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역사가는 모름지기 자신이 소재로 삼고 있는 사건을 하나의 틀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종합적으로 면밀히 비교하여 분석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역사소설가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염두에 둔 채 어떤 것이든지 겸손한 마음과 미래지향적인 태도로 체를 걸러내어 금을 찾는 마음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소설에 투영을 시켜야 한다.
[문제의 제기]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회고하면서 제 논지에 대한 반론과 명확한 근거를 적시하지 않은 진정한 역사논쟁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난 가지를 가지고 나무등걸을 왜곡하며 호도하거나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잡동사니 역사지식을 끌어내어 그동안 여러 고현高賢들의 글에 대한 치졸한 폄하를 하는 글을 보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그동안 모아두었던 여러 석학들과 제현諸賢들의 글을 하나로 묶어 제 입장과 함께 밝혀두는 바입니다
[첫번째] 역사가와 사실(FACT)
[케임브리지 역사논쟁]
액턴 경(1896년 10월) - 우리의 경험에 기초한 논리적 귀결로 보아 완전한 역사는 가능할 것이다.
조지 클라크 경 (1957년) - 모든 역사적 판단에는 인간과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판단은 저 판단과 마찬가지로 옳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액턴 경과 조지 클라크 경의 이 충돌은 두 사람의 발언 사이의 기간 동안 사회현상과 역사적 논점에 관한 우리의 견해 전체가 크게 변화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시대적 위치와 지식과 경험으로 저도 모르게 고착된 관점을 반영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어떤 역사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사실 19세기는 오로지 현시적이고 증명된 [사실 FACT]들만을 숭배한 위대한 시기였다. 1830년대에 <랑케>는 올바르게도 역사의 교조적인 도덕주의화에 항의했고 그러는 가운데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러자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이 격언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한 <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 숭배에 강력한 영향을 발휘했다.
우선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실증주의자들은 말했다. 영국에서 이러한 역사관은 영국철학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경험주의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했다.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주체와 객체와 완전한 분리를 전제한다. 사실들은 감각적인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혀 들어오며 또한 그의 의식과는 독립해 있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사가는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 등에 있는 사실들을 집어 들 수 있다. 역사가는 그것들을 모은 다음 집에 갖고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요리하여 내놓는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미 해묵은 결정론으로서 철 지난 생선이 좌판위에서 힘겹게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이다.
바로 여기에서 <포워크>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에 이르러 역사를 새롭게 그리고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열망은 너무도 뿌리 깊은 것이어서, 만일 우리가 과거에 대하여 무엇인가 건설적이고 비판적이며 예측적인 탐구심과 혁명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들처럼 자칫 신비주의나 교조주의 또는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더 꼼꼼히 생각해보아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상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모든 역사가들에게 똑같은, 말하자면 역사의 척추를 구성하는 어떤 기초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역사가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벌어진 연도 수나 확인에 그치는 고착화관념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아는 것은 그가 하는 작업의 필요조건이지만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다.
둘째 기본적인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연속된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눈에 보이는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고 오직 역사가의 선험적이고 탐구적인 결정에 따라서 좌우된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즉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이나 차례는 어떻게 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가란 참됨 역사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 허명의 역사가는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쓴 말 한마디)
19세기 <실증주의의 팩트 논리>는 성공을 위해서 어떠한 전제 조건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자료가 반드시 개인이 읽기에는 너무 많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관념이나 개인의 시각으로 선택된 자료에 몰입하게 됩니다.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랑케>는 그래서 공인된 그리고 그 당시 주류를 형성하던 정부의 사료만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장에서 물물교환되는 증서도, 아직은 구체적인 방증이 없는 시장 속의 이면계약문서들도 전제조건 없는 실증주의라면 충분한 근거 자료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역사가의 믿음에 기초한 비판적인 의식 속에서 의도적이며 선택적으로 모여지게 되겠지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 알맹이가 객관적으로 파악되어질 수 있으며 그리고 역사가의 다양한 해석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믿음은 정말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그러나 뿌리 뽑기에도 매우 어려운 착시현상이다.
