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주의(歷史主義;Historismus)란 무엇인가?
1. 역사주의의 다양한 의미와 구분
역사주의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인문사회과학의 여러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처음 사용될 때부터 이 말은 매우 다의적인 개념이었지만, 그 후 다방면에 걸친 활발한 논의와 더불어 그 의미는 더욱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전개되어 현재 이말은 심지어 상호 모순되는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을 정도이다.
1) 역사 결정주의적 입장 -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
- 호퍼(Walter Hofer)
" 최근의 수없는 논의와 논쟁의 와중에서 공격당하고 주장되고 포기되고, 애매하게 된 투쟁적 개념이다. "
- 런즈(Dagovert D. Runes)
"역사주의란 어떤 사물의 역사가 그 사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며,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발전 과정 속에서 완전히 이해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 만델바움(M. Mandelbaum)
"어떤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그 현상에 대한 가치 평가는 우리가 그 현상을 그것이 어떤 발전의 과정 속에서 점유한 위치와 그 과정 속에서 수행한 역할의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믿는 신념"
- 엥겔-야노시(Friedrich Engel-Janosi)
"역사주의는 역사를 중심으로 보는 태도이며, 지적인 삶의 대부분의 영역을 역사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고 보고, 역사를 실제적 삶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론적 삶의 스승으로 삼는 태도이다." - 이런 관점에서 그는 괴테나 쇼펜하우어같은 자들도 역사주의자로 분류했다.
2) 역사 상대주의
- 만하임(Karl Manheim) - 역사적 변화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강조
역사적 변화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강조는 역사주의를 [역사적 상대주의]나 [상대주의]로 해석하게 했다. 즉,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 원리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신념으로 정의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학자가 만하임이다. " 사상이란 단지 그것이 발생한 사회적 조건의 반사작용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상관적 지식이며 그것은 관찰자의 위치와 관련시켜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 트뢸치(Ernst Troeltsch)
"역사주의는 우리의 모든 인식과 경험의 역사화이다."
3) 역사적 개성을 중시한 역사주의
-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
"우리가 적절한 의미에서 역사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를 다루는 근본적 두 개념인 개성과 개체의 발전이며, 이것은 랑케의 업적에서 절정에 달했다."
- 한스 마이어호프(Hans Meyerhof)
"역사의 특수한 성질은 일반적 법칙이나 일반적 원리를 진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있는 특수한 역사적 형식의 무한한 다양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 크로체 (Croce, Benedetto) : 독일 역사학파의 정통적 흐름을 약간 벗어난 자신을 [절대적 역사주의]라 부름
" 역사주의란 과학적으로 이야기해서 삶과 실재는 역사이며 역사뿐이다."
4)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
- 칼 포퍼
"역사적 예측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이다."
5) 기타의 견해
- 이한구({역사주의와 역사철학}의 저자 - 역자 주)
"역사주의란 모든 실재와 모든 사상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고, 이들에 대해 역사에 의한 설명과 평가를 시도하는 특수한 역사적 사고 방식이다."
- 가장 일반적인 의미
19세기 말부터 인문관계 제반 과학에서 쓰기 시작한 새로운 개념으로, 모든 사상(事象)을 역사적 생성과정으로 보고 그 가치 및 진리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 입장.
일반적으로는 19세기 독일 역사학파의 역사적인 것에 대한 견해를 가리킨다. 그 원천은 독일 경제학의 역사학파에 의해 비롯되었는데 그 뒤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의적(多義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주의를 학문적 용어의 단계에까지 올려놓은 것은 A.트뢸치와 P.마이네케이다. 트뢸치는 역사주의를 자연주의와 함께 ‘근대세계의 두 가지 위대한 학문적 창조물’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회의론에 빠진다. 그리하여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대적 문화종합(文化綜合)’과 ‘미래에의 가치 형성’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마이네케는 역사주의를 사적으로 고찰하고 역사주의란 ‘라이프니츠로부터 괴테에 이르는 대규모적인 독일사상에서 얻어진 새로운 생활원리’인 동시에 ‘서유럽적 사유가 체험한 최대의 정신혁명의 하나’이며, 이는 단순히 정신과학상의 방법에 머물지 않는 세계관 ·인생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역사주의는 개체성(個體性)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양자는 서로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개체성은 발전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발전은 개체의 자발성에 입각해 있다. 이것이 사상으로서는 괴테에 의해서, 역사학에서는 랑케에 의해서, 각각 결실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분석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개체성의 개념인데, 이것이 그의 역사주의의 중핵적 지위를 차지한다.
