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 드라마 <대풍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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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말했듯이, 여진족은 처음에는 한민족과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종족이 갈라지면서, 한민족은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민족이 여진족보다 딱히 나은 것도 별로 없었다.
최근 천년 사이에 여진족은 두 차례나 중원을 정복했다. 그들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는 양자강 근처까지 영토를 넓혔고, 이 나라는 당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1644~1912년)는 중국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례로, 경제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따르면, 적어도 1800년 무렵까지 청나라는 세계 무역수지의 40% 이상을 흡수했다.
그에 비해, 지난 천 년간 한민족은 그런 영광을 누린 적이 없다. 지난 천년뿐만 아니라 지난 2천년 동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여진족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상하지 않겠지만, 제3자들의 눈에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여진족보다 딱히 나을 게 없는데도, 한민족이 그들을 야만족으로 취급한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체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농경민이고 여진족은 유목민족(혹은 반농반목)이었기에 두 민족 사이에서 경쟁심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민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야만족'이라며 유목민을 멸시했고, 유목민은 '땅에 얽매여 풀이나 뜯어먹는 야만족'이라며 농경민을 멸시했다. 자본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가 어떻게든 상대방을 폄하하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한민족이 여진족을 무시한 배경에는 그런 경제적 이질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같은 한민족의 정서 때문에 가장 곤혹을 느낀 집단 중 하나는, 고려 말에 등장한 이성계의 추종세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주류 고려인들의 시선 속에 담긴 싸늘한 눈빛을 의식해야 했다. 이들 역시 국적 상으로는 고려인이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고려왕조의 소수민족인 여진족이었다.
고려사회의 비주류인 이들은 이 땅에서 여진족의 우수성을 홍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우수할지라도 고려 안에서는 어디까지나 소수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적으로 강력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거의 힘을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았던 이성계
이성계를 추종하는 여진족 출신들은 자신들이 여진족보다는 한민족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만 주류 사회에 정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들 대다수가 여진족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운 차선책은, 주군인 이성계만큼은 여진족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성공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공권력의 뒷받침 하에 널리 홍보되었다.
이성계가 주류 사회의 지식인 그룹인 신진사대부(개혁파 선비 그룹)들과 연대하여 조선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이성계보다 강한 권력을 갖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의 종족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됐다.
▲ <대풍수>의 이성계(지진희 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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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권력으로 누른다고 해서 종족 문제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객관적 증거로만 본다면, 이성계가 여진족이 아닐 가능성보다는 여진족일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거의 다 '증언'이었다. 이런 증언들은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에 확보된 것들이었다. 예컨대, "우리 집안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여진족 지역으로 이동했다"와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이성계가 여진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거의 다 '물증'이었다. 이런 물증들은 이성계가 등장할 당시에 고려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들이었다.
증언과 물증이 서로 상반될 경우, 물증을 좀더 신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성계 측의 단호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여진족'이라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성계 측이 강력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계기 여진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물증들 중에서 세 가지의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자.
세가지 물증이 의미하는 것
첫째, 역사무대에 등장할 당시에 이성계는 여진족 거주지인 고려 동북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법적 의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흘러들어간 한민족 주민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어디까지나 여진족의 주무대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여진족을 바라보는 눈으로 이성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선을 불식시키고자 이성계 측은 '전라도 전주의 세력가였던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기생문제 때문에 지방관의 미움을 받은 뒤, 170여 가구를 이끌고 여진족 거주지로 도주한 다음에 이 지역의 세력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70여 가구를 지도할 만한 세력가가 여자 문제로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나, 농경 지역인 전주에서 쫓겨난 인물이 목축 혹은 유목지역인 여진족 거주지에 가서 금세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수십 혹은 수백 가구가 세력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는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 이동하는 유목민 가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내몽골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
ⓒ 김종성 |
둘째, 이성계 집안은 농업이 아닌 목축 혹은 유목업을 경영했다. <태조실록> '총서' 편에서는 "목조(이안사)가 석성을 쌓고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고 했다. 또 '총서'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이 지금의 함흥 근처인 함주로 진출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목축에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성계 집안의 생업은 농업이 아니라 목축 혹은 유목업이다. 만약 이 집안이 본래 농업을 경영하던 지주 가문이었다면, 여진족 거주지에 가서도 어떻게든 농토를 개척하려 하지 않았을까?
셋째, 이성계의 휘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다. 세종 19년 8월 7일자(1437년 9월 6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최측근인 여진족 이지란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 외에도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등을 비롯한 10여 명 이상의 여진족 세력가들이 이성계를 보필했다.
신약성경인 누가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했다. 종교 지도자는 자기 고향에서 힘을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종교 지도자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고향 사람들이 그를 신성시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사나 정치 분야에서는 다르다. 이런 분야에서는 자신과 고향이 가까운 사람을 지도자로 모시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인이 중국에 가서 군부 장성이나 고위 위정자로 성장하기 힘들 듯이 말이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종교 교주가 아니라 군사 지도자였다. 일반적인 경험법칙을 볼 때, 비(非)여진족 출신의 장수가 여진족 장교나 병사들로부터 고도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정규군과 사병을 포함해서 고려 말에 존재한 군사집단 중에서 단결력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바로 이성계 군단이었다. 여진족 병사들의 절대 충성을 받는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 나타났으니, 고려 사람들은 그를 여진족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초인적인 리더라면 종족의 벽을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는 주류 고려인들이 자신을 여진족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성계가 역사무대에 등장할 당시에 그는 여진족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농업이 아닌 목축업 혹은 유목업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휘하 장수들도 거의 다 여진족 출신이었다.
이런 물증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 구성원들은 이성계를 여진족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 이런 분위기에서는 한민족 백성들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자신이 여진족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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