[두 번째] 고대사와 중세사의 매력
[알려져 있는 소수의 사실이 역사의 사실 전부일까?]
이 시대에 대한 역사적 무지는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한 탐구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매력적인 요소이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역사가들의 관점을 단순화시키고 명료하게 만드는 또한 입장에 맞추어 선택하기도 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임의로 빼버리기도 하는 그 무지는 역사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활용하는 제1조건이다. 하지만 근대사가는 무지의 이점들을 그 어느 한 가지라도 누리고 있지 않다. 너무나 잘 알려지고 밝혀진 사실들 때문에 그는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필수적인 무지를 스스로 계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사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소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역사의 사실로 전환시켜야 하고 이와 동시에 수많은 하찮고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도 거기에서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단 한 가지 티끌만한 보석을 골라내어 추려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케임브리지 근대사] 1권 서론을 보면 <액튼 경>은 “역사가에게 학자가 아니라 백과사전 편찬자가 되라고 위협하고 있다.”는 명제를 내세워 역사가들에 대한 묘비명이라 공언하면서 19세기의 사실 숭배에 편승하여 공인되고 기록된 문서들에 대한 숭배주의로 완성시켰고 정당화되었다. 그래서 경건한 역사가는 머리를 숙이고 문서들에게 다가 갔으며 그것들에 관해서 비판과 선택적인 인용을 할 엄두도 못 내고 다만 황송스러운 어조로 기록에 충실하여 이야기해야만 했다. 여기에 심각한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사료는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참된 의미를 밝히고 묻혀지고 숨겨지고 왜곡되고 폄하된 진실을 끄집어내어 해독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때의 기록들에는 한 가지 공통적이 특징이 있다. 상대방의 주장들은 대부분 빈약하고 혼란스럽고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매도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모두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흔한 특징이다. 마치 마녀사냥과 같은 역사적인 탐구와 사고에 대한 모욕이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그들의 고정관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걸 탈피하여 새로운 시도를 욕구하는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실들과 문서들은 역사가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금과옥조처럼 숭배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들은 스스로 역사를 구성하지 않는다.
[왜 그동안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역사철학에 대해서 무관심했는가?]
19세기 역사가와 지식인들에게는 자신감과 낙관주의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던 편안한 시대였다. 그들이 신봉하는 [사실]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그것에 관해서 귀찮은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새로운 시도로서 도전하는 경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로 <랑케>는 이렇게 자신감을 드러낸다. “우리 스스로가 사실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 근거로 포장된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떠한 도전도 물리칠 것이며 신의 섭리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경건하게 믿고 있다” 이렇듯 19세기 자유주의적 역사관은 자유방임의 경제학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일에 힘써라, 다른 엉뚱한 학설이나 공인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조작되고 첨삭된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보편적인 조화를 이끌어줄 것이다. 의문과 새로운 해석을 배재한 역사의 사실 그 자체만 가지고도 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한 진보가 은혜롭게 그리고 분명히 끝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고의 사실주의 표현이었다.