따라서 유물사관(唯物史觀)과 같은 역사법칙과 유형 탐구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상대주의의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의 이 위험성 극복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규범(規範)을 도덕률 속에서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방법론으로서의 역사주의는 F.W.니체와 J.지멜 등에 의해 인간정신의 형성과 창조력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고 또한 K.R.포퍼로부터는 역사주의적 방법이 빈곤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2. 전통적 역사주의의 두 의미
1) 역사적 방법론
방법론으로서 역사주의는 역사 연구에 있어 역사가를 지도하는 개념과 원리의 체계를 의미한다. 물론 이때의 방법은 경험적 자료를 수집하는 정확한 기술이나 자료의 분석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일반적 탐구의 방법을 의미한다. 즉, 역사가의 목적과 목표에 영향을 미치며, 그가 그의 주제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적 틀이나 규칙들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방법론은 발전, 개성, 연관 등의 원리, 그리고 이해의 방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 발전의 원리
역사적 현실 전체가 다양한 발전의 과정이고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 이 발전하는 역사 과정 속에서 전개된다는 이론. 역사가는 개인이나 사건, 민족이나 시대를 다른 개별자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특이한 개체로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한 개체가 발전하는 상이한 단계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내적 혹은 외적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역사가는 모든 개체가 역사 과정에서 그 자신의 시대와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이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성장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W. Dilthey는 역사가가 <기원적인 것에 대한 감각, 진정한 발전의 본질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뢸치도 발전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모든 것이 생성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무제한의 그리고 끊임없는 개별화로서, 과거에 의해 규정되고 알 수 없는 미래에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법, 도덕, 종교, 예술 등 모두가 역사적 생성의 흐름 속으로 해소되고 역사적 발전의 구성 요소로서 우리들에게 이해된다.>
그러나 <발전의 개념>은 단순한 반복적 <반복의 개념>, <진보의 개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진보가 낮은 단계에서의 높은 단계로의 변화인데 반해, 발전은 동일 차원에서의 상대적인 전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케는 계몽주의의 진보 개념을 부정하고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되며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마이네케는 각 시대는 공리성이나 유용성에서가 아니라 그 시대가 지니는 내적 본질에서 평가해야 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 개성의 원리
역사상의 개별적 사실들이나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개성과 가치를 갖는다는 이론. 개성에 대한 강조는 이상주의나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낭만주의는 인간을 감정과 정서가 지배하는 비합리적 존재로 보며, 개개인을 하나의 생동하는 개성적 존재로 파악한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을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이성적 존재로 본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의 발생 시기는 정신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19세기 낭만주의의 비판을 통해서 특징지어진다. 즉, 계몽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변화하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표상이었고,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비판은 바로 이 계몽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겨냥한 것이었다. 역사주의로의 역사적 사고의 이행을 제시하고 있는 Charles A. Beard와 Alfred Vagts의 도표를 보도록 하자.
<표1> 역사주의로의 역사적 사고의 이행 (Charles A. Beard와 Alfred Vagts)
계몽주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그러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고정 불변한 인간성을 설명의 기초로서 선택하고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지 않는 것과 그 법칙에로 환원시키는 자연과학적 이상을 지지한다. 즉, 계몽주의는 인간 존재의 비역사적 성격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역적 사건들은 보다 차원이 높은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되며, 각 시대와 민족은 세계사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삶의 간단한 상태로부터 최고의 이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적 통일체가 형성되고 이것이 정점에 도달한 후 다시 소멸하는 것을 기준으로 역사적 과정의 시기들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시기들은 또 다시 보다 큰 전체와의 내적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연관의 원리는 불가피하게 역사주의를 전체론으로 몰고갔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주의는 개체와 개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전체만이 참다운 존재라는 전체론과는 양립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역사주의의 개체는 원자적 개체가 아닐, 연관의 원리에 기초한 전체적인 개체이기 때문에 역사주의는 전체론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주의를 새롭게 정의한 칼 포퍼는 역사주의의 전체론적 기초를 가장 날카롭게 갈파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역사주의의 선구자인 비코가 신이 창조한 연장의 세계인 자연은 원칙상 이해 불가능한 세계요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역사세계만이 이해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역사의 세계를 자연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보려했던 것이었고, 같은 역사주의의 선구자인 훔볼트가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탐구함에 있어 사실의 외부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부 구조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비판적 탐구의 방법과 아울러 이를 넘어서는 직관적 이해의 방법이 필요 불가결하다고 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헤르더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내면적 생활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요구하는 방법론은 발견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모두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에 공감을 가지고, 시대와 지리, 그리고 전체 역사 속에 몰입하여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을 느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해적 방법>의 인식론적 기초는 딜타이에 의해 닦여졌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탐구의 두 가지 태도가 완전히 구별된다. 