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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는 왜 하여야 하는가? 사례를 보며...

by 安喩齋 2015. 8. 12.

역사 교육의 목적

 

역사 공부는 왜 하여야 하는가? 특히 국사 교육의 필요를 이야기하는데, 교육 시간을 늘리거나 필수 과목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타당성이 필요하다.막연히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역사 공부를 하는 목적은, 옛 사람들이 겪었던 사건이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얻는데 있다. 현재의 문제, 미래에 제기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후세들이 훌륭하게 살았던 위인의 삶을 교훈으로 삼고, 그 반대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음으로써 건전한 시민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자신의 삶 또한 가치있게 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는데 있다. 불필요한 것에 까지 시간을 소비하면서 습득할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살아가는 데 유익한 것을 배워 가치있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전인교육으로서 역사교육을 말하지만, 역사 공부시간을 늘린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어떻게 의식하며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느냐가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의식의 역사관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역사교육의 효과는 달라진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역사란 역사가 만큼 존재 한다는 말이 여기에 있다. 획일적인 역사교육은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 옳바른 역사의식과 사관을 위한 역사이론을 위한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역사이론을 전공한이가 단 한명도 없다. 서양사를 전공한 몇몇이 외국서적을 짜깁기한 책을

냈을 뿐이지 전공은 염두도 못내는 것같다. 해방 후 식민사관자들이 도제식으로 국사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잘 못된 역사의식이나 역사관으로 건전한 사회인을 만들 수 없기에 올바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은 우리나라에 국한되기보다, 세계화 되면서 우리만의 문제라기 보다 다른 나라와 연계되어 그로벌한 해결책이 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그로벌 사회에서 우리 한국사는 어떻게 기여 할 수 있는 가를 연구개발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현 국사교육의 사례

 

과거 역대 왕의 이름이나 외우고, 그 왕이 우리민족 내지 인류 문화사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판별하기 전에 대왕으로 칭하며, 오로지 왕이었다는 이유로 그와 처 다수의 첩 그들이 낳은 자식들 거기다 그들의 배우자와 배우자의 떨거지들 심지어 그들을 떠 받들었던 나부랭이들을 충신으로 칭하고, 폐허였던 그들의 집, 무덤, 사당, 심지어 놀이터 정자까지 국민의 혈세로 복원하여 유지하는 것은 역사 교육이라기 보다 잘 못된 역사의식을 조장 한다.  

 

조선초를 지나, 나라가 안정권에 들자 民의 삶을 돌보기 보다, 하찮은 일을 명분 삼아 패거리를 만들어 권력 다툼으로 조선정치사회를 관통하였다. 그 타툼에서 그 우두머리가 사약받고 죽어 실권하자,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잔당이 드디어 권력을 잡고  적반하장 그를 성현으로 만들고 그래도 믿음직하지 못해 그의 연줄에 의한 사람을 성현으로 만들어 동국 8현으로 칭한다. 동국 8현 중에 제명을 살다 간 이가 몇 인가? 그리고 그 죽은 이와 연관되지 않은 이가 없는 가? 어쩔 수 없이 예를 든다면 그나마 율곡 이이 한 명에 불과하다. 오직 주자를 참칭하며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을 전개하려는 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아 결국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선초 이후 이러한 해괴한 일로 조선 500년 이란 세계사에서 부끄러운 장수 왕조를 이어가다 이 민족에게 나라를 넘기고 왕조 일가는 귀족이 되어 평안하게 살았다. 