여기쯤에서 분명하게도 <딜타이>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역사해석에서의 [사실의 우월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학설에 대하여 최초의 도전이 이루어진 곳은 19세기에 팽배한 자유주의의 안정적인 지배를 뒤엎는 일에 대단히 큰 공헌을 했던 나라인 독일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는 말한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다만 근거를 맹신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료를 들추어 의문 속에서 비교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1910년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어떤 역사가에게든 역사의 사실들은 자신이 그것들을 어느 한쪽에 치우쳐 비판하는 게 아니라 보든 걸 종합하여 새로이 창조할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꼭 명심해야할 금언(金言)이다. <크로체>는 진정으로 역사철학에 기여한 금세기의 사상가로서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유에 관한 독점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는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라고 피력한다. 이 진술은 시사점이 많다. 다시 말해 ‘역사’라는 단어의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의미를 명쾌하게 적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의해서 수행되는 연구와 그가 추구하는 일련의 과거의 사건들을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역사 이전부터 이어온 그 민족의 꾸준한 핏줄내림과 삶의 양태를 무시하고 단절하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있는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이며 역사란 사유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유를 자신의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 역사적 사실 찾기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이럴 경우 역사가가 편협되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움직인 것만을 반드시 고정 불가변의 사유 속에서 재현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독자가 그러한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허상을 깨고 진실을 찾아야하는 어려움을 겪거나 전혀 엉뚱한 19세기적 실증주의의 사고관에서 헤매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과거나 그 시기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그러한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고대사나 중세사 연구가 빈약했던 이유는 중세의 미신적 교조적 신앙들과 거기에서 비롯된 야만적이고 폐쇄적인 역사말살 행위들이 고대인들의 삶과 민족의 맥을 추구하려는 연구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를 이단시하면서 너무나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새로운 시도와 철학적 사고관을 지닌 역사가가 자신의 서술대상인 사람들의 마음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수 없다면 역사는 바로 쓰여 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 번 강조하는 점은 현재를 사는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과 관점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고정된 독선과 아집과 집착에 가두고 스스로 정확하게 역사를 사랑하고 있다는 오만한 착시나 그걸 이용하여 자신을 과거로부터 도전해오는 다양한 견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단절시키지 않고 민족역사의 처음 흐름과 맹아를 현실로 드러내어 일관성 있는 역사동력으로 지배하고 보다 넓게 이해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역사의 의미는 무한하므로 그 어떤 해석도 그것과 다른 어떤 의미보다 더 올바르거나 바꾸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쓴 소리 한마디 - 실용적 견해로 빠질 위험성 제거)
그렇다면 21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의무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자신의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역사가의 의무는 자신의 사실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나 자신이 제시하려는 해석과 어떤 의미에서건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실들을 자신이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이단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보다 넓은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비교분석하여 진실을 찾아내면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을 한 민족의 처음을 찾기에 노력하고 알차게 그려내도록 애써야만 한다.
나는 내 글의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진정한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학도들에게는 경제학자가 ‘투입’과 ‘산출’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비록 역사연구과정에서는 다른 형태로 전화되었지만 동시에 진행되며, 또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역사가와 그가 접하는 아니 접해야만 하는 모든 사실의 관계는 어느 하나 물리치거나 집어던질 수 없는 평등한 위치에서 주고받는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역사 찾기란 역사가와 그가 접하거나 지닌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로 [1부]를 끝내고 싶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에서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검증되었다고 보는 모든 사실이 고정불변의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사실 사이의 구별은 엄격한 것도 아니고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실도 일단 그것의 적절성과 중요성이 밝혀지면 역사적 사실의 지위로 말하자면 승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해를 돕기 위한 쓴 소리 한마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역사학계에서 하*상*주 삼대를 논할 때 하와 상은 전설의 왕국이며 사료에서만 허황되게 꾸며 놓았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그야말로 실증적 사관의 백미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서 그 왕조의 실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백안시되는 과정에서도 연연히 꿈틀거렸다. 허나 은허유적이 발견되고 죽서의 발굴 등으로 하*상 왕조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갑자기 전화한다. 허황된 고대 기록들이 실체로 둔갑하는 극적인 흐름을 보면서 그동안 그토록 맹렬히 매도하였던 역사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학자들이 이제는 화살을 돌려 만몽의 하가점과 신락과 부신 등의 제의와 성곽규모로 보아 왕조에 필적하는 유물상을 다시 폄하하고 있다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는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일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 모델을 요구한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최상*최적인 선택의 과정이다. <톨콧 파슨스>는 말한다. 역사탐구는 있을지도 모를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일 뿐만 아니라 그걸 가능하게 만들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과 비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 내기 위해 모든 자료를 활용하고 도출해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오직 그 전후 관계를 자신이 만들어낸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 맞추는 역사가의 편협되지 않은 능력이다. 그 밖의 다른 인과적 전후 관계들을 우연적인 것으로서 배제되어야 할 때 필히 지켜야 할 금과옥조 같은 이유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후 관계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어야만 한다.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대한 연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어떤 대답을 바라는 한 그는 쉴 수가 없으며 어느 것도 티끌만한 단서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함부로 버릴 게 없다. 위대한 역사가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한 새로운 맥락에서 ‘왜?’라는 질문을 줄기차게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맥락으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첫 머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의 역사말살행위에 관한 기억을 보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역사적 탐구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아시아의 고대문명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명을 대하는 관점도 기본적으로는 비역사적이었던 것 같다.