하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중심에 놓고 보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태도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자연과학은 외부로부터, 현상으로서, 개별적으로, 감각에 주어지는 사실들을 그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서, 정신과학은 내부로부터, 실재로서, 살아있는 전체로서, 내면적 경험에 나타나는 사실들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역사주의의 역사 인식은 내면적 경험을 중시하는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역사가는 이해를 통해서만 자신의 주제에 침투를 할 수 있고, 문제되는 시대에 대한 구체적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성은 유전과 변화의 와중에 있고 새로운 개체들이 나타나서 발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복되지 않는 개체들 각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특이한 위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트뢸치가 규정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18세기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자연주의가 모든 현상을 자연화 하려했고 동시에 수학화 하려 한 데 반해서,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화하고 동시에 개별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주의가 온갖 현상과 그 변화 과정을 자연의 불변적 법칙에 따라 설명코자 하는 입장인데 반해,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개성적이고 발전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먼저 고정 불변적인 존재 개념을 거부하는 <동적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만하임은 이러한 동적 세계관으로서의 역사주의를 19세기에 와서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으로 해석한다 : <역사주의란 현대의 세계관이며……우리의 모든 세계 이해에 기초되어 있는 세계 해석의 방식이다.> 만하임에 의하면, 서양 중세기를 특징지운 정적이고 신학적인 세계 개념은 계몽주의 시대까지도 세속화된 개념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문화 모두 무시간적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도전한 역사주의는 극단적인 시간 중심적 세계관이었고, 모든 것을 역사화하려는 진화적 세계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이네케 역시 역사주의를 동적 세계관으로 정의한다. 그에 있어서 역사주의는 우리의 온갖 지식과 가치를 역사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보고자 하는 앎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모든 현실은 동일한 두 사건이 존재할 수 없는 일회적인 역사적 흐름이라는 삶의 원리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그 가치를 그것의 시간적 변화 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가 주어진 세계인 동시에 창조되어 가는 세계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19세기 말부터 회의주의적 세계관의 성격을 띄게 된다. 이것은 모든 현상을 역사적 변화의 맥락에서 해석코자 하는 역사주의의 상대주의적 결과였다. 역사적 상대주의에 의하면, 진리라는 말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하며, 보편 타당한 진리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개념과 규범 자체의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으로만 파악코자 하는 역사주의의 실증적 태도와도 관련을 갖는다. 모든 개념과 규범이 다만 역사적 사실들이고 역사적 사실성이 모든 개념과 규범들의 기초라면, 초역사적으로 타당한 인식이나 가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네델바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윤리적 상대주의를 포함하는 역사주의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역사주의의 정신과학적 실증성에 의한 철학적 정당화로서 간주한다. 이리하여 역사주의는 상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위기의 상태를 맞이한다.
역사주의의 문제점은 이런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당면한 문제뿐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념의 좌절과 위기라는 문제도 있었다. 트뢸치, 마이네케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역사주의자들은 대체로 보수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온건한 자유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도 매우 낙관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제기된 역사주의의 위기는 독일 자유주의 사상의 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었다.
독일의 자유주의 사상은 자연법 이론에서보다는 역사주의에서 자유론을 위한 더욱 좋은 이론적 기초를 발견한다. 자연법적 사상은 개인의 참다운 자유와 자발성을 제한한다는 것이 독일 자유주의 사상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개인의 존엄성은 그가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있는 공통적인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특이성에 기초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역사주의는 처음 역사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자유주의를 위한 타당한 이론적 기초가 될 수 없었다. 개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의 개체는 구체적 욕망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랑케의 국가관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거의 언제나 집단적 실재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과 개인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에로 역사가 발전해 갈 것이라는 역사주의의 낙관적 견해는 주로 인간의 합리성과 선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이런 입장에서 역사주의는 존재하는 제도와 정치 권력은 합리성과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크게 흔들리기에 이른다. 이것이 역사주의가 당면한 이념적 측면에서의 위기였다.