 

지금도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으로 파행정치를 일삼으며 민생은 뒷전이다. 선거법이나 뇌물 등의 이유로 처벌 받아도, 그들을 사면시켜 다시 정치에 참여시키는 행태를 보며 이를 탓하기 전에 그릇된 역사의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들이 고수했던 성리학은  格物致知를 목표로 하였으나, 지금의 학문차원에서 판단할 때, 학문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이 주자를 근간으로 형성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다른 사상이나 지식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퇴계는 성학10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12살 짜리 왕에게 성군이 되라고  바쳤으나, 그 왕은 조선왕들 중, 최악의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학10도의 유용성을 극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에 대해 태극을 그려 놓고 몇개의 변수로 설명하고, 인간의 정신 세계가 자연의 물리적 현상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님에도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란 변수에 의해 천편일률적으로 작동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서 자기들의 능력으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을 뭉트려 氣의 개념에 포함 시키고 그것을 독립변수로 삼았으니 가설자체가 엉터리다.  '理가 먼저냐 氣가 먼저냐, 둘이 같이 작용하느냐 아니냐'라는 것은  물리학의 양자역학 이론과 연관되어 질 수 있으나, 그 논의가 무엇때문에 필요한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러니 당연히 공리공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조선 사회를 언급할 때는 물론이고 모든 사물에서 이를테면 건축  도자기 그림 글씨 옷 심지어 귀우비개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런 표현보다 '성리학적 견지'를 말머리에 앞세워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 유식하게 보이며 국사 실력이 상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한번 의심나면 해보아라. 

 

그렇다고 신앙이나 종교로 진전시키지도 못했다. 자기들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들이 추구한다는 格物致知는 커녕 어떠한 현상도 밝혀내지 못했다. 언어의 유희를 즐긴 것이다. 기껏 四禮나 五禮를 만들어 백성에게는 家禮라는 의식을 강요하였다. 이를 통칭 禮學이라 한다. 성리학의 꽃으로 정의 한다(이성무). 이런 성리학이 '동방예의지국'을 탄생케 하였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배종호). 수치스럽기 그지 없는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의 원천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현실의 역사교육에서 성리학을 위대한 학문처럼 거기에 가담한 이들을 위대한 학자로 존중한다. 어딘지 부족한지 독일 일본의 교수 이름을 끌어다 힘을 보탰다. 이 가례(상례)는 18세기 중기 서구 문화(천주교)와 큰 충돌을 일키며 쇄국으로 치닫아 결국 망하였다.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주었다며 대단한 것으로 주장하나,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황과 약탈해간 퇴계서적을 통해 두 서명이 글을 남겼을 뿐이다. 그 때 일본이 퇴계 성리학에 빠져들어 허우적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성리학은 여말선초 새로운 학문으로서 역활을 하였으나, 조광조, 퇴계의 조선 성리학은 우리에게 반면교사로서 삼아야 할 대상이다. 그 이유는 공리공담을 제쳐 놓아도 학문발전을 망쳤다.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을 받아들이지 않아, 개인의 창의력을 말살시켜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창의력이 뒤지고 있다. 국방의 보루인 무인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세습하며 국방의무를 면하였다. 상공업 종사를 천시하여 산업발전을 진흥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억제하였다. 문화예술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불합리한 신분제를 고수하여 자신들만이 누리는 나라로 인민의 삶을 곤궁케 하였다. 

 