역사에서의 <객관성과 개연성>이라는 논지는 잘 알려진 어려운 문제가운데 핵심이다. 역사론을 포함한 사회과학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고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강요한 인식론에는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그들 사이의 상호연관과 상호작용의 복잡한 과정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특정한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심각한 오류 즉 객관성과 개연성을 빙자한 착시가 있어 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발생하게 된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만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의 많은 역사론자들은 역사의 바깥에 역사로부터 독립된 어떤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미리 세워놓고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비역사적인 것이라고 거부하고 있는데 그 이유들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가도 당면한 목적과의 연관 속에서만 중요성을 판별할 기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역사탐구나 역사적 사실의 변화는 언제나 고정불변한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전통적인 가설은 그동안 많은 학설이 새롭게 진화하고 소멸되는 역사가의 경험과 상반된다. 이는 <헤겔>로서부터 비롯한 그의 절대자에게 세계정신이라는 신비한 형태의 외피를 입혔고 역사발견과 사실추정의 과정을 미래의 발견 속에서 그려보는 것 대신 현재의 기준에서 멈추게 한 중대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판단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의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사실을 잘 선택한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거나 개연성에 충실하다고 말할 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 역사가에게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그 역사가에게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가들보다 과거에 대해서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참된 객관적 시각이며 진정한 개연성의 탐구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 했을 때,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추구목적들 사이의 격의 없는 그리고 울타리 없는 대화라고 이해해야 한다. 예전의 해석은 결코 모두 거부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해석에 포함되어야 하며 또한 대체되어야 역사탐구의 정도(正道)이다.
(17~18세기의 역사적 합리론 rationalism - 歷史的合理論)
비합리적이며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理性的)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합리론 이성론 이성주의라고도 한다. 실천의 기준으로서 이성적인 원리만을 구하는 역사태도를 가리킬 경우도 있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이성이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이 세상에는 존재이유(存在理由)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설로 그리스 고전철학(古典哲學)의 관상적(觀想的) 합리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식론적 견지에서는, 경험론과 대립하여 모든 인식은 생득적(生得的)이고 명증적(明證的)인 원리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입장으로, R.데카르트, B.스피노자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 경향으로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G.W.F.라이프니츠, C.볼프 등 이른바 대륙의 합리론에서 전형적인 것을 볼 수 있듯이 감각적 경험론을 혼란된 것이라 경시(輕視)하고 수학적 인식관을 원형으로 하는 태도와 같은 논증적(論證的) 역사관을 중시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연 연구에 흥미를 갖고 주로 수학의 방법에 의해 '확실하고도 명증적(明證的)인 인식'으로서의 학문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즉 종합과 분석의 수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물질적인 사상 일반(事象 一般)을 다룰 것을 생각하여, 물질을 모습이나 크기와 같은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성질에 의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연히 종래의 스콜라 철학적인 물질관과 대립하게 된다. 물체 속에 영혼 비슷한 것의 존재를 혼입시킴과 동시에 마음이나 영혼의 작용 가운데 영양이나 운동과 같은 신체적 작용도 섞어서 생각하던 종래의 사상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질로부터 일체의 심적(心的)인 것은 배제하고 동시에 마음을 일체의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하려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우선 확실하며 명증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일체의 선입감을 버리고 그와 동시에 장래 일어날지도 모르는 의혹을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모조리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때로는 수학적인 진리와 같은 것도 의심해야 한다. 즉 일체의 사물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고 또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와 같이 의심하더라도 의심하고(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회의(의심을 품다)한다는 것은 사유(思惟)의 하나의 방법이라는 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제 1원리로서 세워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회의는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라는 회의론자의 회의와는 달리 확고부동한 진리를 획득한다는 목적을 위한 적극적 회의이다. (강성위 역, 서양철학사, 이문출판사, 1988, pp. 159∼172)
하지만 이걸 역사론에 대입하면서 고정관념과 기준이 생겨난 것이다. 허나 역사적 의문은 수학적 의심과는 명백히 다르다. 역사인식의 파국점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역사가에게 <프로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첫째 그는 사람들의 행동은 그들이 스스로 주장하고 믿고 있는 행위의 동기를 통해서 사실상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오랜 환상의 관에 최후의 못질을 했다.
