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인이 오래전부터 연구조사한 결과입니다. 정식 논문 발표에 앞서 수필형태로 미리 발표하는 것입니다. 혹, 이의가 있으신 분께서는 입증 자료에 의거 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냉철한 비판을 기다립니다.
수필이라서 각 입증 자료에 대한 주는 생략되었으나, 자료들은 확보되었으니, 의심부분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정몽주 후손께서 보신다면 죄송하오나, 역사사실에 의거 연구차 작성하고 있으므로 혹, 거짓이라고 판단되시면 입증 자료에 의거 논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져 입증자료없이 어느 교수의 주장이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고증자료에 의거해 주시면 적극 참고하여 잘 못 있으면 수정하겠습니다.
쓰기에 앞서
우리는 시조 단심가가 정몽주의 작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정몽주를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자리 매김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과연 그렇가?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 왔으나, 주장하시는 분들이 이미 고인(지헌영, 강전섭선생)이 되셨다. 본인은 아무래도 단심가와 하여가가 사실일가 하는 의문이 갔다. 생각해보라, 어찌 긴박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술잔을 나누며 시조나 읊을 수 있나?
이방원이 말하지 않았다면 누가 알 수 있는가? 당시 이방원이 이를 발설할 수 있었을가? 그러다치고 이방원이 정몽주를 본 받으라고 지시하여 처음 정몽주 문집을 발간되는데 어찌하여 자신과 나눈 이 중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는가? 어디에도 나누었다는 이야기 없었다. 정몽주가 죽은 지 225년이 지나서 심광세의 어린이 노래책에 등장한다. 이런 의문이 있어, 문헌을 찾아 자료조사하던 중, 이미 '60년대 지헌영(충남대 교수) 님 그리고 '80년대 그 제자 강전섭님(대전실업대 교수)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을 찾았으나, 앞의 본인과 같은 내용으로 거짓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강전섭님은 세세한 자료를 제시하며 거짓임을 밝혔지만 미흡하다며, 후에 누군가 밝혀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시조는 소리글자인 훈민정음 반포 후에 처음 등장하며, 육가(六歌) 중의 三歌로 이뤄짐
본인은 이에 힘얻어 강전섭님의 자료들을 하나씩 원전으로 확인하여 드디어 확신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나타나는 모든 관련 고서와 그리고 정몽주의 문집(조선에서 17번 간행)을 쌑쌑이 살폈고 시조 문학의 시원부터 국문학 장르를 고찰한 결과다. 물론 고려 말의 정몽주의 행적도 살폈다.
우리에게 시조문학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생겨난 것이다. 그 이유는 소리 글자인 훈민정음으로 우리 말을 표기하고부터 나타는 독특한 형태이다. 그럼 고려말의 선현들의 시조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할 수 있는데, 가객 김천택이 1728년(영조4년)에 지은 청구영언이 최초의 시조집이다. 고려 말 이후 336여년이 지난 글이 어디에도 없다가 여기에 나타나는데 작자미상 시조가 많이 실려있다. 고려 말 충신의 작품은 한 분이 한 수만 실려있는데, 유일하게 이존오의 시조만 2수 있다. 책의 권위과 흥미를 돋우려고 고려 말의 선현들의 이름을 가탁하여 지어낸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말에는 훈민정음이 반포되지 않았기에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336년을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여도 그들 문집에 어떠한 기록도 일체 없기 때문이다. 시조라는 명칭도 이 때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광수 (1712~1775)가 지은 《관서악부》<關西樂府> 1752년(영조 29)를 보면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단을 배제한 노래로서 장안(평양)의 이세춘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다.