이러한 악폐는 지금도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 자녀들이 군복무를 고의적으로 기피하고도 버젓이 고위층에 오르는 것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토정 이지함은 번듯한 일명 양반으로 자기가 가르친 조카가 영의정되었으니, 학문 또한 뛰어났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토굴에 살며 서민들의 삶을 보듬었다. 포천현감으로 가서는 자신의 밥상에 세 가지만 올리게 하고 그걸 넘을 때는 과하다며 밥상을 물리었다. 포천 땅이 메말라 농사가 어려워 백성이 곤궁을 면치 못하자, 서해안에 널려있는 섬 해변을 포천 백성이 사용하게하여 소금을 구워 쌀과 바뀌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며 그렇게 해달라고 왕에게 상소하였어도 성학10도로 聖王이 되어야 할 선조는 들어 주지 않았다. 이 주장은 영국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분업과 협업 및 리카도의 비교생산우위설 보다 200여 년 앞섰다. 그 뿐인가 아산현감일 때는 걸인청을 설치하여 걸인들을 모아 짚신과 가마짜기를 시켜 세계 최초로 자립형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그의 아들은 임지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다산 정약용 그는 우리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목민심서가 최초로 발행된 것은 을사조약 체결 후 왜놈들이 왜놈 말로 내었다. 그들은 이미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정규대학 교육을 통해 엘리트를 관리로 삼던 때에, 유치한 내용을 담은 목민심서를 자기들 관리를 위해 간행할리 없다. 이유는 조선내에 와있는 왜놈들에게 조선의 실상에 맞는 조선 통치자료였다. 또한 정약용의 배교 행위를 높이 사, 매국행위를 조장하는 데 있었다. 1919 삼일운동 후에는 소위 문화정책차원에서 왜놈들을 열거하고, 구색 맞추기로 성학10도를 그린 이황을 조선의 교육자로 끼워 넣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국사 교과서에는 정몽주가 일본에 와 1년간 살며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내용을 게재하였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참스승을 거론할리 만무였다. 해방 후 식민사관 추종자 이병도 등은 이 때 거론된 자들에 대해 '일본 학자들로부터 인정받았다'며 광적 열광 속에 명실상부한 민족의 위인으로 만들었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저작이 아니다. 이미 나와 있던 중국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 내용은 손님을 공손히 대하라는 등 기초적인 것들을 제시하여 새로울 것이 없고, 문체가 난해하여 이해하기도 어렵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들이 당시 읽히지 않음을 원망하며 술회하였다. 읽히지 않고 보관되어 오던 것을 근 100 년이 지난 1934년에서야 정인보, 안재홍, 그의 외손인 김성진에 의해 '여유당 전서'라는 이름을 붙여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정약용이  邦禮草本으로 써 놓은 것을 經世遺表로 둔갑시켰다. 이런 정황으로 판단 하건데 정인보 등에 의해 내용이 새롭게 덧붙여지고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가본적이 없는 일본에 대해 100년 후의 정세를 예언이라도 하듯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망한지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발간된 책자가 어떻게 조선에 영향을 주었을가?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서양문물이 홍수처럼 들어와 기차가 다니고 빌딩이 섰던 시점에서, 발명한 것도 아니고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산성들이 축성되었고 북한산성 남한산성 축성에 도르래원리를 이용한 기구를 활용했을 것이다.   기록이 없을 뿐이다. 형태는 다를지라도 기중기가 화성축성에서 처음 사용되었을가? 목심심서가 조선 관리들의 업무지침서였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정약용을 위인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일본이 조선통치 지침서로 활용하려 했다. 간행된 연도와 시기를 맞춰보면 알 수 있다. 관리들의 지침서가 되기 위해서는 달랑 필사본 1부로는 가당치 않다. 최소한 목판이던 연활자이던 간행되어야 보급되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유학에 대한 언급에서는 1900년대에 발표된 연구 내용이 간혈적으로 비치는 등, 1820년대의 글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경전 주석에 있어서 양은 방대하나, 내용에 있어 새로울 것이 없다. 자신의 친인척들이 천주교 지도자들로 북경을 넘나들며 가져온 책자를 통하여 흠음심서를 저술하고 신식 기중기까지 제작하여 실지로 사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정치사회제도는 주자를 떠받들며 그 울타리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의 저서들이 별 것 아니라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문집 간행을 주도했던 정인보는 이들에게 민망한 육두문자를 써가며 호통첬다. 그리고는 "선생 1人에 대한 考究는 곧 조선사의 연구며 조선근대사상의 연구이고 조선 心魂의 明醫 내지 전조선의 성쇠존멸에 대한 연구"는 찬사를 늘어 놓았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의를 거론지 않았다. 해방 후 천관우는 이병도 밑에서 국사를 전공하고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국사에 관심을 두고 동아일보에 성리학의 상대개념으로 實學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글을 연재하였다. 그러니 성리학은 虛學으로 자연스럽게 정의된다. 이 때 정약용을 '실학의 완성자'로 부각시켰다. 이 때를 시발점으로 지금까지 국사업계 불나방들이 '실학' '실학' '다산'  '다산 정약용'하며 새로운 먹거리로 온갖 색갈을 입혀 포장하여 글을 쓰고 책자를 내는 등 심지어 연구소를 내고 한시감상이니 편지글이니 별의별 타이틀로 오늘도 일(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실학은 이미 고려에서도 있었으며, 조선에서 세종대왕과 토정 이지함 그리고 서유구를 거론치 않고는 실학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들은 실지로 실천했던 위대한 인물들이다. 