영미 학계에서는 역사주의를 의미하는 말로서 20세기를 전후해서 Historismus이 사용되다가, 1930년대 후기부터 1940년대에 걸쳐 Historicism이 등장하여 지금은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서 정착된 실정이다. 이 말들은 모두 독일어 Historismus나 Historizismus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Historicism이 Historism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 역사주의의 의미로 B. 크로체가 사용한 이탈리아 말인 Storicismo가 다시 Historicism으로 영역되어 영미 학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크로체의 영향 때문에 Historicism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Historicism은 포퍼에 와서 Historism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Historism으로는 전통적인 역사주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했고, Historicism으로는 자신이 새로이 규정한 역사주의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Historicism과 Historicism, 독일어 Historismus와 Historizismus는 엄격히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포퍼는 자신이 구성한 역사주의를 사회과학의 특이한 방법론으로서 규정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연관의 원리
역사 속의 개별적 사건이나 사실들은 하나의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연관 속에 존재한다는 이론. 딜타이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정신생활은 부분들의 합성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즉, 그것은 요소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근원적으로 포괄적인 통일체이다. 이러한 통일체로부터 정신적 기능들은 분화되지만, 그 때에도 그것들은 상호 연관 속에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역적 사건들은 보다 차원이 높은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되며, 각 시대와 민족은 세계사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삶의 간단한 상태로부터 최고의 이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적 통일체가 형성되고 이것이 정점에 도달한 후 다시 소멸하는 것을 기준으로 역사적 과정의 시기들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시기들은 또 다시 보다 큰 전체와의 내적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연관의 원리는 불가피하게 역사주의를 전체론으로 몰고갔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주의는 개체와 개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전체만이 참다운 존재라는 전체론과는 양립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역사주의의 개체는 원자적 개체가 아닐, 연관의 원리에 기초한 전체적인 개체이기 때문에 역사주의는 전체론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주의를 새롭게 정의한 칼 포퍼는 역사주의의 전체론적 기초를 가장 날카롭게 갈파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 이해의 이론
발전, 개성, 연관 등의 원리와 함께 역사주의의 중요한 방법론적 원리는 <이해의 이론>이다. 역사주의가 이해의 방법을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자연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구별된다는 역사주의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주의의 선구자인 비코가 신이 창조한 연장의 세계인 자연은 원칙상 이해 불가능한 세계요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역사세계만이 이해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역사의 세계를 자연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보려했던 것이었고, 같은 역사주의의 선구자인 훔볼트가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탐구함에 있어 사실의 외부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부 구조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비판적 탐구의 방법과 아울러 이를 넘어서는 직관적 이해의 방법이 필요 불가결하다고 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헤르더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내면적 생활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요구하는 방법론은 발견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모두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에 공감을 가지고, 시대와 지리, 그리고 전체 역사 속에 몰입하여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을 느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해적 방법>의 인식론적 기초는 딜타이에 의해 닦여졌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탐구의 두 가지 태도가 완전히 구별된다. 하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중심에 놓고 보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태도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자연과학은 외부로부터, 현상으로서, 개별적으로, 감각에 주어지는 사실들을 그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서, 정신과학은 내부로부터, 실재로서, 살아있는 전체로서, 내면적 경험에 나타나는 사실들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역사주의의 역사 인식은 내면적 경험을 중시하는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역사가는 이해를 통해서만 자신의 주제에 침투를 할 수 있고, 문제되는 시대에 대한 구체적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2) 세계관의 원리
역사주의적 개념을 구체화한 역사적 방법이 확장되어 세계 일반에 관한 견해에 적용되었을 때 역사주의는 세계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세계관이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위치에 관한 통일적이고 포괄적인 견해이며, 세계 전체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앞의 역사과학 방법론의 원리에서 이야기한 발전과 개성 및 연관의 범주를 통해서 세계를 해석코자 하는 것이다.
역사주의적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성은 유전과 변화의 와중에 있고 새로운 개체들이 나타나서 발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복되지 않는 개체들 각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특이한 위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트뢸치가 규정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18세기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자연주의가 모든 현상을 자연화 하려했고 동시에 수학화 하려 한 데 반해서,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화하고 동시에 개별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주의가 온갖 현상과 그 변화 과정을 자연의 불변적 법칙에 따라 설명코자 하는 입장인데 반해,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개성적이고 발전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먼저 고정 불변적인 존재 개념을 거부하는 <동적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만하임은 이러한 동적 세계관으로서의 역사주의를 19세기에 와서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으로 해석한다 : <역사주의란 현대의 세계관이며……우리의 모든 세계 이해에 기초되어 있는 세계 해석의 방식이다.> 만하임에 의하면, 서양 중세기를 특징지운 정적이고 신학적인 세계 개념은 계몽주의 시대까지도 세속화된 개념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문화 모두 무시간적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도전한 역사주의는 극단적인 시간 중심적 세계관이었고, 모든 것을 역사화하려는 진화적 세계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이네케 역시 역사주의를 동적 세계관으로 정의한다. 그에 있어서 역사주의는 우리의 온갖 지식과 가치를 역사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보고자 하는 앎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모든 현실은 동일한 두 사건이 존재할 수 없는 일회적인 역사적 흐름이라는 삶의 원리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그 가치를 그것의 시간적 변화 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가 주어진 세계인 동시에 창조되어 가는 세계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세계관은 19세기 말부터 회의주의적 세계관의 성격을 띄게 된다. 이것은 모든 현상을 역사적 변화의 맥락에서 해석코자 하는 역사주의의 상대주의적 결과였다. 역사적 상대주의에 의하면, 진리라는 말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하며, 보편 타당한 진리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개념과 규범 자체의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으로만 파악코자 하는 역사주의의 실증적 태도와도 관련을 갖는다. 모든 개념과 규범이 다만 역사적 사실들이고 역사적 사실성이 모든 개념과 규범들의 기초라면, 초역사적으로 타당한 인식이나 가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네델바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윤리적 상대주의를 포함하는 역사주의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역사주의의 정신과학적 실증성에 의한 철학적 정당화로서 간주한다. 이리하여 역사주의는 상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위기의 상태를 맞이한다.