시조에 대한 시원을 밝히려고 많은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1934년 이병기선생이 진단학보에서 부터 시작하여 양주동 이희승 조윤제 제 학자들이 시도하였으나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고려 말의 선현의 시조가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을파소까지 거슬로 올라가고 아뭍은 오늘날까지도 못밝히지만, 본인은 고려 말 선현들의 시조가 위작이라는데 처음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시조의 시원은 훈민정음 이후이며, 현존하는 최초의 가사의 시원은 농암 이현보현선생의 어보사이고 여기서 출발하여 현존하는 시조로서 시원은 도산 퇴계선생의 도산12곡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물론 시조형태가 퇴계선생이 처음 지은 것은 아니다. 도산 12곡 서문에 퇴계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 요즘들어 이런 노래가 널리 유행되기에 나도 이런 유행에 따라 노래를 짓는다. 그러니 퇴계선생이 시조형태를 처음 지은 것은 아니지만 현존하지 않기에 기록에 남는 것은 도산12곡이다. 정극인의 상춘곡이 최초 가사라고 하나 또한 거짓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본인 또한 그들의 주장을 신뢰한다. 이유는 정극인이 죽은 후 350 여년 지난 후에 처음 나타나고 그것도 그 문집에서 나오는데 정극인이 가사를 지을 정도로 훈민정음 구사력이 없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조는 도산 12곡
물론 하여가는 퇴계선생의 도산 12곡 중 제 1곡에 나타나는 것을 약간 객색했을 뿐이고, 단심가의 "이몸이 죽고죽어"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음률의 반복적 사용은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장육가(원조는 중국에서 발생)의 전형이며 하여가와 단심가 이 둘을 합쳐 놓으면 하나의 완벽한 장육가이다. 첩어의 사용과 그 음률이 동일 하지 않은가? 이는 장육가의 특성으로 한 사람이 지은 작품이다. 그는 심광세였다. 제목도 없고 물론 시조라고 한 것도 아니고 술잔 나누며 노래했다라고 한 것이다. 정몽주가 죽은 후 심광세의 해동악부가 나오기 까지 어떤 문헌에도 이런 내용은 전혀 없다. 제목 자체도 없이 노래를 했다고 한 것 뿐인데, 한자로 표기되었다. 후세에 단심가니 하여가니 하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는 정몽주보다는 오히려 정몽주 시종을 존중하라고 예시한 것이다. "님향한 일편 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는 당시 기생들이 주로 읊던 노랫말이다. 이마지막 부분은 성삼문의 시조에도 똑 같이 등장한다.
심광세가 여기에서 힌트 얻어 그 자신의 고백대로 어린이에게 감계(교훈)될 내용들을 노래와 무용을 하면서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심광세의 해동악부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민심이 떠날 때로 떠난 조선에서는 백성의 충성심 결집을 위해 해동악부에 실린 것을 정몽주의 이 야기를 단심가로 각색하여 적극 보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몽주 문집의 발간 변천을 보면 이 때 문집을 다시 편찬하면서 소위 단심가가 들어간다. 그러니 정몽주 문집을 여러번 수정 발간하면서도 어디에도 없던 단심가가 이 해동악부 발간 후에 그 문집에 게재되는데, 이는 단심가가 정몽주 작이 아닌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단심가는 심광세의 위작
단심가와 하여가가가 위작이라는 증거는 이미 왕조실록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정몽주가 살해되던 당시의 전후 행적이 빈틈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방원과 정몽주가 술잔을 나누기는 커녕 만났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이방원은 그 날 정몽주를 만나지도 않았다. 근데 어떻게 술잔 나누며 시조를 읊었단 말인가?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늙어감에 따라 다음에 누군가 자신과 같이 나라를 뒤엎으면 어떻하나에 우려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정몽주같은 충신(?)이 앞으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와 한패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는데 이 둘을 모두 죽었으니 회한이 남달랐을 것이다.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한 후회가 컷다. 정도전은 당시 정몽주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었고 이를 구하려 정몽주를 살해했는데, 그런 정도전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믿었다. 현실적으로 죽이려 하지 않았다고 백번 양보해도 이방원을 비롯한 동복 형제들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정도전에 대한 적개심을 떠올리며 정몽주를 죽인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정몽주를 복권시키고 정몽주의 문집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갈 대목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관으로 각전투에서 이성계를 따라 다니며 이성계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물론 당시는 정도전 이방원과 같은 무리였다. 이성계일파인 정도전 이방원은 고려왕이 실질적 권한이 없는 명목상의 왕으로 만들고 자기들이 조정할 수 있는 공양왕을 세우는데 정몽주는 앞장섰다.
공양왕 추대는 고려의 왕실의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 이뤄진 사건이다. 전제개혁이 고려왕실을 부정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였다면 공양왕 옹립은 그 정치적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건에 정몽주가 중용한 위치에 있으므로 과연 그가 고려왕실을 위해 절의를 다해 죽었던 가하는 점은 의심스럽다. 훗날 사림파 내부에도 이 당시에 정몽주가 취했던 행동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사전개혁도 말이 개혁이지 실제로는 당시 부패한 승려들의 사찰의 토지와 부패 권세가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들이 갖는 것이었지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돌아간 토지는 없다고 보는 사가들이 있다. 최근, 부정 축재자들의 재산 몰수를 보면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 댓가로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하는 공신 아홉명을 뽑는 9공신의 지위를 얻어 많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 때는 스승과 다름없는 목은과 반대입장 서있어 소원해졌다.