 

조선에 끼친 정약용의 실학의 업적은 다른 이들에 비해 결코 위대할 수 없다. 그러니 업적으로 화성 축성과 연관시킨다. 지금은 우리 경제가 선진국에 이르게 되어, 화성이 아름답게 재축되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까지 되는 등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축성할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정조가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亡靈에 사로잡혀, 수원천도를 위해 조성한 것일 뿐이다.

 

나라의 충신이라면 화성축성을 반대했어야 옳았다.

 

나라의 충신이라면 정조를 설득하여 화성축성을 적극 반대하였어야 했다. 화성 축성으로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다. 그럼에도 정약용 찬미자들은 온갖 구실로 화성축성에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기중기 어쩌구다. 정조가 죽자 드디어 그 부작용으로 민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자연이 탐관오리가 출현하여 세금을 걷는데 여기에 그들의 몫까지 덤터기로 챙기니 백성들은 견디다 못해  민란을 일으키고 이런 민란은 여기저기서 불길처럼 번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왜놈을 끌어들이고 그 왜놈을 견제하기 위해 떼놈을 끌어드려 결국 조선은 왜놈들에게 반항도 못하고 순수히 나라를 통체로 넘겨주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서유구는 정약용과 2살 차이로 조정에서 함께 일했으며, 그의 학문이나 삶은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교훈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임원경제지는 어마어머한 산 지식의 보고로, 조부 때부터 수장한 자료에다 3대가 직접 체험하고 연구한 내용을 포함시킨 대박과사전이다. 내용면이나 분량면에서도 어떠한 저술보다도 유용하고 방대하다. 양반으로 고위 관리직까지 지내다가 정조의 죽음으로 파주 지역으로 낙향하여 생전 지어보지 않던 힘든 농사를 직접 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농사 지으며 얻는 지식을 토대로 밤에는 기존 서적의 내용과 비교 연구하며 저술하였다. 의학 약학 농업 등등 거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최근 이를 근거로 실지로 유기농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서유구를 제외하고 실학을 말하는 이들은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저술 임원경제지는 독지가의 후원아래 해당분야 의약 약학 한의학 농업 물리학 등 박사를 취득한 후, 별도로 정규 한문 전공자들 10명에 자원봉사로 번역되어 일부가 발표되고,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아 중단되어 아직 완역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임원경제지가 그 당시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필사본이 여럿 발견된다는 것이다. 필사본이 왜놈들에게도 있다.

 

현재 정약용을 능가하여 찬양받는 조선인은 드물다. '실학의 완성, 화성 축성, 기중기 창제, 천주교 박해' '강진 유배' 등등 천방지축 그를 찬양 흠모하는 이들로 넘치고 넘친다. 그 실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사례를 보자. 

 

배교자이자 박해자를 찬양하는 천주교계

 

정약용의 친인척은 16세기 후기 조선에 천주교를 전래한 사람들이다. 그런 연유로 약용은 일찍이 천주교인이 되었다. 정조 때 천주교 박해시 문제가 되었으나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봐줬다. 그러다 정조가 갑자기 죽고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정약용은 자기 큰형 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경기도 양주 장흥 가맛골(부곡리)에 은신한 것을 밀고하여 잡히게 하였다.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그 때 잡혀간 천주교인들은 정약용과 함께 천주를 믿었던 신자들로 모진 고문에도 관련자를 밝히지 않았다. 그들의 심성을 잘 알고 있던 정약용은 개인별 정신적 고문  비책을 관헌에게 제공하였다. 그는 두 말할 필요없는 천주교 배교자이자 천주교 박해자이다. 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조선 천주교 배교 행태에서 질로보나 양으로보나 으뜸이다.

