은 상자)에 넣고 번조하여 티하나 없이 깨끗하다. 유약은 거의 빙렬(氷裂)이 없고 약간 푸른색을 머금었으며 약간 두껍게 시유되었다. 광택은 은은하여 잘 번조된 것은 유약내의 기포가 적절히 포함되었으며 표면에 미세한 요철이 있어서 표면이 부드럽다.
태토는 순백이며 유약과 밀착되어 박락(剝落 : 발라 놓은 칠이 벗겨지는 현상) 된 예가 없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조선전기의 기형은 원만하면서 풍만하지 않고 유연한 선의 흐름에서 절제하면서 내면의 선비다운 절조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의 세종·세조대부터는 중국에서 수입한 회회청으로 청화백자를 번조하였고, 세조 9년세종·세조대(1463)에는 국산인 토청으로 청화백자를 번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세종·세조 연간의 청화백자는 일부 유약과 태토가 명의 청화백자와 거의 흡사하고 무늬도 흡사하게 공예 의장된 문장의 형태과 그 유형도 명의 청화백자와 흡사하다.
여기에 사실적인 산수문 등이 등장하여 세조말이나 성종대에는 회화적인 성격을 띤 산수문 등의 문양이 시원하게 여백을 남기면서 기면에 주문양을 나타내고, 여의두·당초절지문·칠보문 등이 부수되기도 하면서 우리 청화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2. 조선후기의 도자기

조선후기에는 전기의 다양한 도자기들이 백자로 단일화되면서 좀 더 다양한 모습과 문양이 나타났다.

① 17세기 백자

17세기에는 난초를 주로 한 조화문이 간결 청초하게 기면의 가장 적절한 부위에 조금 그려지고 점차 문양이 커지며, 세필로 그려진 산수문과 용문이 나타나며 여기에 여러 가지 도식화된 문양이 부수되었다.


17세기 전반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많은 도예가들 죽거나 잡혀가는 등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어 전반적인 면에서 침체된 모양을 보였다.
고급백자인 청화백자는 회회청의 부족으로 소수만이 제작되었고, 전란으로 인한 도예가들의 부족과 분원 장인들의 이탈로 백자의 제작 상태가 좋지 않아 백자색상도 백색이 아닌 회백색이 주를 이루었으며, 묘지와 태호 및 태지·명기 등 특수한 용도의 것들 또한 제작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생산 뿐 만이 아니라 운반 체제 등도 미비해져서 운송 도중에 상당수의 그릇들이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미미했지만 제기용 접시에 청화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형태의 철화백자가 만들어졌다.


철화백자는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청화백자를 대신하여 문양과 형태에 있어서 조선 고유 양식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② 18세기 백자

18세기에 만연한 진경문화는 도자기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사상 뿐 아니라 수요층의 기호와 경제력에 도자가 많은 영향을 받아 진경문화의 한 분야로서 독창적이고 품격 높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진경시대 도자에는 진경문화의 여러 모습이 민감하게 나타났다. 숙종 후반과 영조 전기에 제도 정비의 일환으로 분원의 재정자립과 효율적인 원료수급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분원정작의 안정적인 생산기반이 마련되었다.
고유 문양과 당당한 형태가 등장하였고 문방구를 비롯하여 청화(靑畵)·철화(鐵畵)·동화(銅畵)가
어우러진 설백(雪白)의 격조 높은 자기가 만들어졌으며, 분원을 분원리로 옮긴 후에도 이런 경향이 지속되었다.

18세기 전반에 들어서 최고의 조선백자가 제조되었는데, 여기에는 사옹원 제거로 있었던 영조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서 가능했다.
영조는 진상자기의 유출을 막기 위한 묘책을 강구하기도 했고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직접 도자기의 밑그림을 그려서 구워 오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관심으로 제작의 각 방면에서 중국과 다른 최고의 양식이 나올 수 있었다.

18세기 전반에는 유약에 아주 미량의 철분이 들어있어서 전기의 백자보다는 더 담담한 푸르름이 깃들어 있고 태토도 순백이었다.
유약은 망상의 빙렬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희고 비교적 굵은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기형은 가늘고 길며 준수한 모습이었고 각이 진 형태가 등장하여 항아리의 구연부도 부드러운 각으로 마감한 것이 많았다.
한편 간결하고 굽이 높은 백자 제기는 중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했다.
중기에는 문방구의 생산과 세련미에서 큰 성장이 있어서 연적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필통도 다양한 모양으로 등장하였으며 기타 문방구도 생겨나고 그 모양이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다.
영조 후반 이후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무역을 시작하여, 청나라에서 수입된 비단이 수출되지 않음에 따라 사치품이 범람하게 되고 사회분위기가 변화함에 따른 장식성과 사실성의 심화로 진경문화의 최절정기인 정조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청백의 색상, 길상문의 유형, 여백의 축소와 장식화의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다.

③ 19세기 도자기

19세기에 들어서면 점차 진경문화의 여운은 사라지고 다양한 생활기명으로서 그 사용저변이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 구주지방의 값싼 기계생산품이 대량으로 들어와 우리나라의 자기산업은 황폐일로를 걷다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 시기 백자의 특징은 태토는 순백이며, 문방구를 제외한 다른 그릇들은 기벽과 유약 모두 두꺼우며 유약에는 철분의 함유량이 조금 많아져 조선 초기의 것보다 더 푸르다.
고화도에서 자화가 충실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져 매우 치밀하고 견고한 백자이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고 기포가 많으며 태토와 밀착하여 벗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형은 후기에 와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여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며 새로운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특히, 제기와 문방구에서 많은 형태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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