역사주의의 문제점은 이런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당면한 문제뿐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념의 좌절과 위기라는 문제도 있었다. 트뢸치, 마이네케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역사주의자들은 대체로 보수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온건한 자유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역사의 발전에 대해서도 매우 낙관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제기된 역사주의의 위기는 독일 자유주의 사상의 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었다.
독일의 자유주의 사상은 자연법 이론에서보다는 역사주의에서 자유론을 위한 더욱 좋은 이론적 기초를 발견한다. 자연법적 사상은 개인의 참다운 자유와 자발성을 제한한다는 것이 독일 자유주의 사상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개인의 존엄성은 그가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있는 공통적인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특이성에 기초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역사주의는 처음 역사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자유주의를 위한 타당한 이론적 기초가 될 수 없었다. 개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의 개체는 구체적 욕망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랑케의 국가관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거의 언제나 집단적 실재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과 개인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에로 역사가 발전해 갈 것이라는 역사주의의 낙관적 견해는 주로 인간의 합리성과 선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이런 입장에서 역사주의는 존재하는 제도와 정치 권력은 합리성과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크게 흔들리기에 이른다. 이것이 역사주의가 당면한 이념적 측면에서의 위기였다.
3) 비판적 합리주의가 규정한 역사주의의 의미
역사주의Historismus는 19세기 중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가진 전문적 용어로서 논의되게 된 것은 20세기에 거의 와서였다.
영미 학계에서는 역사주의를 의미하는 말로서 20세기를 전후해서 Historismus이 사용되다가, 1930년대 후기부터 1940년대에 걸쳐 Historicism이 등장하여 지금은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서 정착된 실정이다. 이 말들은 모두 독일어 Historismus나 Historizismus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Historicism이 Historism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 역사주의의 의미로 B. 크로체가 사용한 이탈리아 말인 Storicismo가 다시 Historicism으로 영역되어 영미 학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크로체의 영향 때문에 Historicism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Historicism은 포퍼에 와서 Historism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Historism으로는 전통적인 역사주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했고, Historicism으로는 자신이 새로이 규정한 역사주의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Historicism과 Historicism, 독일어 Historismus와 Historizismus는 엄격히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포퍼는 자신이 구성한 역사주의를 사회과학의 특이한 방법론으로서 규정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역사주의란 역사적 예측이 사회과학의 기본적 목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목적이 역사 진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율동이나 유형, 법칙이나 경향을 발견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보는 사회과학에의 한 접근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역사주의는 방법론적 전체론이나 역사 법칙에 의한 역사적 예측의 신념과 동일시 된다. 말하자면, 포퍼가 규정한 역사주의의 방법론적 원리는 방법론적 개체론에 대립되는 방법론적 전체론의 원리로서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서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1) 개인들의 활동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사회 전체가 존재한다. (2) 이러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지배하는 거시적인 역사 법칙이 존재한다. (3) 이러한 역사 법칙에 기초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적 법칙주의>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주의가 이렇게 규정될 때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이 그 대표자들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통적 역사주의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포퍼가 정의한 이러한 역사주의에 대해 전통적 역사주의만을 인정하는 이론가들로부터 강한 비판들이 제기되어왔다. 포퍼가 규정한 역사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사주의는 역사적 결정론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승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역사가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해 간다는 진보의 개념까지도 용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전통적 역사주의가 거부하는 이론들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역사주의자인 마이어호프는 포퍼가 설정한 역사주의의 상은 역사주의의 서투론 모방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방법을 그대로 사회과학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학파를 <자연주의적 학파>로,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학파를 <반자연주의적 학파>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자연주의란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사회과학에 있어서 자연과학적 방법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방법론적 일원론이라 할 수 있고, 반자연주의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의 상이성을 주장하는 방법론적 이원론 내지 다원론이라 할 수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포퍼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포퍼가 자연주의적 학파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포퍼는 실증주의자는 아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철학자들로부터 실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언제나 격분했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적 방법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실증주의자와 입장을 같이하지만, 인식 일반의 이론에 있어서 실증주의와는 크게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포퍼의 인식론은 보통 비판적 합리주의라 불린다. 이것은 그의 인식론이 경험주의보다는 합리주의의 전통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는 재래의 독단적 합리주의와는 엄격히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이라는 수식어를 언제나 요구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참된 경험과학과 경험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반증의 원리>를 제시했으며 진정한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가설-연역적 방법> 내지 <시행착오의 방법>을 제시했다. 가설-연역적 방법에 의하면 모든 과학적 인식은 지각이나 관찰, 혹은 자료의 수집에서 시작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는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체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시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포퍼에 의하면 역사주의도 이러한 오류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역사주의 역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오해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주의는 반자연주의적 특징과 아울러 친자연주의적 원리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특징적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연사주의는 전체적으로 반자연주의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포거가 제기한 역사주의의 여러 문제들이란 결국 반자연주의가 주장하는 문제들이었다.
