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이 작곡된 것은 차이코프스키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가 된 지 9년째 되던 해인 1874년 12월 무렵이다.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에 곡을 완성하였으나, 초연은 1년 가까이 지난 1875년 10월 25일 보스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늘 비관적이고 회의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인 이 곡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음악원의 원장이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동료 교수 프베르트에게 이 곡을 직접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 파트의 완성도는 어떻든 곡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을 기대했지만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지 않았다. 격분한 차이코프스키가 방을 뛰쳐나가자 당황한 루빈스타인은 뒤따라나가며 몇 부분을 고치면 자신이 연주해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 하나의 음표도 고칠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한 전말은 동석했던 프베르트의 기록과 차이코프스키가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전해지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이 곡의 초연을 의뢰하였다. 뷜로는 이 곡을 살펴보고 매우 만족해했으며 성공을 확신했다. 보스턴에서 가진 초연은 뷜로의 확신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뷜로는 이 사실을 당시 막 발명된 전보로 모스크바에 있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황급히 알렸다. 차이코프스키는 애초에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려던 이 작품을 뷜로에게 헌정하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3년 뒤 차이코프스키와의 우정을 회복한 루빈스타인이 지휘를 맡아 1878년 3월 22일에 이루어졌다. '단 하나의 음표도 고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던 차이코프스키는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을 부분 부분 고쳐 나갔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악보로 수정된 것은 작곡된 지 약 15년이 지난 1889년경이며, 이 곡을 런던에서 초연한 영국의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단로이터에게 기술상의 조언을 받았다.
이 작품은 1875년 미국 보스턴에서 초연을 한 독일의 지휘자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되었다.
Pyotr Ilich Tchaikov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