이성계가 문하시중일 때 그 밑에서 수문하시중의 자리를 했다. 이 때까지 이성계와 한무리로서 잘 지내다가 공양왕과 가까워지며 이성계와 동열의 문하시중이 되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 때 목은을 옹호하며 목은의 제자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끄러들이는 행동하며 정도전의 행태를 경계하며 그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던 중 이방원이를 눈치채고 자신들까지 화가 미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정몽주를 처치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진술에도 조선은 두 정 즉 정몽주와 정도전의 공이 크다는 증언이 나오고, 목은집에도 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태종 이방원은 노후가 되어,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행실을 회고하며 정몽주에 대한 미안함과 정도전에 대한 치떨리는 배신감이 중첩되며, 정몽주가 자기 아버지에게 보였던 충성을 후세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행적을 최대한 수집하여 문집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문집에는 정몽주와 자신만이 나눈 하여가와 단심가에 대한 자료는 없다. 왜 그렇가? 정몽주를 찬양하여 그 본을 받기 위한 목적인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귀감 중의 귀감의 자료를 숨기었나? 그렇다면 단둘이서 나눴다는 이야기는 누구로부터 발설되었는가? 하여가와 단심가 이야기는 죽은 지 225년 후인 1617년 심광세가 지은 해동악부 풍세악편에 처음 나타난다. 풍세악(風世惡) 이란 세태가 나쁘게 돌아간다 라는 의미인데 정몽주가 말했다고 썼다. 한자로 된 것을 다시 역변역하여 오늘날의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如此亦如何 여차역여하 如彼亦如何 여피역여하
城皇堂後苑 성황당후원 頹碑亦如何 퇴비역여하
吾輩若此爲 오배약차위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此身此了死了 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이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그에 앞서 성현( 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에 정몽주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는데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없다. 성현은 정몽주가 죽은 지 불과 40년후에 태어났기에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심광세는 225년 후에 어떻게 들었다는 말인가? 심광세의 정몽주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이 성현의 용재총화와 일치하지만 일명 "하여가" "단심가"로 불리는 내용이 새롭게 등장한다. 따라서 심광세는 성현의 용재총화를 읽고 거기에 퇴계선생의 도산 12곡 중 1곡을 점화 내지 도습하고 단심가 두 구절을 새롭게 만들었으며 3절은 당시 기방에서 유행하던 구절을 도습한 것이다.
도산12곡 중 1곡과 이방원 작이라는 하여가를 비교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도산12곡 1곡 (퇴계) 하 여 가 (심광세 위작,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草野) 우생(愚生) 이 이러타 어떠하료 만수산 드렁 츩이 얼켜산들 어떠리
하물며 천석(泉石) 고황(膏肓)을 고쳐 무엇하료 우리도 이와 같이 얽켜 산들 어떠리
여기서 결정적이 또하나의 단서가 나오는데, 바로 "만수산"이라는 지명이다. 이 "만수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려사절요 제35권, 공민왕 2년에 중랑장 방사량(房士良)이 올린 시무 11조에 '원 나라는 말기에 만수산(萬壽山) 유궁(幽宮)의 낙으로 백 년 동안 배식(培植)하였던 기업을 무너뜨렸습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원 나라에 있던 유궁이 존재하던 산이다. 고려의 지명이 아니다. 심광세가 만수산을 언급한 후부터 개성의 뒷산을 만수산이라 표기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몽주가 살아있을 때 "만수산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심광세의 의도는 오히려 정몽주의 시종을 본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정몽주는 당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므로 당연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지만, 정몽주 시종(2명)들은 하찮은 이들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도 상관인 정몽주가 철퇴를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상관인 정몽주를 얼싸 안아 몸으로 막아 함께 맞아 죽었으니 그 충성심이 정몽주에 비교할 게 아니라는 취지이다.
그러니 이런 미천한 신분의 백성도 모시는 사람을 위해 목슴을 받쳤으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임금 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라는 감계의 글이었다. 용재총화에는 정몽주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자주 들리는 친구집에 갔다가 친구가 없자 뜰의 꽃에 가서 춤추며 친구부인에게 술 가져오라고 하는 등 민망스런 정몽주의 행적과 여색을 즐긴다느니 재물과 사치를 좋아한다느니, 심지어 초라한 조상 묘에 대한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것에 이르기까지 서술하고 있으나 그 유명한 단심가 이야기는 일체 없다. 물론 해동악부에도 일부 이런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지만 이방원과 대작하며 노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심광세가 지어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정몽주가 고려 충신으로 확고부동하게 이르게 하는 자료가 되고, 그 시종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으니, 역사가 얼마나 아이러니한 가를 알 수 있다.
정몽주의 문집에서 일명 단심가가 나타나는 시점과 심광세의 해동악부 간행 연대를 보면, 해동악부가 간행 된 후에 정몽주 문집에 단신가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전에는 여러번 정몽주 문집이 개편되며 간행되었으나 그 유명한 단심가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