그가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엄밀한 논리적 이유로 우리가 역사의 미래 과정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 다음과 같은 논증이 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잘 대변해 준다 :
이것은 전통적 역사주의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포퍼가 정의한 이러한 역사주의에 대해 전통적 역사주의만을 인정하는 이론가들로부터 강한 비판들이 제기되어왔다. 포퍼가 규정한 역사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사주의는 역사적 결정론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승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역사가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해 간다는 진보의 개념까지도 용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전통적 역사주의가 거부하는 이론들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역사주의자인 마이어호프는 포퍼가 설정한 역사주의의 상은 역사주의의 서투론 모방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난한다.
4) 비판적 합리주의가 제기한 역사주의의 문제점
포퍼가 규정한 역사주의는 사회과학의 한 방법론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 역사주의의 문제들은 주로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해서 제기된다.
우리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 자연과학의 방법을 그대로 사회과학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학파를 <자연주의적 학파>로,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학파를 <반자연주의적 학파>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자연주의란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사회과학에 있어서 자연과학적 방법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방법론적 일원론이라 할 수 있고, 반자연주의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의 상이성을 주장하는 방법론적 이원론 내지 다원론이라 할 수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포퍼는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포퍼가 자연주의적 학파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포퍼는 실증주의자는 아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철학자들로부터 실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언제나 격분했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적 방법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실증주의자와 입장을 같이하지만, 인식 일반의 이론에 있어서 실증주의와는 크게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포퍼의 인식론은 보통 비판적 합리주의라 불린다. 이것은 그의 인식론이 경험주의보다는 합리주의의 전통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는 재래의 독단적 합리주의와는 엄격히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이라는 수식어를 언제나 요구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참된 경험과학과 경험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반증의 원리>를 제시했으며 진정한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가설-연역적 방법> 내지 <시행착오의 방법>을 제시했다. 가설-연역적 방법에 의하면 모든 과학적 인식은 지각이나 관찰, 혹은 자료의 수집에서 시작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는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체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시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포퍼에 의하면 역사주의도 이러한 오류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역사주의 역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오해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주의는 반자연주의적 특징과 아울러 친자연주의적 원리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특징적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연사주의는 전체적으로 반자연주의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포거가 제기한 역사주의의 여러 문제들이란 결국 반자연주의가 주장하는 문제들이었다.
그가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엄밀한 논리적 이유로 우리가 역사의 미래 과정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 다음과 같은 논증이 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잘 대변해 준다 :
(1) 인간의 역사과정은 인간의 지식의 성장의 큰 영향을 받는다.
(2) 우리는 합리적 방법이나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미래에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역사의 미래 과정을 예측할 수 없다.
(4) 이것은 이론 역사학의 가능성, 즉 이론 물리학에 대응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이 부인됨을 의미한다. 역사적 예측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역사 발전에 관한 과학적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5) 그러므로 역사주의적 방법들의 기본적 목표는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역사주의는 붕괴한다.
(2) 우리는 합리적 방법이나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미래에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역사의 미래 과정을 예측할 수 없다.
(4) 이것은 이론 역사학의 가능성, 즉 이론 물리학에 대응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이 부인됨을 의미한다. 역사적 예측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역사 발전에 관한 과학적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5) 그러므로 역사주의적 방법들의 기본적 목표는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역사주의는 붕괴한다.
3. 역사주의의 사학자와 그들의 역사관
- 역사주의 사학자로 비코, 훔볼트, 헤르더, 랑케, 가제브레히트, 부르크하르트, 지벨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랑케, 가제브레히트 등에 대해서 알아본다.