 

이러한 배교의 댓가로 약용은 기장 유배에서 강진으로 옮겨 가, 초의선사와 차를 즐기며 불교에 빠졌고, 저술활동에 초당을 지어 첩까지 얻어 풍류를 즐겨 인민의 삶과는 사뭇달랐다. 집을 떠나 가족과 멀리 있다는 것 뿐이지 자유로운 몸이 었다. 적절한 시기에는 '한 때 천주라는 헛개비에 씌였다'고 천주를 비난하며 '다시 그런 헛개비와는 전혀 관계치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상소를 수차 올렸다.    

 

그의 형인 약종은 순교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약용은 천주교에 어떤 업적이 있는지 한국예수회 재단의 서강대학교는 다산 (정약용의 호) 기념관이 있다. 일찍이 남산에 동상을 세웠고, 그의 발길이 닿은 곳에는 기념물이 속속 있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천주교 박해시 강진으로 유배갔다는 기록이다. 심지어 생가 부근에는 박물관과 성당까지 세워 기리고 있다. 그가 처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행위를 넘어 박해행위로 숱한 천주교 지도자들이 목숨을 잃어 순교자가 되었다. 이런 그의 공로가 아니라면, 그를 천주교계에서 존중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 가? 천주교계의 역사의식에 대해 궁금하기만 하다.

 

이제 정양용에 대한 찬사는 국내용만으로는 모자랐다. 호지명이 평소 정약용을 존경해 자신의 무덤에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넣어 달라고 유언하여 그의 무덤 속에는  목민심서가 놓여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사실처럼 떠돈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는, 왜놈들이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신탁통치를 위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간행하여 조선인을 다루려했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장악하자, 매국노나 다름없는 식민사관자들이 설치는 속에 한일합방이 된지 24년 후인 1934년에 정인보가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였다. 이 때 정약용의 학문적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폭언을 행사하며 찬양하였던 바, 해방 후 이병도 제자 천관우가 동아일보에 '실학'을 연재한 결과이다.

 

이와 조금 다른측면에서 알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종북자들은 정도전과 정약용이라면 열광한다. 현재 북한에서 정약용이 조선인 중 가장 존경받는 제1의 인물로 등극했다. 이전까지는 1위에 정도전이었는데, 세습 체제에서 정도전을 언급했다가는 기관총살을 면치 못한다. 그러니 정약용이 2위에서 확고한 1위로 올라섰다. 그 배경에는 해방 후 김일성은 프로레타리아 혁명가로 정도전을 띄웠다. 정약용은 공산주의 정권의 이론적 배경인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생산시설의 국유화와 공동생산 활동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맑스보다 앞선 주장으로 최초의 실천적 공산주의 사상이다. 과연 이런 주장이 정약용의 주장인지 아니면 사후 100여 년이 지나서 간행한 정인보의 주장인지 알 수 없다. 통상 문집은 아들이나 손자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유고를 모아 내기 때문에 사후 길어야 50년 이내에 간행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럼에도 문물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사후 100년이란 세월이 지나 1934년에 간행되었으니 사회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은 그야말로 천지개벽된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일본이 우리의 진정한 민족의 스승이 되어야 할 인물을 보잘 것없는 인물로 하시하고,  공리공담에 의한 파쟁을 일삼는 이를 학자로 내세워 우리의 역사의식을 지금까지도 흐리게 하였다. 변절자를 내세워 매국노를 자연스럽게 위인으로 만들려는 속셈에 식민사관자들이 일본학자가 인정하였다며 지속적으로 위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공부의 목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