둘째 맑스의 작업을 보충하면서 역사가에게 자신과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그의 시각을 결정한 민족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을 그리고 과거에 대한 관념을 형성시키는 미래에 대한 관념을 심문해보라고 촉구했다.
학문에서든 역사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사에서의 진보는 기존질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고 현존질서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전제들에 대하여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인간들의 그 대담한 자발성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사실은 영어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 사상가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관과 역사론에 대한 충만하고 혁신적이며 개척자적인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집과 신조류에 대한 저항과 파괴와 그리고 고답적인 담론의 맹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역사의식에 대한 더 나은 진화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교조주의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라는 믿음으로 고착되고 있다.
(처음으로 밝히는 순수한 내 입장 한마디)
[비교적 손쉽게 한 가지만 이야기 하겠다. 나는 분명히 신념과 낙관주의로 가득 찬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 중에서도 대낮이 아닌 저녁놀을 바탕으로 삼고 성장하여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극소수의 역사학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끊임없이 또한 돌이킬 수 없이 쇠퇴하고 있는 역사인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끔찍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미래에 대한 보다 건전하고 보다 균형잡힌 전망을 주장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상식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개인에 의해서 쓰여진 개인에 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견해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에게 의심 없이 수용되었고 또한 조장되었는데, 실제로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부적절하게 보이므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가의 지식은 오로지 그만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아마도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수많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그 지식의 축적에 참여해왔을 것이다. 역사가가 그 행동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공 속에서 행동한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이루어가는 행렬 속의 1인 일 뿐이다.
<베리>는 그의 취임강연에서 <몸젠>의 위대함은 [로마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비문을 집대성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로마 헌법에 대한 그의 연구 업적에 있다고 우겨댔는데 그런 식의 주장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그저 익히 알려진 사료들의 편찬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실증주의적 역사론자>의 주장과 흡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역사가는 묻혀지고 비틀려진 역사를 새로이 발굴해내는 행렬 속의 1인으로서 끈임 없이 왜곡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역사기록의 진흙탕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야하는 탐험가이며 모험가인 동시에 도전적인 행동으로 [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논한다고 조금이라고 입을 여는 여러분이라면 역사가 자신이 연구영역에 들어가면서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태도와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역사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입장 자체는 어떤 사회적*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했다. “교육자 자신이 반드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세뇌하는 사람의 머리 자체가 벌써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자 역사의 의미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단이 되어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토인비>는 이러한 직선적인 역사관을 순환론으로 대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결국 실패한 후 영국의 역사가들은 역사에는 일반적인 패턴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만족스러워했다. 즉 1914년 이래 우리 사회의 성격과 사고방식에서 나타난 근본적인 역사인식에 대한 잘못된 변화의 산물이자 표현으로 생각할 것이다. 극명하게 말한다면 <한 사회가 교조적으로 서술하거나 감히 서술하지 못하는 역사는 어떤 종류의 역사인가? 하는 문제보다 그 사회의 성격을 더 의미심장하게 지시해주는 척도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으로 바뀌는 데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역사가들의 사유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장소에 의해서 형성된다.
어떤 역사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 이제 나는 이렇게 덧붙이려고 한다. “여러분은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파서 그의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왜냐하면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또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바로 이 두 가지의 관점에서 역사가를 바라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
이제 역사가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고 이러한 등식의 다른 항을 동일한 문제 틀에 비추어 고찰해보도록 하자.