1) 랑케(Ranke, Leopold von :1795.12.21~1886.5.23)
독일의 역사가이며 국적은 독일이다. 활동분야는 역사이고 주요저서로서 《라틴 및 게르만 제(諸)민족의 역사 1494∼1514》(1824) 등이 있다.
새로운 연구방법과 교수법으로 서유럽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학 ·언어학을 수학하고, 1818년 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의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처녀작 《라틴 및 게르만 제(諸)민족의 역사 1494∼1514》(1824)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25년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었다. 그 후 이곳에서 50년 간에 걸쳐 강의를 담당하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사이 1841년 프로이센 국사편수관, 1859년 바이에른 학사원 사학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역사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는 역사학을 현실의 철학 ·정책에서 해방시켜 역사학 독자의 연구시야를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공적이 크며, 이것이 그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연유이다. 주요저서에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1845~1847) 《프로이센사》(1847∼1848) 《16~17세기 프랑스사》(1852~1861) 《16~17세기 영국사》(1869) 등이 있다.
2) 기제브레히트(Giesebrecht, Friedrich Wilhelm Benjamin von : 1814.5.5~1889.12.18)
독일의 사학가이다. 주요저서로는 《독일 황제시대의 역사》(6권, 1855∼1895) 등이 있다. L.v.랑케의 제자. 베를린대학을 졸업하고 김나지움의 교사로 있다가, 1857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1862년 뮌헨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중세사료(史料)의 수집 ·편집 ·번역 등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독일 황제시대의 역사》(6권, 1855∼1895)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고대 독일의 하인리히 1세 이후부터 프리드리히 1세까지의 역대 황제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상술하였다. 중세에 독일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을 공정하게 인정하였으나, 독일제국의 통일에 대한 의론이 분분한 당시의 상황에서 프로이센학파, 특히 역사가 H.v.지벨 등의 심한 반박을 받았다. 그 밖의 저서에 《오토 2세 때 독일제국 연대기》 등이 있다.
3) 부르크하르트 (Burckhardt, Jacob : 1818.5.25~1897.8.8)
스위스의 역사가이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문화사》(1898∼1902) 《세계사적 재고찰》(1885) 등이 있다.
바젤의 신교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신학을 배우다가 역사 ·미술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839년 베를린대학에 들어가, L.랑케에게 역사학을 배웠다. 한편 독일 ·이탈리아의 미술을 연구하여 미술사가(史家)로서도 인정을 받아, 1858년 바젤대학의 사학(史學) ·미술사 교수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인데, 이것으로 그는 랑케가 정치사에서 차지한 것과 같은 위치를 문화사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르네상스사(史)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명저로서, 이후 ‘르네상스’란 말은 역사상 일반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그는 역사 연구의 임무란 ‘발전’이 아니라 ‘항상적(恒常的)인 것, 반복되는 것, 유형적인 것’의 3가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의 손으로 《그리스문화사》(1898∼1902) 《세계사적 재고찰》(1885) 등이 발간되었다.
4) 지벨 (Sybel, Heinrich von : 1817.12.2~1895.8.1)
뒤셀도르프 출생. 베를린대학에서 L.랑케의 제자가 되어 역사학을 배운 후 본대학 ·마르부르크대학 ·뮌헨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역사학과 정치의 연결을 강조하여 1848년 혁명에 참가하였고, 프랑크푸르트준비의회 ·헤센공국(公國)의회 ·에르푸르트의회 등에도 참가하였다.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통일의 주창자로서 프로이센학파를 형성하였으며, 1859년 《사학잡지(史學雜誌) Historische Zeitschrift》를 창간하였다.
1862∼1864년 진보당에 소속하여 프로이센 하원의원이 된 후 처음에는 비스마르크의 군비확장정책에 반대하였으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후에는 그 정책을 지지하였다. 1867년 프로이센 제헌의회의원을 거쳐 1874∼1879년 프로이센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875년 프로이센 국립고문서관(古文書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에는 프로이센 하원에서 국민자유당에 소속되어 비스마르크와 함께 사회주의 및 가톨릭교회와의 투쟁에 앞장섰다. 저서에 《독일제국의 건설 Die Begrndung des Deutschen Reiches》(7권, 1889∼1894)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만년의 대작으로 공문서를 인용한 최초의 대규모 독일통일사이다.
5) 마이네케 (Meinecke, Friedrich : 1862.10.30~1954.2.6)
슈트라스부르크(1901∼1906) ·프라이부르크 (1906∼1914) ·베를린(1914∼1928) 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 자유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역사가로서는 사실의 추이(推移)보다는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이념을 추구하였으며, 딜타이 ·트뢸치와 함께 정신사(精神史) 또는 이념사(理念史)의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역사학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 《세계시민주의와 국민국가》 (1908) 《근대사에서의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이념》 (1924) 《역사주의(歷史主義)의 성립》 (1936) 등이 있다.
파시즘 시대에는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반(反)파시스트 지식인의 의견을 대변하였으며, 망명 ·추방 ·투옥된 파시즘 반대자들을 돕고, 젊은 사람들을 위한 자유의 기치로서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파시즘이 무너진 후에는 자유당(自由黨)을 설립하여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죽기 몇 년 전부터는 다시 연구생활로 들어갔다.
크로체는 자신의 철학을 ‘정신의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현실에 내재(內在)하는 정신에는 예술과 논리라는 이론적 활동과, 경제와 윤리라는 실천적 활동이 있다고 보고, 이들 네 가지 활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이 근저(根底)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역사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인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철학은 역사 속에서 생겨나 조건지어지고 가꾸어진다는 역사주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으로서 윤리와 자유가 강조됨으로써 그의 철학은 강한 실천적 색채를 띠게 된다.
독일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였다. 출생지는 독일 뒤셀도르프이다. 주요저서로는 《독일제국의 건설》(1889∼1894) 등이 있다.
뒤셀도르프 출생. 베를린대학에서 L.랑케의 제자가 되어 역사학을 배운 후 본대학 ·마르부르크대학 ·뮌헨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역사학과 정치의 연결을 강조하여 1848년 혁명에 참가하였고, 프랑크푸르트준비의회 ·헤센공국(公國)의회 ·에르푸르트의회 등에도 참가하였다.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통일의 주창자로서 프로이센학파를 형성하였으며, 1859년 《사학잡지(史學雜誌) Historische Zeitschrift》를 창간하였다.
1862∼1864년 진보당에 소속하여 프로이센 하원의원이 된 후 처음에는 비스마르크의 군비확장정책에 반대하였으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후에는 그 정책을 지지하였다. 1867년 프로이센 제헌의회의원을 거쳐 1874∼1879년 프로이센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875년 프로이센 국립고문서관(古文書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에는 프로이센 하원에서 국민자유당에 소속되어 비스마르크와 함께 사회주의 및 가톨릭교회와의 투쟁에 앞장섰다. 저서에 《독일제국의 건설 Die Begrndung des Deutschen Reiches》(7권, 1889∼1894)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만년의 대작으로 공문서를 인용한 최초의 대규모 독일통일사이다.
5) 마이네케 (Meinecke, Friedrich : 1862.10.30~1954.2.6)
독일의 역사가이다. 주요저서로는 《세계시민주의와 국민국가》(1908) 《역사주의의 성립》(1936) 등이 있다.
슈트라스부르크(1901∼1906) ·프라이부르크 (1906∼1914) ·베를린(1914∼1928) 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 자유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역사가로서는 사실의 추이(推移)보다는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이념을 추구하였으며, 딜타이 ·트뢸치와 함께 정신사(精神史) 또는 이념사(理念史)의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역사학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 《세계시민주의와 국민국가》 (1908) 《근대사에서의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이념》 (1924) 《역사주의(歷史主義)의 성립》 (1936) 등이 있다.
6) 크로체 (Croce, Benedetto : 1866.2.25~1952.11.20)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가이다. 페스카세롤리 출생. 로마대학에 다녔으며, 예술 ·문학 ·정치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한 흥미를 가졌다. 《정신의 철학 Filosofia dello spirito》(1902) 《역사의 이론과 역사》(1915) 등의 저서를 남기는 한편, 월간잡지 《비평 La Critica》을 발행하였다(1903∼1937). 정치에도 참여하여 G.젠틸레와 함께 유명한 교육개혁안 작성을 맡았고, 상원의원과 교육장관이 되기도 하였다.
파시즘 시대에는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반(反)파시스트 지식인의 의견을 대변하였으며, 망명 ·추방 ·투옥된 파시즘 반대자들을 돕고, 젊은 사람들을 위한 자유의 기치로서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파시즘이 무너진 후에는 자유당(自由黨)을 설립하여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죽기 몇 년 전부터는 다시 연구생활로 들어갔다.
크로체는 자신의 철학을 ‘정신의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현실에 내재(內在)하는 정신에는 예술과 논리라는 이론적 활동과, 경제와 윤리라는 실천적 활동이 있다고 보고, 이들 네 가지 활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이 근저(根底)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역사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인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철학은 역사 속에서 생겨나 조건지어지고 가꾸어진다는 역사주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으로서 윤리와 자유가 강조됨으로써 그의 철학은 강한 실천적 색채를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