역사가의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힘의 작용인가? 여기에서 ‘나쁜 존 왕’ 역사이론-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격과 행동이라는 견해-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역사이론은 유구한 족보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천재성을 역사의 창조력으로 간주하려는 욕망은 역사의식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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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임진왜란을 구했다는 식의 판단은 왕조사를 쓴 선비들과 왕이 이순신 사후에 생각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 적혀진 기록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문서들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임진왜란 종전사를 새롭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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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존 왕과 좋은 여왕 베쓰
이 이론은 최근의 시대로 내려올수록 특히 유행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칼 맑스의 창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볼세비키 혁명의 깊은 사회적 원인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 혁명이 니콜라이 2세의 어리석음 때문에 또는 독일의 자금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그리고 20세기의 두 세계 대전을 국제 관계 체제에서의 어떤 근원적인 붕괴가 빚어낸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빌헬름 2세와 히틀러의 개인적인 사악함이 빚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이는 <훌륭한 역사소설은 역사에 기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소설은 하나의 문학에 속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비슷하게 준용한다면 무의식적인 동기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록을 통찰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일부러 한쪽 눈을 감고서 일하겠다는 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존 왕이 나쁜 것은 그의 탐욕이나 어리석음 또는 폭군이 되고자 한 그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데에 만족하는 한 여러분은 아이의 역사수준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개인의 성질 이야기나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절적이고 단선적인 역사배우기와 역사 찾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파악하려는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므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반면에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이들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있는 인간들이었다. 비록 그러한 역사의 기나긴 흐름이 [환국]으로 불리었건 [한국]으로 내려왔건 또는 [한후]나 [예맥]으로 칭하였던지 간에 우리 민족이 현재 나타난 작은 자료에만 근거하여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집단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유구한 인류의 삶속에 같이 움직이면서 연연히 맥을 이어온 집단이라고 보는 게 옳은 것일까? 그런 까닭으로 난 나쁜 존 왕보다는 좋은 여왕 베쓰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반대하고 싶은 견해는 유구한 민족의 삶과 흐름을 일방적으로 공인된 자료에만 의거한 역사의 밖에 놓아둔 채 믿을만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만 역사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즉 어떤 나라를 마치 알 수 없는 혹성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외계진입자로 만들면서까지 역사의 연속성을 방해하는 <요술 상자 속의 소년 잭?과 같은 존재인양 생각하는 태도이다.
진정한 역사가가 보는 [이러리라는] 가정과 [이렇구나!]라는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은 즉 내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잊혀지고 묻혀 지고 버려진 안타까운 대화라고 불렀던 그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별개의 나라 사이의 단절된 대화가 아니라 오늘날 밝혀진 국가와 어제의 장막 속에 가려진 원초적 집단 사이의 연결점이다. <부르크하르트>가 말을 대신해주고 있다.
“역사란 이미 알려진 한 시대가 묻혀 진 다른 시대 속에서 이음매를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구성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발굴을 증대시켜주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그래서 현대 역사학자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조사하고 신화를 재해석하고 비현실성을 현실에 맞게 탐구하는 행동은 사실(fact)이 아니라 사건(event)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구과정에서 역사가가 이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과학자가 이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대단히 유사한 듯이 보인다.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에 관한 논쟁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역사를 몇 가지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필요한 가설 또는 사유의 도구로서 그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한에서 유효하며 그런 유효성은 해석에 좌우된다. 중세가 언제 끝났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달리하는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에 관한 해석에서도 의견을 달리한다는 말이다. <소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의 길을 더듬거리며 (그는 분명히 이렇게 썼다)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누구나 그럴 듯해 보이는 부분적인 가설들을 철저히 시험해보아야 하지만 수정의 여지가 항상 남아 있도록 잠정적인 근사치에 만족해야만 한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그리고 <액턴>과 같은 역사가들이 잘 검증된 사실을 축적하면 논쟁거리가 되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일단의 광범한 지식을 언젠가는 확립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19세기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나 역사가 모두보다 겸손한 희망, 즉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분리하고 그 사실로써 자신의 해석을 검증하는 가운데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에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두 분야 사람들이 일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역사란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일련의 인정된 판단들’이라는 <배러클리프>교수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따라서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사실의 객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실 안에 있는 일반적인 가정의 추적과 탐구에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가설이 지금 공인된 역사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말이다. 역사는 많은 일반화된 이론들과 가정들 위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일반화가 특수한 사건들이 반드시 끼워 맞추어지는 어떤 거대한 체계를 세울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다룬다. 여러분이 역사학도라면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정된 역사가 거의 반복되지 않는 이유는 두 번째로 공연할 때의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의 공연의 결말을 알고 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이는 과거에 허구로 여겼던 가설이 현실로 드러날 때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볼세비키>는 프랑스 혁명이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서 끝장났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혁명도 똑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지도자들 중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했고 <나폴레옹>을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는가?
물리학자들의 자연계와 역사가의 세계 사이에 두드러진 유사성
첫째, 그들의 연구결과에는 불확실성 또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들 말한다.
둘째, 현대물리학에서는 공간상의 거리와 시간의 흐름을 재는 척도가 관찰자의 움직임에 좌우된다고들 말한다.
18세기 그리고 19세기 내내 지배적이었던 고전적인 인식론들은 모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라는 뚜렷한 이분법을 전제했다. 오늘날 과학자는 대체로 자연의 힘을 맞서 싸워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협력해야 하고 자신의 목적에 이용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 고전적인 인식론은 보다 새로워진 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물리학에는 적합하지 않다.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이 그 인식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여, 인식과정은 주체와 객체를 뚜렷이 분리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일정한 정도까지 포함시키는 과정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론을 포함한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나는 사회과학 전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검사자이면서 동시에 검사대상인 인간과 관계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는 어떤 인식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회학이 일관된 학설 체계로서 자립하고자 노력한 가운데 지식사회학 이라고 불리는 한 분야를 설정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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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세상을 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보여 지고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얽매여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 어떠한 순간에도 보여 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남을 잊는 것도 떠한 큰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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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완결성은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에 대한 신념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역사가는 그와 같은 신적의 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는 다시 말하자면 조커 카드가 없는 다양한 트럼프와 같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아울러 역사학도들이 저도 모르게 아니면 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도덕적인 판단과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며 그것에 관한 과거의 논의들도 몇 가지 애매모호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가는 자신이 신봉하는 책에 등장하는 사실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 역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그런 태도는 현재의 법정이 (사법적인 것이건 도덕적인 것이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위험한 인간들을 상대로 설치한 현재의 법정이며, 그 밖의 다른 위험한 인간들은 이미 그들의 시대의 법정 앞에 세워졌기 때문에 두 번씩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없다는 그 커다란 차이를 잊고 있다. 어떤 법정이든 간에 그 앞에 서야 할 책임을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판사에 배당되는 인물들 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논지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크로체>가 다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를 쓴다는 구실로 재판관처럼 부산을 떨면서 여기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리고 저기가 오직 역사의 신민으로서 있어야 할 장소뿐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그렇기에 오직 이쪽만이 역사의 충실한 신민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그들은 그들 행위의 정신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판결 이외의 다른 판결에서는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며 바로 그것이 역사적 직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역사 감각이 없는 자들이라고 인정된다” <베이컨>도 동조하고 있다. “인습의 완강한 유지는 혁신만큼이나 난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겠다. 역사란 운동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운동은 비교를 의미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흔히 ‘선’이나 ‘악’처럼 타협이 불가능한 적대적인 용어보다도 ‘진보적’이라거나 ‘반동적’이라는 말과 같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용어로 자신들의 도덕적인 판단을 애써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가 과학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해서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을 요약해보자.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의 주요한 이유는 그런 주장이 이른바‘두 문화’ 사이의 틈새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때문이다. 그 틈새 자체가 앞에서 말한 편견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해결책은 우리 역사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역사학을 감히 말하건 더욱 과학적 영역[끈임 없이 왜? 라는 의문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분석하며 어떻게? 라는 고민으로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고 무엇일까? 를 향해 목표의식을 가지고 진화하는 속성들]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만들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진정한 요구사항을 더욱 엄격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틈새를 메우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목표가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요즈음 역사학파 가운데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증대가 지니는 주요한 의의도 거기에 있다.
[덧 글]
역사가도 여느 다른 과학자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동물이다. 아울러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소설가는 모름지기 자신이 소재로 삼고 있는 사건을 해석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소설에 투영을 시켜야 한다. - 이 문제 즉 역사소설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다음에 따로 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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